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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an 12. 2022

□과 ○ (6)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넘어서



『Creazione di Adamo』Michelangelo, 1512



○에게     



일전에 제가 가정불화 때문에 자살하고 싶어 하던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린 바 있습니다. 그에 대한 경과부터 말씀드리자면, 다행히도 학생의 정서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지자체와 연계된 시민 단체에 의뢰하여 담당 복지사가 학생의 방과 후 활동이나 가정 내 멘토링을 적극적으로 진행한 결과입니다.


최근 이 학생이 또 한 가지 난해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번에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자유가 보다 큰 신적 질서에 의해 작용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아는 목사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존재는 자신이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인간의 환상에 대해 미소를 지을 것이다’ 라고 했대요. 뭐가 맞는 걸까요?”


종교인이 자유 의지를 주장하고, 20세기 최고의 과학자가 자유 의지를 부정하다니,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리학과 물리학, 기타 자연과학 분야의 명망 있는 학자들의 입장은 ‘과학적으로 세계를 검증할수록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의 의지가 아니고선 설명되기 힘든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만, 최전선의 연구자가 아닌 사색하는 문필가의 입장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만도 없어서 말입니다. 의견을 구하고자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에게



자유 의지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화두로군요. 그렇죠, 말씀대로 신 앞에 한없이 작은 인간이 머리를 조아리는 게 당연한 종교인이 자유 의지를 역설하고, 최첨단 인공지능 시대의 첨병인 심리학자와 물리학자가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의 의지를 염두에 두는 건 얼핏 들으면 이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각자가 다 자신의 입장에서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에 따라 먹고, 본능에 따라 자고, 본능에 따라 교미합니다. 우리가 철학에서 자유 의지를 말할 때 물론 이러한 본능에 따른 생존을 위한 행위들도 포함되지만 거꾸로 본능에 거슬러 먹지 않고, 자지 않고, 교미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생존과 관계없이 행하는 일체의 활동 역시 자유 의지입니다. 그러한 자유 의지에 따라 인간은 학문을 수립하고, 문화를 꽃피우며,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지에서 볼 때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단서는 종교에 있습니다. 구원론과 같은 이성적으로 믿기 어려운 것, 십계명이나 은혜의 율법 같은 이성적으로 따르기 힘든 것, 그것을 신뢰하고 믿으며 즉 자아를 부정하고 본능을 거부하며 자유 의지가 발동합니다. 이는 불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한 기전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자유 의지는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걸로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간파했겠지만, 여기서 정의한 자유 의지는 결국 보다 자유롭지 않은 상태 – 본능을 거스를 수 없는, 자유로워질 역량이 없는 상태 – 를 상정하고서야 성립됩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세계 속에서 정해진 내 본질에 따라, 더 나아가 보다 탁월하고 전지전능한 존재의 예비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는, 바로 결정론의 상태를 뜻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자유 의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실은 항상 무언가에 의존해서 나타나는 경향성입니다. 멈춰 있는 물체들을 기반으로 다른 물체가 움직이는 속력을 계산한 게 속도이며, 지구의 자전 역시 우주와의 상관성에서 처음으로 성립합니다. ‘무無’ 역시 존재하는 것들의 무존재가 기본 조건입니다.


그러나 또한 극한적으로 인간은 자유 의지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본능에 의해서든, 본능을 거역해서든, 인간이 행위를 하는 데에 한계가 있고 결과값이 결정되어 있다고 치더라도, 그 결과값은 각자의 사색의 영역이며 따라서 비교할 수 없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즉 진리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심리학과 뇌과학에서라면 의지will의 근간을 속 편하게 호르몬 등의 화학물질의 작용기전으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학 작용이라는 ‘현상’만이 사람의 의지에 따른 ‘행위’를 설명할 순 없습니다. 단지 개중 설명 가능한 가장 타당성 있는 가능성이죠. 바꿔 말하면 이는 귀납적 사고inductive reasoning의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현상에 의해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이론은 ‘행위의 원인은 현상이다’라는 역vice versa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자유 의지와 결정론은 궁극적인 요소를 간과했기 때문에 순환 논리의 도돌이표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의지의 가능성은 관찰자의 시점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는 물리학자처럼 제3자의 관점에서 사태 또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발견되는 건 결정론이라는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동하는 당사자의 관점, 즉 행위자의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자가 자기실현하는 자유는 통념의 세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특정 상황에서 행위자 스스로 자유의 의미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행위는 기존 통념을 벗어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자유로운 행위라 간주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상 세계의 통념을 벗어나면서도 통념에서 바라볼 때 인정 가능한 것, 즉 새로운 것으로 승인받을 때 비로소 행위자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그 세계를 인식대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종교의 기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성경의 비유에 따르면, 우리는 옹기장이가 제각각 다르게 만든 옹기입니다. 옹기가 쓰이고 깨지는 것은 옹기장이의 주권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미래의 결정사항에 따르면 구원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고 악하게 쓰일 사람도 정해져 있습니다. 학문적・물리적 관점은 개별적인 행위자를 배제하므로 당연히 이런 귀결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냉소와 방종과 나태함과 안일함을 정당화시킬 순 없습니다.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현실 속에서 본능에 몸을 내맡기지 말고 천국을 갈망하고, 죄를 짓지 말고, 몸을 영혼의 신전처럼 다루라고 합니다. 그것은 좁은 길이며, 십자가를 짊어지는 가시밭길입니다. 반드시 신앙에 몸을 담는 일이 아니더라도 바람을 등지지 않고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가며 사는 삶의 방식은 얼핏 보면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는 고행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의 인간에 저항하고 멀어질 때 역설적으로 나는 기존의 인간 존재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진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세계와 재귀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나갈 때 우리는 ‘결정된’ 미래를 좀 더 당당히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문헌     


『Freedom and Nature』P.Ricoeur 著, Erazim V. Kohak 譯

『새번역성경』대한성서공회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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