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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Feb 19. 2022

□과 ○ (7)

인간은 행복을 좇으며 살아간다



Image from BritishCouncil.org



○에게



오늘은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며칠 전 △의 면회를 갔다 왔습니다. △은 유복녀로 태어났고 친모는 그녀를 친정에 두고 사라졌습니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는 평생을 부모의 부재라는 결손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거리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과 담배 그리고 섹스를 탐닉하며 살다가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여 학업에 매진, 현역으로 명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대학의 천편일률적인 커리큘럼은 그녀에게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는 그저 무비판적으로 강의를 베끼며 학점과 자격증과 공모전에 매진하는 학생들이나 ‘학위나 보험으로 따고 고시 공부해야지’를 입에 달고 살며 미팅과 술자리를 개근하는 학생들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홀로 남은 외할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생각으로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부모를 닮아 타고난 외모가 빼어났던 그녀에게 같은 학과의 여러 남자들이 대쉬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이미 십대 때 질풍노도의 열락을 경험한 △의 결심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얄궂게도 그녀를 흔든 건 자신의 아버지와 똑 닮은 인디 음악가 X였습니다. 인디 활동을 시작하고 십 년이 넘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X를 지원하기 위해 △은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빚도 많으면서 씀씀이가 헤픈 X의 지출을 평범한 여대생의 아르바이트로 감당하는 덴 한계가 있었고, 결국 △은 ‘잠깐뿐’이라는 생각으로 유흥업소에 들어갑니다. 밤을 새우며 남자들과 술 마시고 몸을 섞는 일을 이미 십대 때 질리도록 해본 터라 별다른 생리적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X는 은연중에 이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습니다. 그런 무신경함과 자기중심성까지 △의 아버지를 닮았던 모양입니다.


△은 X의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임신 사실이 발각되자 그녀는 곧바로 해고당했습니다. 밤낮이 바뀌고 알코올에 찌들어 살던 그녀가 슬슬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한계에 다다를 무렵이었습니다. △은 X가 자신과 결혼하여 곁에 있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X는 “내 아이라는 증거가 있느냐, 업소에 드나드는 놈들 중 누군가가 아니냐”는 망발을 지껄이며 연락을 끊었습니다. 약해진 몸과 마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결국 달을 채우지 못하고 유산했습니다.


모든 걸 잃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유일한 버팀목이던 외할머니가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그녀는 조현병이 발병하고 말았습니다. 홀로 고립된 그녀를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집에서 투병할 여력이 없던 그녀는 막다른 곳까지 몰린 끝에 어느 날 집 앞을 지나가던 행인을 X로 착각하고 벽돌로 쳐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시간屍姦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치료감호소에 입소하게 된 것입니다.


△은 입버릇처럼 “난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야.” 라 말해왔습니다. 그녀는 ‘십대 시절엔 약물과 섹스 덕분에 몸이 행복했고, 이십대 후반엔 사랑을 했기에 마음이 행복했다. 아무 행복도 없던 건 지루한 대학 생활뿐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넌지시 “아직 네가 느껴보지 못한 지고한 행복이 있어.” 라고 하자 그녀는 조소하며 “나를 물고 빨던 남자들 중에 너 같은 고상한 체 하는 학자들이 없었을 것 같아?” 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적인 행복, 윤리적인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뒤에서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데 대해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압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수음하는 법을 배우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을, 행복의 상하를 규정하고 정의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에게



컵의 절반을 채운 물을 보고 누군가는 “물이 절반밖에 없어”라 하고 다른 누군가는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한다고 하죠. 이 이야기를 하면서 쉽게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컵의 절반은 비어 있으며 이것이 불행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어떻게 해야 컵이 가득 차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은 물처럼 정량적인 걸까, 아니면 다른 정성적인 걸까’ ‘꼭 물이 있어야 행복한 걸까’ 식으로 행복에 대한 사색을 해 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善을 외적인 선, 신체와 관계된 선, 영혼과 관계된 선의 세 종류로 나누었는데, 이 중 절제, 용기, 지혜 등의 영혼과 관계된 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절제, 용기, 지혜는 뛰어난 인간이 지닌 덕德이며, 덕에 기초한 행위야말로 선한 것으로서 인간을 행복이라는 최고선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행복주의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덕 있는 인간은 그에 기반을 두고 신, 세계, 자기 자신의 영혼을 관조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지고의 쾌락이며 ‘지혜sophos를 사랑philos하는’ 철학philosophy 본연의 활동입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일종의 격, 즉 정성적 차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후의 담론은 쾌락주의자들과 스토아 학파 등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러나 얼핏 대조적으로 보이는 그들은 결국 ‘쾌락(행복)에는 차이가 있다’는 공통분모에서 시작해 ‘실현가능하고 타당한 쾌락에 몰두하는’ 것과 ‘필요 없는 욕망을 버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지고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의 차이를 가질 뿐이었습니다.


쾌락주의자들의 바통을 받아 가능한 행복의 성취에 주목한 대표적인 학자들은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벤담은 쾌락의 양을 계산하는 척도를 궁리했습니다. 뒤이은 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과 함께 쾌락의 질적 차이를 따지는 것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단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개인이 어떤 행복을 추구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임을 역설하였으며, 이러한 행복의 상대성의 기조는 훗날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한 축을 차지합니다.


스토아 학파의 바통을 받은 데카르트와 그를 계승한 칸트는 행복을 개인의 문제이자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하고, 윤리적 성찰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관조하는 과정에서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은 지양되어야 하며, 법을 준수하고 질서에 복종하는 선에서 개인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행복의 단초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한편 스피노자는 행복을 두고 자신이 끊임없이 존재하기 위한 노력과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를 위협하는 대상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존재하고자 합니다. 이는 인간 역시 다를 바 없으며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입니다. 욕망은 인간의 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이며 이를 충족했을 때 우리는 쾌락을 얻습니다. 욕망하는 데서 선악이 생겨납니다. 선한 대상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야말로 선한 것입니다.


이는 자칫 쾌락주의와 같은 노선으로 비칠 수 있지만, 쾌락의 격을 따지는 쾌락주의와 달리 스피노자는 존재의 존속에 덕의 기초가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더욱 철저합니다. 욕망을 충족하는 기쁨으로 인간은 더욱 완전한 존재에 가까워지며 이윽고 정신은 최고선에 다다르는데, 그것은 바로 신을 인지하는 것이며 이는 곧 지성의 완성입니다. 지성으로 신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최고의 행복, 곧 지복至福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철학에서 행복의 탐색은 진리의 탐색과 씨줄과 날줄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행복의 추구가 곧 진리의 추구일 때도 있었고, 행복이 진리에 따라오는 부산물일 때도 있었고, 심지어 행복이 진리 탐색의 걸림돌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로 자리매김한 이래 행복은 한편으로는 상대적이면서 다른 한편 정량적인 게 당연한 이치가 되었습니다. 절대적・보편적이거나 정성적인 행복은 근대 이전의 케케묵은 담론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행복했다고 말하는 △의 인생을 두고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고 타인의 입장에서 말하려면 절대적・보편적이거나 정성적인 행복의 척도를 끌어들여야겠죠. 또 누군가는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는 유의 행복’이라 할 수도 있겠고요.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대부분 순진한 폭력으로 귀결되겠지요. 반면 행복의 상대성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면 이 모든 걸 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하는 행복이 진심이든 방어기제의 발현이든, 그녀가 조소하는 ‘번듯한 지식인’들이 말하는 행복이 위선이든 오만이든 심지어는 불행에 몸부림치는 헛똑똑이 먹물의 방어기제의 발현이든, 그를 두고 행복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선생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을 의심하길 그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탁상공론 같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도, 의심을 그만두고 눈에 잘 보이고 편하게 도출할 수 있는 결론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선조들이 말한 ‘지고한 행복’이나 ‘진리에 따르는 행복’ 때문이 아닙니다. 이상과 회의를 잊고, 말하고 생각하길 멈춘 학자는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욕망을 알아버린 사람philosopher’의 특권이자 업보와 같은 겁니다.











참고 문헌



『Ethica』 B. Spinoza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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