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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Feb 26. 2021

□과 ○ (2)

욕망 VS 세계

Image from https://www.thehealthy.com



○에게     



최근에 흥미로운 일이 또 하나 일어나서 이렇게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모처의 게시판에 올라온 사연입니다만 수능에서 총 두 문제를 틀리고 서울대 의예과 모집전형에 지원한 X라는 학생이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본인이 밝히기로는 면접관이 의사가 되고 싶은 이유에 대해 묻자 “전문직에 종사하며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다” 라 대답했다는데 그것을 면접관들이 탐탁지 않아 했다고 하는데 말이지요.


해당 학생은 글에서 “까놓고 말해서 다들 전문직으로 안정적인 고수입과 좋은 평판 원해서 의사 되는 거잖아? 모든 의사가 이국종처럼 살아야 하냐? 교수 놈들 가식 떨긴.” 하며 울분을 토했습니다. 그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는데요, “틀린 말은 안 했네. 그 자리에선 틀린 말이겠지만.” 라며 학생의 욕망 자체를 긍정하는 의견들이 있는 반면 “야, 쓰레기 하나 잘 걸러냈네. 저런 놈이 수술방에 들어간다면 비극이다.” 라며 예비 의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문제에서 학생의 욕망 자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 의견이든 공통적으로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욕망의 표출이었다고 보고 있지요. 난해한 과제는 ‘그 욕망이 옳은가, 그른가?’ 가 아니라 ‘그런 욕망을 표출하는 게 왜 옳지 않은가?’를 설명하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에게



오랜만입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안부가 궁금했는데 또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져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름대로 전모를 파악하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X의 저변에는 ‘개인의 욕망과 외부 세계의 도덕률은 어긋나 있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습니다. X에 따르면 개인의 영달의 한 방편으로서의 의사라는 신분과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직으로서의 의사라는 직업의 괴리는 엄연한 현실이며, (정말 의사들이 다들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다들 전자를 목적으로 중등교육 과정에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 욕망을 드러낸 것은 그저 솔직한 일일 뿐 속물 취급당하며 비판받을 일은 아니란 거죠. 이를 보고 제가 곧바로 떠오른 건 프리드리히 니체의 ‘힘에의 의지’ 사유입니다.


니체는 초기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기독교와 철학에서 비롯된 ‘노예도덕’이 세상을 어지럽혔다고 주장합니다. 노예도덕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선과 악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상정합니다. 노예도덕에서 ‘주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무력감’은 ‘자발적 용서’로 둔갑합니다. 그러한 도덕은 사람의 더 높아지고자,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근간부터 흔드는, 노예 상태로 매어 두는 도덕입니다. 역사상 자기긍정에서 비롯된 ‘주인의 도덕’을 가진 사람들은 원한감정에서 비롯된 노예도덕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짓밟혔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노예도덕 아래 세계는 르상티망이 횡행합니다. 르상티망이란 자신의 무력함과 열등함에 대해 신 혹은 관습적 도덕의 이름을 빌어 그를 선량한 자, 구원받을 자의 숙명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태도입니다. 니체는 이런 태도를 비판하며, 신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전적인 선택으로 힘을 추구하여 삶을 개척하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초인’ 사상입니다.


이에 따르면 X의 사고방식은 얼핏 진취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념을 충족하는 데 대한 사회적 선악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 힘을 추구하며 삶을 개척하는 듯 보입니다. 따라서 ‘초인’의 조건에 부합해 보입니다. 이런, 큰일 났습니다. 욕망 자체를 정죄할 명분도, 욕망의 표출을 정죄할 명분도 흐지부지되었군요. 이렇게 된 이상 네X트X에라도 올려서 군중의 정념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겠군요!


농담입니다. 정죄랄까, 애당초 가치 판단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 볼까요. ‘욕망’이라는 어휘를 쓰고 있으니 짐짓 ‘이기심’ ‘반질서’의 뉘앙스로 비칠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행복’은 어떨까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유론』의 저자 밀 역시 “한 사람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가장 잘 알 수 있고 또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 자신이다”라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밀을 비롯하여 영국 경험론에서 비롯된 공리주의는 민주주의 사상의 한 축을 차지합니다. 이에 따르면 쾌락은 상대적이며 어떤 보편적 질서로 예단하는 속성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행복 추구가 타인의 행복 추구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 국가의 법률은 인민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음과 동시에 인민이 다른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런 장치가 있음에도 국민 투표를 통해 국민 자신들의 권리를 말살할 정당이 선출되어 온갖 전쟁 범죄가 자행된 시기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의 독일 제3제국 말입니다. 20세기 후반세기 동안 정치철학자들이 민주주의의 공공성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은 군중의 행복 혹은 욕망 앞에서 소위 전통적인 보편적 이성이 사수하고자 한 ‘개인’이 핍박받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이렇듯 개개인의 상대적 행복, 혹은 욕망을 용인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까는 사회적 선악을 고려하는 게 아닌 자신의 전적인 선택으로 힘을 추구하여 삶을 개척하는 게 초인이라며?’ 네, 니체 철학의 전체 문맥을 따지지 않으면 ‘힘에의 의지’ 사유는 악용되기 딱 좋습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약속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인간이 신이나 형이상학적 도덕에 기대지 않고 나아갈 때 그저 힘만을 바라보고 전횡을 휘두른다면 그건 인간을 넘어선 게 아니라 인간 미만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한 약속을 격률로 삼아 일관적으로 지켜나가는 자기실현이야말로 초인의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또한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개인과 외부 세계는 건설적으로 공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다시 정리해 볼까요. 모든 의사가 이국종 교수처럼 살지는 않으며, 굳이 말하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의사가 됐든 관상가의 말을 듣고 의사가 됐든 사회적 선악의 척도로 재단할 바는 아닙니다. 단 의사들 자신이 여러 사안에 대해 공공성의 차원에서 끊임없는 공론화를 통해 숙의를 유도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격률을 지키면서 계속 의사로 일할 수 있다면 충분히 바람직하겠지요. 이는 제각기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소명을 행하는 누구에게나 해당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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