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hoo Kim Mar 09. 2021

□과 ○ (3)

저항의 정당성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Image from https://chemidream.com



○에게



어느새 그 사건이 일어난 지도 벌써 오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를 계기로 몇몇 오피니언 리더들이 대두하기도 했군요. 누군가에겐 발전이 없는 소모전으로 보일 수도 있던, 누군가에겐 성큼성큼 기울어졌던 시계추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실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X가 말한 “불의에 맞선 저항이 항상 도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 는 문제제기입니다. 문장 자체로만 보면 주관적인 ‘불의’와 '도덕'의 범주를 객관화하여 호도한다고 쉽게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겠지만,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려고 선생에게 이야기를 꺼낸 건 당연히 아닙니다. 전 그러한 모든 정치적 신념의 이면에 있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에 대한 고견을 여쭙고 있는 겁니다.


진영 논리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주어를 생략하고 있지만 이미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 아실 겁니다. 저 때문에 혹시라도 곤란을 겪게 된다면 이참에 펜을 꺾고 은둔 생활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시는 것도 괜찮겠군요. 슬슬 벚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니 마당에 술상이나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게



마음을 나눈 벗의 연락은 언제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거 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오셨군요.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펜을 꺾어야 할 상황이 오면 그 펜으로 제 심장부터 찌르도록 하지요.


“불의에 맞선 저항이 항상 도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발언은 귀하의 말씀대로 주관적인 범주의 객관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발언입니다. 저항의 정당성에 대해 애당초부터 사색 중지를 선언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 볼까요? 저항은 어떤 경우에 정당할까요? 혹은, 도덕적일까요?


우선 플라톤의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골자는 ‘우리는 결국 이데아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뿐이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는 건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의 미학에서는 이와 관련해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드는데요, 『소피소트』에서 플라톤은 모방으로서의 예술로 ‘에이콘’과 ‘판타스마’를 듭니다. 에이콘은 원본에 충실한 모방으로 원본의 참된 복사물입니다. 반면 판타스마는 진리를 따르지 않고 피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거짓된 모방입니다.


에이콘이 원본을 참조하고 지시하는 반면 판타스마는 참조하고 지시하는 원본이 없는 말 그대로 가상, 환영입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만을 지시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판타스마는 실재를 대체하는 가상으로서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나 절을 가면 십자가나 불상이 판타스마의 가능성을 가진 대표적인 대상입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도식적인 이야기로 현실에서 에이콘과 판타스마를 칼로 자른 듯 구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 구분할 의미가 없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든 ‘불의에 대한 저항자’를 자칭할 때 한번쯤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에이콘처럼 바깥에 실재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지시하는지, 아니면 판타스마처럼 바깥에 실재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지시한다고 자부하는 나 자신을 지시하는지 말입니다.


이를 토대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지요. 이데올로기는 일상 공간의 허위의식의 대표적인 양상입니다. 다시 말해 ‘대상에 따라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허위의식’ 이지요.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 특징을 나타내고자 사용한 어휘 Verkehrung은 전도나 도착을 의미하며, 이를 인식의 문제에 적용하면 사실의 왜곡이나 사실에 대한 착오를 뜻합니다. 결국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인식하는 단서는 ‘사실’에 있는 셈이지요. 이데올로기가 가진 논리의 허점을 찌르고 부정할 수 없는 사회상의 단면을 제시하는 ‘계몽의 방식’을 이용하여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이데올로기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처럼 단순히 '~주의'로 비견되는 계급 관계를 필연적으로 왜곡하고 은폐하는 허위의식을 넘어서 알튀세르가 말했듯 개인이 세계와 관계하는 도구로 보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개인과 세계의 관계가 투명하지 않고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판타스마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소비'하고, 은폐된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 인식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주류라는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은폐되는 대표적인 양상은 근대적 개인주의의 침체와 공공성 담론의 미숙함입니다. 다음 사례를 보시죠.


시청에서 ‘도시 미관과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연식이 오래된 건물을 모두 헐어내고 새로 지은 건물에는 수십 대의 감시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출퇴근길에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이럴 때 모두를 위해 세금을 쓰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그 연식이 오래된 건물의 그늘에 신세 지던 노숙자들은 졸지에 바람을 피해 잘 곳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신문 기사에서도 ‘치안 강화의 일환’이라고 하니 스스로 선량하다고 자부하는 일반 시민들은 그렇게만 이해하면 됩니다. 누군가의 인권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인권이 침해됐다는 사실은 은폐되었지만요.


‘사실’은 주머니 속 주사위처럼 손에 올려놓고 돌려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매우 커다란 주사위를 관측할 때 보이는 최대 세 면의 모습과 같습니다. 나머지 세 면은 은폐된 셈이지요. 우리가 사회구조적 문제에 저항을 한다고 할 때, 과연 은폐된 문제들에 대해선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저항은 모종의 형태의 폭력을 동반합니다. 그런 이상 그 자체로 정당한 또는 도덕적 자연법에 어긋나지 않는 저항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항이 최소한 ‘정당한 여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 단서로 ‘겉으로 보이는 사회구조적 모순뿐 아니라 그 안의 미처 인식되고 지적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 의지를 보이는 것’을 들고 싶습니다. 에이콘이나 이데아는 있는 그대로 포착하거나 구현할 수 없는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이 단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다림줄로 삼아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받아들일 때 저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입니다. 밀턴이 종교개혁을 Reformation이 아닌 reformation으로 표기한 것은 개혁이 루터의 시대를 넘어 끝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를 잊어버린 순간 에이콘은 판타스마로 변모해 자기변명과 자기숭배를 시작할 테니 말입니다. 모든 계몽들이 어느 순간 신화로 군림하기 시작했듯.






참고 문헌



『메갈과 저항의 위기』 장의준 著

『戦後の思想空間』 大澤真幸 著

『Die deutsche Ideologie』 K. Marx, F. Engels 著

『Σοφιστής』 Platon 著

『Areopagitica』 J. Milton 著




이전 02화 □과 ○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