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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Feb 05. 2021

서브컬처와 철학 (5)

실존철학에서 바라본 키라와 를르슈



Image from 『機動戦士ガンダムSEED』, 『コードギアス~反逆のルルーシュ~』Copyright by (C)SUNRISE



들어가며



『기동전사 건담 SEED』가 방영한지도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전통적으로 건담 시리즈는 태생적으로 우월한 전투 능력을 가진 이른바 뉴타입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정체성의 고민을 겪으며 성장하는, 소위 ‘자기 VS 세계’ 테제에서 일종의 클리셰cliche화가 된 작품군이다. 건담 SEED는 태아 단계에서 유전자를 조작해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는 코디네이터들의 군대 자프트와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은 현생 인류인 내추럴들의 지구 연방군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이전 시리즈들보다 시청자들은 훨씬 당사자 의식을 갖고 대할 수밖에 없었다.  

   

코디네이터 중에서도 히비키 박사의 연구를 통해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채 태어난 1세대 코디네이터인 주인공 키라 야마토는 전장에 말려들어 임펄스 건담에 타게 되고, 소꿉친구 아스란 자라와 그의 자프트 동료들과 싸우게 된다. 지구 연합군의 전함 아크엔젤에 승선해 있는 도중 키라는 친구 사이 아가일의 연인 프레이 알스터와 몸을 섞으며 갈등을 빚기도 하고, 코디네이터 콜로니의 온건파 클라인 의원의 딸 라크스 클라인, 지구의 오브 연합 수장국의 원수 우즈미 나라 아스하의 딸이자 쌍둥이 남매인 카가리 유라 아스하와 조우하기도 한다. 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최종적으로 SEED에서는 라우 르 크루제, SEED DESTINY에서는 길버트 듀랜달이라는 아치 에너미와 격돌한다.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는 여동생 나나리와 함께 일본으로 추방당한 브리타니아 황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식민지 일레븐이 된 일본에서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학생으로 살던 도중, 자신의 형이자 일레븐의 총독인 크로비스의 레지스탕스 진압에 말려들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상황에서 수수께끼의 소녀 C.C.와의 계약으로 절대 복종의 힘 ‘기어스’를 얻어, 어릴 적 한 ‘브리타니아를 쳐부수고 여동생 나나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는 맹세를 이행하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이다.


1기의 경우 매 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략 전술의 연속, 또 다른 주인공 쿠루루기 스자쿠와 레지스탕스의 탑건 카렌 슈타트펠트의 라이벌 매치, 최종적으로는 를르슈의 기어스가 폭주하여 평화의 가능성이었던 유페미아 디 브리타니아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저지른 대학살과 스자쿠의 눈앞에서 그녀를 사살하는 를르슈까지, 화를 거듭할수록 비교적 긍정적 의미에서 충격과 논란의 피드백이 일어났다면, 2기인 R2는 막판에 플롯이 산으로 가는 바람에 어중간한 신파극이 되어버렸다는 게 내 의견이다.


이번 글에서는 우선 마르틴 하이데거에서 폴 리쾨르로 이어지는 실존철학의 백미를 소개하고, 이를 토대로 키라와 를르슈 각각의 신변잡기를 읽어나갈 것이다. 청소년기에 이 두 00년대 대표 선라이즈 로봇물을 보다가 본의 아니게 세카이계セカイ系에 입문해버린, 나를 포함한 키덜트 독자 분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와 폴 리쾨르(1913~2005)



하이데거와 리쾨르의 실존철학    


 

마르틴 하이데거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독일 철학자이다. 하이데거는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세계-내-존재’라 표현한다. 인간은 세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사물과 관련을 맺고 서로 배려하며 살아간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삼라만상은 사고 가능한 세계와 사고의 한계 너머의 초월론적인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칸트의 오성/이성을 계승한 비트겐슈타인은 초월론적인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테제를 남겼다. 하이데거는 초월론적인 세계를 ‘존재’, 사고 가능한 세계를 ‘존재자’로 간주하고, 스스로 존재자임을 인식하는 인간을 ‘현존재’라 칭한다. ‘세계-내-존재’는 곧 현존재이다.


단순히 사물에 둘러싸여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삶을 하이데거는 그저 인간, 곧 익명의 ‘세인世人’이라 불렀다. 인간은 궁극의 목적이어야 하는데, 세인들은 교환 가능한, 대체 가능한 존재자들일 뿐이다. 도구적 목적에 그치는 인간은 반드시 ‘나’일 필요가 없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비본질적이라 보고, 본질적인 삶을 강조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20세기 말까지 활동했으며, 그의 철학은 모국 프랑스는 물론 유럽,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청년 시절 하이데거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하이데거-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후설-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양 날개 삼아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행위자가 결여된 관찰자, 제3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의 시점으로 들어가 의식의 ‘지향성’을 다루는 현상학을 에드문트 후설은 주창하였다. 그러나 후설 식의 순수 의식의 본질로는 실존의 문제가 환원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스승 후설의 관점에서 진일보하여, 자기 자신과 세계의 상관관계에서 실존을 찾는다.


리쾨르의 주요 연구 중 하나인 내러티브narrative는 실존의 본질을 시간성, 역사성으로 파악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계승한다. 리쾨르의 하이데거 해석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자기 삶의 연결 고리를 설명한다. 내러티브는 자기 진정성과 주체의 시간성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한다. 내러티브를 통해 물리적 시간과 인간의 시간의 만남, 즉 역사적 시간이 이해 가능한 텍스트로 바뀐다. 리쾨르는 주체의 정체성 문제와 내러티브를 연결하면서, 내러티브 문제가 단순히 언어적 유희가 아닌 인간 삶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단 주체의 능동성에 대하여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미래의 사건을 각자의 행동 동인으로 끌어들여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결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타인과의 공존, 공통의 세계가 요원하다고 지적한다. 진정성 있고 지속적이고 혁신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타인과 공존해야 한다. 나만의 진정성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기 삶에 대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삶은 다르게 이해된다. 이 점은 리쾨르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윤리적 삶은 로고스logos적인, 딱딱 맞아 떨어지는 삶이 아니다. 자기에게 좋은 삶, 적합한 삶이다. 자기 자신의 삶이 기성의 관습이나 관행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 기존 관습이나 관행을 거스르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자기에게 좋은 삶을 새로운 행동으로 보여 주고, 타인에게 그 행동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 행동에 대한 새로운 의미는 새로운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실존은 진정으로 사는 것, 내가 이 땅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것이다. 나를 나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 문제다. 자기 진정성은 미리 결정되지 않고, 삶에서 찾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결국 행위들의 상관관계에서 평가되고, 상관관계의 의미들 총체를 가리켜 우리는 ‘세계’라 한다. 세계 없는 행위는 의미를 말할 수 없다. 세계는 무한하다. 기존 의미에서 새로운 의미를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은 유한하지만, 인간성으로서 삶은 무한하다.



Image from 『機動戦士ガンダムSEED』Copyright by (C)SUNRISE



키라 야마토의 경우     



양부모 밑에서 자라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키라는 지구 연합군의 신형 기체를 탈취하고자 잠입한 자프트 정예 부대가 일으킨 전투에 휘말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트라이크 건담을 조종해 소꿉친구 아스란의 전우 미겔이 탄 자쿠를 격파하고, 정예 부대 엘리트 이자크의 얼굴에 상처를 낸다.     


아크 엔젤의 함장 마류 라미아스는 한눈에 그가 코디네이터임을 간파한다. 자신의 출생을 친구들에게도 숨기고 있던 키라는 곤혹스러워한다. 그러나 키라는 자신이 살아왔고 친구들과 앞으로도 살아갈 지구를 지키기 위해 연합군의 군복을 입게 된다.     


키라는 자신이 코디네이터 중에서도 특출한 슈퍼 코디네이터(이는 작중 정식 명칭은 아니다)임을 작품 중반부까지 알지 못한다. 그저 떠밀려 건담에 타고 보니 타고난 연산 능력과 반사 신경으로 기체를 쉽게 조종할 수 있었을 뿐이고, 자신의 능력을 주변 사람들을 위해 쓰고자 했다. 그러나 자프트의 민간인 공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프레이와 전투 중 아스란에게 남자친구 톨을 잃은 밀리아리아는 코디네이터에 대한 증오심을 숨길 수 없었고, 아크엔젤 내에서 유일한 코디네이터였던 10대 소년 키라는 마음을 쉴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아크엔젤이 아스란의 약혼녀 라크스의 신변을 확보하고 키라는 자신에게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줄 사람을 만나게 된다. 콜로니 의원들 중에서도 반전反戰의 선봉에 있는 시겔 클라인의 딸이자 자신도 가수이자 셀러브리티의 신분을 활용해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었는지라 아크엔젤 승무원들도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전시 상황에서 그녀는 필경 높으신 분들에 의해 협상의 도구로 쓰일 것이었다.     


키라는 단독으로 라크스를 스트라이크 건담에 태워 자프트 전함과 접촉한다. 그러나 아스란의 상관인 라우 르 크루제는 스트라이크 건담이 허술한 틈을 타 그를 격추하려 했다. 이 라우 르 크루제라는 남자는 아크엔젤에 승선 중인 전투 파일럿 무우 라 프라가의 아버지 알 더 프라가의 클론이다. 즉 코디네이터가 아닌 내추럴이다.     

명문 프라가 가문의 당주 알은 크루제라는 클론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클론이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텔로미어가 짧아 노화가 빨라 수명이 짧았고, 이를 안 알은 크루제를 버리려 했다. 크루제는 프라가 저택을 방화하고 도주했으며, 이 일로 무우는 양친을 잃는다. 세월이 흘러 알의 탁월한 유전자를 가진 크루제는 자프트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아스란의 아버지 패트릭 의장의 신임을 얻는다.     


그의 분노는 알을 비롯한 내추럴 뿐 아니라 알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인 코디네이터에게도 향하고 있었고, 두 진영 모두를 자신이 심판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온 프레이가 뉴트론 재머 캔슬러의 정보를 지구 연합에 흘리는 것도 모른 체 했고, 키라와의 마지막 전투에서는 전함 도미니언에서 나온 탈출선을 판넬로 격추하기도 한다.     


팬덤에서 키라를 부르는 별명은 ‘보살’이다.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니면 콕핏(조종석)을 피해서 상대를 친다고 해서 나왔다. 키라가 콕핏을 친 대표적인 케이스는 미겔, 니콜, 크루제인데, 미겔의 경우 마류까지 콕핏에 태운 상태에서 살아남고자 생전 처음 보는 기체를 몰다가 그렇게 됐고, 니콜의 경우 기체 째로 아스란의 몸빵을 하느라 키라가 불가피하게 공격했고, 크루제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날 정도로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다가 그렇게 되었다. 후속작 데스티니의 주인공 신 아스카가 인정사정 안 봐주고 상대를 완파시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친부모에게 버려져 양부모 밑에서 자랐고 함 내 유일한 코디네이터로서 프레이의 히스테릭한 애증을 받는 그가 크루제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키라가 그러한 관용을 발휘할 수 있던 건 본인의 품성도 한 몫 하지만 무엇보다 주변 어른들의 도량이 크게 작용했다. 키라의 양부모는 그를 친자식처럼 정성스레 길렀고, 마류와 무우는 ‘그도 결국 사춘기 남자애에 불과하다’며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키라를 어색해하던 친구들도 (프레이를 뺏긴 사이를 제외하면)다시 관계가 회복되었고, 톨은 스카이그래스퍼에 타 키라를 엄호하려다 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키라는 톨을 죽인 아스란과 결국 화해하고 제2차 야킨 두에 공방전에서 협력하여 자프트, 연합군과 맞선다.     


키라는 자신이 타인과 다른 존재라며 홀로 틀어박히지도, 핍박받을 바엔 핍박해주겠다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데스티니에서 더욱 성숙해진 키라는 광기를 더해가는 전장에서 억제력으로서 양측을 압도하며, 여동생의 죽음이라는 PTSD를 빌미로 일말의 사색 없이 질풍노도의 정념에 몸을 맡기는 페이크 주인공 신 아스카에게 참교육을 시전하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남들과 다른 본질을 기꺼이 활용하면서도 자신 역시 맨몸의 인간이고 똑같은 감정을 갖고 똑같이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며, ‘유전자에 따라 생을 결정한다는’ 데스티니 플랜을 내세운 듀랜달과 맞선다.     


키라는 자신에게 맞는 삶을 찾아 끊임없이 투쟁했으며, 그 과정에서 결코 세계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행위자와 세계의 상호작용을 끝내 깨닫지 못한 오만한 크루제와 듀랜달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Image from 『コードギアス~反逆のルルーシュ~』Copyright by (C)SUNRISE



를르슈 람페르지의 경우    

 


형 크로비스를 죽이고 제로의 가면을 쓴 를르슈가 최종적으로 획책하는 것은 아버지 샤를로 대표되는 현재의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를 전복하고, 여동생 나나리와 같은 약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흑의 기사단이라는 무력으로 일본을 탈환하는 게 선두 과제였다.     


그러나 스자쿠는 ‘무력으로는 안 된다. 브리타니아 점령하의 체제 안에서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 일본 수상의 핏줄에서 총알받이 일반 병사로, 그리고 전투 기체 랜슬롯의 파일럿으로, 유페미아의 호위 무관으로, 스자쿠는 점점 브리타니아군의 주류에 진입하고 자연스럽게 흑의 기사단의 최악의 방해물이 된다.  

   

한국 역시 식민지 피지배의 경험이 있다 보니 유페미아의 학살 사건 이전까지 를르슈를 정당한 레지스탕스로, 스자쿠를 민족반역자로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유페미아 사건과 이후 샤를과 를르슈, 스자쿠의 삼자대면 장면을 통해 그들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막연하게라도 를르슈가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던 시청자들은 유페미아에게 건 기어스를 레지스탕스 반격의 정당방위로 이용하는 장면에서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고, 를르슈를 샤를 앞에 꿇리고 포상으로 자신을 황실 직속 기사단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 넣어달라고 하는 스자쿠에겐 ‘차라리 출세욕에 솔직해서 좋다’고 평했다.     


샤를에 의해 나나리를 포함한 기억을 봉인당한 를르슈였지만 얼마 안 가 우연한 계기로 모든 기억을 되찾고 다시금 제로로 돌아온다. 그리고 가짜 남동생인 롤로를 구슬려 황제 직속 연구자들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함구시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고난 정치력으로 브리타니아에 대항하는 초합집국을 결성하고, 그렇게 다시 순조롭게 반역 활동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예전 자신이 스자쿠에게 건 ‘살아라’라는 기어스에 의해, 동급생이었던 니나 아인슈타인이 만들어낸 살상병기 프레이야가 지상에 발사되어 나나리를 포함한 약 3,500명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나리를 위해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온 를르슈는 실의에 빠진다. 를르슈의 최대 적수인 황자 슈나이젤은 흑의 기사단을 찾아와 모든 것을 밝히고, 리더 오우기는 일본을 되돌려 받는 조건으로 제로를 배신하기로 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를르슈는 목숨을 포기하려 하나, 롤로의 목숨을 내던진 희생으로 가웨인을 타고 간신히 탈출한다.     


롤로를 장사지내고, 기어스를 사용해 내전을 일으켜 그 틈에 황혼의 문으로 잠입한 를르슈는 아버지 샤를과 마주한다. 곧이어 죽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 마리안느와 스자쿠, C.C.가 나타나고, 샤를은 모든 것을 밝힌다.     

인류 전체의 의지를 대표하는 ‘C의 세계’가 있고, 라그나로크의 접속을 통해 모든 인류는 C의 세계로 편입, 어떠한 오해나 부의 감정 없이 진실된 상像만이 공존하게 된다. 완결된 세계이자 닫힌 세계다. 어릴 때부터 살얼음판 같은 계승권 다툼의 한복판에 있던 샤를은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지 않는 이상향을 꿈꿨고, 의형제 V.V.와 ‘우리 둘만은 서로 거짓말하지 말자’고 약속한다. 라그나로크 계획은 샤를과 기어스 중개자 V.V.의 이상향의 실현이었다.     


황제가 된 샤를이 귀족 출신 영애와 정략결혼을 하다가 평민 출신 기사인 마리안느를 사랑하여 혼인할 때부터 둘의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샤를이 평범한 인간 아버지의 감정에 동화될수록 V.V.는 샤를이 어릴 적 약속을 잊어갈 거라 생각했고, 기어이 밤중에 마리안느를 불러내 사살한다. 나나리는 어머니의 시체를 본 충격으로 하반신 불구에 장님이 되고 만다.     


자기 앞에서 ‘참 안됐구나’ 하며 딴청을 피우는 V.V.를 보며 샤를은 ‘형은 (거짓말하지 않겠다는)약속을 어겼다’ 며 분노하지만, 를르슈와 나나리를 지켜내려면 애써 모른 척 하고 둘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그나로크 계획이 가시화됨에 따라 샤를의 오만은 극에 달한다. 브리타니아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일본에 전쟁을 일으킨 것도, 정치적 도구로 볼모잡힌 를르슈와 나나리의 안위를 무시한 것도 ‘C의 세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철학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정신의)역사는 종말을 맞는다”고 고했고, 니체는 ‘영원회귀’, 세계는 발전도 후퇴도 없이 영원히 되풀이된다고 주장했다. 샤를의 사상 역시 이러한 니힐리즘의 연장에 있다. 그러나 그 니체조차 초인이 세계에서 행하는 자기실현이야말로 능동적인 니힐리즘이라고 여겼다. 샤를은 이 땅을 살아가는 숱한 인간들의 ‘과정’을 불완전하다고 일축하고 자신의 ‘결과’를 강요한 것이다. 를르슈 역시 이를 지적한다.     


C의 세계에 ‘시간의 흐름을 멈추지 말라’며 기어스를 걸어 샤를과 마리안느의 사념의식을 매장해버린 를르슈. C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를 엿본 그는 스자쿠와 약속을 한다. 샤를이나 슈나이젤 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결과만 보는 세계’가 아닌 ‘모두가 원탁에 둘러앉아 과정을 고민하는 다정한 세계’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들의 인생을 투신하기로.     


그렇게 를르슈는 황궁 사람들에게 기어스를 걸어 친히 황제에 오르고, 이미 충분히 입증된 본연의 능력으로 브리타니아군을 지휘, 세계를 굴복시킨다. 그리고 패전국 수뇌들의 처형식 날, 미리 말을 맞춰 둔 제레미아의 협력 하에 제로의 가면을 쓴 스자쿠가 를르슈를 참살한다.     


를르슈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전제 국가의 최악의 폭군으로 변모하여 사람들의 악의를 한 곳에 집결시킨 끝에, 그를 부수어 사람들이 저절로 자신이 원하던 방향으로 세계를 이끌게 했다. 이번 글의 주제에 비추어 볼 때 그는 끝까지 반역자였으며 반동인물이었다. 그는 살아생전 C.C.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을 이해받지 못했고 이해해 달라 요청하지도 않았다. 라그나로크를 눈앞에 두고 ‘나는 내일이 있는 세계를 원한다’고 소리쳤지만, 정작 그 세계에 자신은 없다.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된 이상 그의 이름도 안주할 곳이 없다.     


그나마 자신과 똑같이 세상의 악의를 대신 한 몸에 받으려던, 그래서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 줄 여동생 나나리의 품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 세계에 대한 를르슈의 조그마한 응석이었다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깨달은 나나리가 오열할 때 나 역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며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나의 본질을 뭐라 규정하든, 늘 그보다 앞서 ‘나’라는 고유한 실존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세계와의 상호작용의 여지없이 독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사물과 관련을 맺고 배려하는 현존재 인간이 스스로 세계-내-존재라 역설했고, 리쾨르는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 인정받아 세계에 새로운 가치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키라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미지의 가능성을 늘 내포한 평범한 인간의 삶을 소망했고 그를 둘러싼 세계는 ‘코디네이터’에 앞서 ‘인간’으로서 그를 받아들였다. 를르슈는 나나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소망했으나 언제나 그는 조정자로서 그 밖에 있기를 자처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상적인 입법자는 정치사회의 외부에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 를르슈는 변혁하고자 하는 세계에서 늘 아웃사이더였고, 최후에는 세계의 영원한 적이 되었다.     


굳이 글의 주제에 비추어 어느 쪽의 삶의 방식이 바람직한지 묻는다면 나는 키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면 키라는 시종일관 ‘세계 안에 있는 맨몸의 인간의 실존’을 추구했지만, 를르슈는 시종일관 ‘세계의 의지와 마주하는 초월자’를 지향했기 때문에 방향성이 다를 뿐 그 과정에서의 독선은 샤를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글의 논점이 흐려지는 것을 각오하고 를르슈의 용기를 칭송하려고 한다. 자신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 드러내며 세계와 상호 작용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정념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죽이고 세계를 변혁하고자 맞서는 용기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키라와 를르슈는 나의 십대를 함께한 히어로와 안티 히어로이다. 이제는 머리가 커진 어른이 되어 철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들을 말하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들을 동경하는 소년인 채다. 일견 딱딱한 논리와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늘 그에 앞서 나조차 완벽히 알지 못하는 정념이 향수를 자극하고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세계와 공존하고픈 나의 능동성의 원동력인 셈이다.




참고 문헌


『존재와 시간』M. Heidegger 著, 소광희 譯

『텍스트에서 행동으로』P. Ricœur 著, 박병수・남기영 譯




(※ 모처의 연재 원고 중 반려본임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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