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hoo Kim Nov 05. 2020

□과 ○ (1)

배제의 문제 - '명시적 배제'와 '암묵적 배제'

Image from 다음 사전 ( http://dic.daum.net )



○에게



그대도 △와 ×의 사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학원 강사인 △가 온라인으로 실시간 송출되는 강의에서 사담을 하다가 “공부 시원찮게 하는 놈들은 이런 거 들을 필요가 없어. 뺀찌 들고 가서 전선 까는 거부터 배워 봐.” 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도 분위기가 삽시간에 냉각되는 걸 느꼈습니다. △도 그걸 읽었는지 “그러니까 우리 공부 열심히 하자, 응?”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하더라고요.

일이 커진 건 ×가 일어나서 △에게 따질 때부터입니다. “선생님, 현직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그건 굉장히 실례되는 말씀 아닌가요?” △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왜, 솔직히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럼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그런 거 하니?”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부터 온라인 송출이 중단되어서 이후 상황을 알 수 있는 건 수강생들이 커뮤니티나 블로그에 남긴 글 정도입니다.

수강생들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의 말은 “그럼 선생님도 고시 공부 못 해서 여기 계신 거 아닌가요?” 였답니다. 십 초만 송출 중단이 늦었어도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이 유출되지 않아서 아쉽지만 말입니다.


△의 발언 말입니다만, 명백한 혐오 발언hate speech입니다. 첫 마디까지만 하고 솔직하게 사과를 했으면 더 이상 크게 번지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자기 입으로 스스로의 발언에 쐐기를 박아 버렸으니 도저히 감쌀 여지가 없군요.

하지만 ×의 발언 역시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굳이 ×의 잘못을 열거하자면 첫째, 수업의 분위기를 깨뜨려 현강생을 포함한 학생 시청자들에게 방해를 주었고, 둘째, △의 혐오를 또 다른 혐오로 받아쳤다는 점입니다.

△은 일단 사과문을 올렸습니다만, 이미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여론이 악화된 이상 다시 업계에 발붙이기는 힘들 겁니다. ×의 말대로 어차피 명문대 나와 고시 떨어지고 학원 강사 하는 사람이야 지천에 널렸으니 대체재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사교육계에 여러모로 경각심을 일깨운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대의 말을 듣고 처음 알게 되어 여러 가지 찾아보았습니다. 확실히 생각할 거리가 많은 사안이군요. 이 건에 대해 알려 주고 그대의 생각을 말해 주어 고맙습니다.

△와 ×의 발언은 둘 다 혐오 발언입니다. 하지만 경과를 보면 또 다른 공통점이 있지요. △와 ×는 자신이 믿는 무언가를 감싸기 위해 다른 대상을 혐오했다는 점입니다. △가 감싸고자 했던 건 자신의 경솔한 발언이었지만 두 번째 발언에서 드러나는 건 그 경솔한 발언이 진심이었다는 자기폭로입니다. 사과문을 올렸어도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의 두 번째 발언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됩니다. 물론 얼핏 보면 △처럼 전후가 이어지지 않는 순전히 인신공격의 목적밖에 없어 보이지만 ×의 발언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공부 못 하는 사람들이 기술/기능 계통의 일을 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논리면 당신도 공부 못 해서 여기 있다”고 받아치고 있죠.


배제가 행해지는 양식은 명시적이기도, 암묵적이기도 합니다. 명시적으로 배제하는 건 말 그대로 명백히 눈에 보이는 배제입니다. 암묵적 배제는 눈에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배제지요. 사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암묵적 배제입니다.

△와 × 각각의 신념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기술직은 공부 못 하는 사람들의 도피처가 아니다’는 그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문제의 소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둘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암묵적 배제가 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건 일종의 부정vice”이란 겁니다. 왜 우리가 쉽사리 이런 생각에 이르지 못하느냐면, 암묵적 배제의 전제 조건인 배제의 질서가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기체는 주위에 있는 무수한 대상들의 다양성으로부터 일정한 양의 특성만을 인식하고 반응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합니다. 인식되지 않은 것, 즉 배제된 것은 애당초 그것이 배제되었다고 주체가 인식하지 않습니다(못합니다). 심지어 인간의 인식적 배제는 상징적 질서에 의해 더욱 강고해집니다. 철학자 카시러Ernst Cassirer에 따르면 인간만이 수용계통과 운동계통, 베르그송Henri Bergson 식으로 말하자면 감각과 운동에 이어 ‘상징계통’이라는 제3의 연결물을 갖습니다. 언어, 예술, 신화, 종교라는 인위적 상징들에 둘러싸인 인간은 이를 매개하지 않고 세계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한 상징들은 상대적인만큼 인간의 지각하는 방식 역시 상대적이고, 학습될 수 있으며,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라는 특정한 시대, 한국이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징적 질서에서 배제된 것은 ‘“공부를 못하는 건 일종의 부정vice”이란 명제에 대한 회의’임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자, 길 가는 사람에게 “공부 못 하는 게 나쁜 거예요?”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대부분 “아니다”고 할 겁니다. ‘공부 못 한다’는 건 명시적으로 배제되는 조건이 아니란 겁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배제가 되기 때문에 저런 상황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든 ×든 자기 나름대로는 평소의 사고에 대한 주체적인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난 이들을 생각하면서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사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니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의지 작용과 욕망을 인지하고 있을지언정, 우리의 외부에 대해서는 이다지도 깜깜합니다. 그 외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문화 속에서 미처 인식되지 못한 잉여물일 뿐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