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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Jun 02. 2021

□과 ○ (4)

리쾨르와 셸링의 ‘자유’

Image from 『We are the future』(H.O.T) / Copyright by (C)SM Entertainment 1997~2021



○에게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상담은 참 어려운 일이란 걸 요즘 깨닫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지각이 잦고 수업 시간에 대놓고 자는 △를 오늘 방과 후에 지도실로 불렀습니다. 무슨 고민이 있나 물어봤더니 꽤 힘든 가정사를 겪고 있더군요. 구체적으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 제 앞에서 “밤에 몰래 번개탄이라도 피워놓고 자면 모든 게 정리되지 않을까 생각해요.”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건 무책임한 행동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뿐이잖니?” 라 말하자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는 “그 사람들도 무책임하게 저러고 있는걸요? 저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무에게도 민폐 안 끼치고 제 자유를 행사하는 거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충격적이라 마땅히 대답해줄 말도 바로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그 자리에선 칸트의 “어떤 형태의 자기살해든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행위라면 이유를 막론하고 죄악이며 범죄다. 이는 보편적 자연법칙인 자기보존의 의무에 위배되며,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므로,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이다.”는 논리를 들며 다독거렸습니다만, 사실 저 스스로도 ‘죄악을 행할 자유’의 근간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조언을 구하고자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에게



껄껄껄, 참으로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내셨겠습니다. 맞습니다, 상담이란 건 참 힘든 일이지요. 피상담자의 입장이 되어 공감하는 동시에 어떤 적정선이나 윤리 강령에 위배되는 발언을 할 수는 없고… 죽고 싶다는 사람한테 사실 그 자리에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위로가 되겠습니까만, ‘나 자신에게 죄악을 행할 자유’라, ‘아무에게도 민폐 안 끼치는 자유’라… 어찌 보면 너무나도 소극적인 자유라 안타깝군요.


여기서 저는 리쾨르의 ‘정황적 자유’와 셸링의 자유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간략하게 소개해볼까 합니다. 저의 말이 오늘 하루 고생하신 귀하를 위해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나아가 그 학생의 실존에도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길 바랍니다.


20세기에 활동한 철학자 리쾨르는 마르셀Gabriel Marcel의 영향을 받았고, ‘육화된 존재는 실존하는 주체’라는 사유를 물려받았습니다. 마르셀에 따르면 자아는 신체 활동을 통해 특정 환경에 육화된 존재입니다. 리쾨르는 이 문제를 자유의 문제로 확장하는데요, 능력으로서의 자유와 실현으로서의 자유를 구분하면서, 행위와 그 의미의 관계로 치환된 연결 고리에 주목합니다. 행위는 자유의 능력인 동시에 발휘이며, 특정 상황에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행위 동기와 결합해서 의미를 생성합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문제 삼고 자기 자신의 의미를 묻습니다. 신체의 아픔과 즐거움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계기입니다. 실존은 자유이며, 자기 자신 안의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입니다. 신체적・정신적 상황에서 작동하는 자유를 통해 인간은 편견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자유를 정황적 자유라고 합니다.


이는 후설이 현상학에서 역설한 순수 의지와는 대립하는 개념입니다. 상황은 내 자유를 억압하는 환경인 동시에 내 자유를 실현하는 장소입니다. 나는 원하는 상황을 요구할 수 있으며,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내가 무언가를 해내야 합니다.


나만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과거와 다른 현재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런 점에서 독특한 시간을 전제합니다. 상황을 인식하고 자기 능력과 연결시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데서 자기만의 고유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상황에 대한 무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는 자기 고유의 선택의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정황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귀결됩니다. 세계는 주체들의 삶을 결합하는 총체입니다. 세계 안에서 주체들은 체험하고 소통하며, 바로 세계를 매개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합니다.


‘아무에게도 민폐를 안 끼치며 나를 해하는 자유’라니… 그런 게 기술記述적인 영역으로나마 허용되는 건 예술가의 자기 파괴 정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보편 사회에 사는 그 누구도 타인과 일체의 관계가 없이 존속할 수 없습니다. 정말 자유로운 근대적 개인이라면 민폐든 공로든 자신이 원하는 바, 믿는 바를 모종의 행위를 통해 세계에 내보이기를 단념하면 안 됩니다.


셸링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흔히들 ‘자유’라는 개념은 모종의 ‘체계’, ‘법칙’이란 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나타내기 위한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행복’의 상대성을 인정합니다. 단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법을 통해 행복의 의지를 제한하는 동시에 보호하고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무심코 ‘자유’라는 개념 역시 법치 국가에서 법으로 제한하는 범위만큼 통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이미 완전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학생의 말마따나 ‘민폐만 안 끼치면 뭘 해도 되는 자유’도, 심지어는 ‘내 역량이 허락하는 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전횡의 자유’까지도 자유라고 말하지 못할 건 없습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 추구해 온 ‘보편적 진리’가 그를 용인한 적이 없음은 등가보복 원칙을 내세운 함무라비 법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만큼 ‘자유라는 개념은 결코 체계와는 양립할 수 없고, 통일성과 전체성을 요구하는 모든 철학은 자유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쉬이 반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셸링은 담대하게 “개개인의 자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전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최소한 신적인 오성 안에서라도 어떤 체계는 자유와 공존하며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외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동일률의 원칙과 셸링의 고유한 신론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을 진술하는 명제는 주어와 술어가 똑같다거나 주어와 술어가 어떤 매개도 없이 그냥 연결된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이는 ‘불완전한 것이 있는 이유는 불완전한 것 안에 있는 완전한 것 때문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결코 ‘문자 그대로 완전한 것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필연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의 동일성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 세계에 본질이 되는 바로 그것은 자연에게도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외관상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도출될 수 있는 셈입니다. 이런 만큼 셸링은 소위 범신론이 신과 대비되는 사물의 모든 개체성을 지양해 버리는 현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셸링에 따르면 그건 범신론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며, 진정한 체계・필연성・범신론에서 인간의 자유는 근원존재로서의 신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셸링이 말하는 본래의 자유는 필연성으로서의 신과 양립하는 상극의 자유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자유와 양립하는 한의 필연성이야말로 본래의 (신의) 필연성입니다. 이처럼 셸링의 자유론은 자유를 신의 필연성에 귀속시키는, 바꿔 말하면 진리에 구속시키는 사유입니다.


그렇다면 ‘악을 행하는 자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본래의 자유라면 인간의 의지는 신의 보편적 의지에 합치하고, 필연성과 자유의 통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아집이 되어 보편의지를 넘어 자신을 높이면, 이윽고 스스로 보편의지가 되고자 의욕하게 됩니다. 이렇듯 신과 인간이 전도한 상태에서의 자유는 악을 발생시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그 학생에게 했다간 바로 “그래서 네가 말하는 보편의지가 구체적으로 뭔데요, 이 꼰대야.”라는 반응이 되돌아오겠지요. 저는 이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습니다. 당사자인 셸링조차 그 필연성, 혹은 보편성의 신에 대해 ‘무근본Ungrund’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진리의 근거, 혹은 신의 근거, 앞서 예를 든 법의 근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얼핏 무차별적이며 원칙이고 나발이고 없어 보이는 ‘자유’ 역시 분명히 세계를 지탱하는 어떤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부정신학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당장 현대 사회의 사각 지대에 내몰렸거나 각자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겐 희망의 등불이 되어 줄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über das Wesen der menschlichen Freiheit und die damit zusammenhängenden Gegenstände≫ F.W.J. Schelling 著, 佐々木牧人 譯

『Freedom and Nature』P. Ricoeur 著, E. V. Kohak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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