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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Sep 21. 2021

□과 ○ (5)

개인의 자유와 공동선





Image from (C)조선일보(chosun.com)




○에게



최근 유튜브에서 한 영상이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2012년 주 리비아 미국 대사관 습격 사건과 관련된 의혹에 대한 질의응답의 목적으로 열린 세미나에서 “왜 테러와는 무관한 다수 이슬람들에 대한 변론이 이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이 저 지하드들의 이념에 의해 야기된 전쟁이라면 그 이념에 맞서는 관념과 논리를 모색하지 않고 무력 양상으로 맞대응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겠느냐?” 는 무슬림 법학도 방청객의 질문에 레바논 출신 패널이 “우리는 그 소수의 무슬림이 일으킨 사건으로 무고한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수 이슬람들에 대한 변론이 왜 없냐고 한다면 거꾸로 그 다수는 지금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라는 취지로 대답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따지고 들면 이는 질문과는 관계없는 동문서답입니다. 방청객은 ‘이념으로 인한 전쟁인데 왜 이념에 주목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패널은 ‘그 이념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죽였는데 왜 너흰(평화로운 다수) 침묵하느냐’고 답한 셈이니까요. 단 패널이 말하고자 하는 취지인 ‘평화로운 다수에 연연하여 소수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은 오늘날 PC주의(정치적 올바름)를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정서에 큰 공감을 얻은 모양이더군요. 물론 거기에 오와 같은 부의 감정이 하나도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른바 ‘PC주의 배제’의 본질은 결국 배제를 또 다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일전에 논한 ‘암묵적’인 배제와 혐오는 오히려 더욱 강고해지지 않을까요. ‘평화로운 다수에 연연하여 소수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은 듣기엔 좋지만 결국 특정 집단을 배척하는 데 대해서는 원점으로 회귀할 뿐 아니라 ‘공동체’, ‘국가’ 같은 대의명분을 내세워 정당화할 여지도 있는 셈입니다.



□에게



이건 ‘자유’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본질과도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전형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은 자유롭다’는 밀John Stuart Mill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때 자유주의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개인에게 맡기는 소극적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자유주의는 이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자유를 촉진합니다.


롤스John Rawls에 따르면 가치가 다원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하나의 ‘선善’을 바탕으로 정의를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의론』에서 자유라는 하나의 ‘선’에 집착하여 불평등을 방관하는 게 아닌, 자유를 기본으로 하되 평등equality을 위해 자유를 수정해나가는 지론을 제시합니다.


한편 80년대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사회적 위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생물학적 개인을 전제로 삼으며, 절차상의 정당성에 얽매여 도덕이나 선의 문제를 도외시한다고 비판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공동체주의는 도덕이나 공공선 즉 공동선을 모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가 요즘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샌델Michael J. Sandel입니다.


물론 샌델은 공동체의 공동선에 가치를 두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체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전체주의’와는 확연하게 선을 긋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는 결국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의 공존 가운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떻게 공동선을 모색하는가’입니다. 여기서 샌델과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방법론이 갈립니다. 샌델은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공화주의를 현대 사회에 부흥시키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공화주의는 인민 주권에 의한 공동의 정치 형태 내지 정치・사회 면에서 사적 이익과 개인의 소극적 자유에 관한 권리보다 공적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을 더 중요시하는 정치철학으로 이해됩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제창한 프랑스식 공화주의는 중간 권력 집단을 배제한 탓에 구성원 전원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공동선에 대한 헌신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 파의 공포 정치나 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공통적인 속성입니다. 반면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등장하는 미국식 공화주의는 다원적이면서도 민주주의적으로 강제성을 극복합니다.


미국식 공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샌델은 공동체 중심의 정치 참여를 중시합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활발한 지역사회 활동이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고 공공철학을 부흥시킨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이는 아렌트Hanna Arendt가 주장하는 ‘행위’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합니다.


한편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행위를 제안합니다. 의사소통적 행위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첫째, 참가자가 동일한 자연 언어를 구사하여야 하며 둘째, 참가자는 참이라고 믿는 사실만을 서술하고 옹호해야 하며 셋째, 모든 당사자가 대등한 처지에서 토론에 참가해야 합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인간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삼는 ‘도구적 이성’과 달리 ‘의사소통적 이성’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와 어우러져 합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논쟁 방식을 ‘숙의’라고 부르며 하버마스는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즉 ‘숙의 민주주의’를 제창합니다. 현대에 들어 소실된 공공성을 환기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각 조직의 개인이 내부에서부터 저항, 투쟁해 나가기 위한 ‘공론장’을 제안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공론장은 국가나 경제와는 별개인 다양한 시민 연대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시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됩니다. 새로운 시민 연대적 결합이 주체가 되어 공론을 형성하고 적극적인 민주주의를 추진할 때, 자율적 공론장의 위상은 새롭게 정의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상대성을 전제로 한 공리주의를 한쪽 날개로 둔 이상 현대 민주주의는 하나의 ‘선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선善은 일종의 보편적 진리와도 같습니다. ‘보편적 진리’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배타성을 띠기 마련입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선善에 의해 배척되는 대상은 늘 상대적 개인, 달리 말하면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루소식 공화주의나 파시즘은 물론이고 자유를 하나의 선善으로 간주하는 자유지상주의에서조차 시장에서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의 발생으로 결과적으로 인민이 다른 인민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제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하나의 ‘선善’을 바탕으로 정의를 구성하려 드는 사고방식인 PC주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전통적인 플라톤-데카르트식 주체의 허실을 간파한 니체의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닌 확신’이라는 말은 이에 상응합니다.


PC주의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집단 간 헤게모니에 따른 권력 구조와 그에 따른 배제입니다. 법에 의해 모두가 평등하다고 명시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권력 구조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첨예하게 도처에 널려 있으며, 이는 개인의 자유에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덮어놓고 공평equity을 위해 임의의 헤게모니에 반비례하는 관용을 베푸는 것도, 무턱대고 정치사회 체제의 존속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것도 아닌, 원탁에서 같이 고민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은 보편적인 선이나 중립의 미덕 같은 순진한 담론은 아무 힘도 없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문화와 집단에 충실하며, 동시에 나와 다른 문화와 집단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더욱 커다란 공동선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 문헌



『On Liberty』J.S.Mill 著, 서병훈 譯

『A Theory of Justice』J.Rawls 著, 황경식 譯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M.J.Sandel 著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Untersuchungen zu einer Kategorie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J.Habermas 著, 한승완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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