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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Aug 25. 2023

사랑, 때때로 구원

봄 (1)



1          



가게 앞을 빗자루로 쓸던 중 참새 한 마리가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우주는 살짝 무릎을 구부려 손을 내밀었다. 참새는 아무 경계심 없이 손으로 깡총 올라탔다.

“뭐냐, 배라도 고프냐?”

그러고 보니 오후에 점심 식사대용으로 먹던 칼로리바란스을 조금 남겼을 터이다. 우주는 빗자루를 들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빼고는 앞치마에 가져갔다. 마침 손끝에 봉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탁!’

 손에서 놓은 빗자루가 균형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참새는 푸드득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참새의 모습을 좇자 석양이 시나브로 지는 하늘이 우주의 눈에 들어왔다. 한 달 전만 해도 이미 해가 졌을 시각이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계절이 바뀜에 따라 일상의 풍경 역시 조금씩 바뀌어 간다. 입고 있는 긴팔도 꽤 얇아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오후에 땀을 흘리고 나면 저녁에 몸이 서늘해지는 건 여전했다.

“우주야, 대충 쓸고 들어와 봐! 확인할 게 있어!”

가게 안에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우주는 “예!” 하고 안을 향해 소리치고는 빗자루를 아무렇게나 벽에 기대 놓고 들어갔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담배 냄새가 났다. 사장이 점내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건 그날 영업이 끝났으니 손님을 안 받겠다는 뜻이다. 영업 중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세금 내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반나절 지나 담배 냄새가 빠진다고 해도 민감한 손님은 불쾌해 할 거라고 우주가 말한 적 있지만, 괜찮다며 껄껄 웃고 넘어갔다.

사장은 책상 앞에 앉아 입에 담배를 문 채 한 손으로는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일일 매상과 재고를 체크하고 있던 중 호출한 걸 보니 잡담이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 것이다.

“우주야, 혹시 오늘 물망초 씨앗 나갔니?”

“아뇨, 오늘 그거 산 손님 없었는데요?”

사장이 뜨악한 얼굴로 우주를 쳐다보았다. “그래, 없다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장이 보고 있던 확인표를 우주는 들여다보았다. 분명 팔지도 않은 물망초 씨앗의 재고가 하나 줄어 있었다. 우주나 사장이 팔지 않았으면 남은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가게에 들어와 씨앗 봉지를 훔쳐간 것이다. 우주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가게는 그 흔한 방범 카메라 하나 없이도 개업 이래 십 년 가까이 도난을 당한 적이 없다. 그 기록이 오늘 깨져버린 것이다.

“이젠 이 골목도 뒤숭숭해졌네, 이런 가게에까지 도둑이 들다니.”

사장은 알았으니 됐다는 듯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우주는 머리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지켜봤어야 하는데…” 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됐어, 됐어. 그거 원가 천 원은 하냐? 게다가 너한테 가게 일 떠맡기다시피 하면서 방범카메라도 없이 도둑 드는 것까지 막으라고 하면 내가 양심이 없는 거지.”

사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우주가 보기에 이건 단순히 몇 백 원짜리 씨앗을 도둑맞은 문제로 끝날 게 아니었다. 직원이 상주하고 있는데도 침입자가 들어와서 절도를 했다. 이는 가게의 보안에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음을 의미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내일 업자 불러서 가게 곳곳에 방범카메라 설치하겠습니다.”

“됐어. 어차피 꽃집에서 훔쳐가 봤자 꽃인데 뭘. 게다가 손질해 놓은 꽃은 네가 밖에서 지키고 있으니 훔쳐가 봤자 이런 씨앗이야. 누가 어디다 쓰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허허 웃고 호기심을 부풀리는 쪽이 로맨틱하지 않냐?”

“도둑이 들었는데 로맨틱이라뇨…”

“물망초라고, 물망초. Forget-me-not! ‘나를 잊지 말아요!’ 뭔가 모종의 메시지가 아닐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달래고자 너스레를 떠는 건지 감이 안 잡히는 사장의 말에 우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고용주가 저렇게 말하니 피고용인인 우주가 정색하고 나서기도 뭐했다. 뒤이어 사장은 짐짓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우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주 너, 오늘 어머니 늦게 들어오시지?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괜찮습니다. 혼자 해 먹을 수 있어요.”

“오늘은 은비가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온다고. 아저씨가 솜씨 발휘할 건데 한 명이라도 더 먹어 주는 게 기쁘지.”

꽃집 『메이 플라워』의 사장이자 어릴 적부터 우주를 예뻐해 준 일도는 옛날에 부인을 먼저 떠나보냈다. 홀로 적적하게 살던 일도의 유일한 낙은 딸 은비였다. 우주가 기억하기로 은비는 몸이 아파서 어릴 적엔 계속 집에만 있었다. 홈스쿨링으로 학업을 대신하며 점차 건강해지고, 우주와는 이전 직장에서 만났다. 그러나 은비는 우주만 보면 피하는 통에 아직까지도 대하기가 어색하다. 얼마 안 가 우주는 영문도 모른 채 해고되었는데, 사정을 알게 된 일도가 우주를 고용해 주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좀…”

은비가 신경 쓰이던 우주가 거절의 말을 꺼내려 하자 일도는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응? 밥 먹고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하하.”

어깨를 토닥이며 일도는 ‘히~’ 하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우주는 ‘오늘도 역시나 이렇게 되네.’ 생각했다. 옛날부터 우주는 저 미소 앞에서 한없이 약했다. 우주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말이다.     



    

“그래서 그때 미주 선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한 거지. ‘개인의 윤리적 죄과에 연연하며 세상 깨끗한 척 하는 연놈들이나 손톱 밑의 가시 하나로 온 세상의 상처를 혼자 짊어진 마냥 우는 소리 하는 연놈들이나 지긋지긋하다’고 말이야! 하하하!”

일도는 우주의 어깨를 팡팡 때리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취기가 오른 얼굴만 보면 아주 대작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국산 밀 맥주 두 캔 즉 고작 1000cc를 마시고 만취 상태가 된 것이다. 일도가 말하는 미주 선배는 우주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다.

“우주야, 너희 어머니 되시는 강미주 여사는 말이다… 지금은 마트에서 계산대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작가의 소질이 뛰어난 사람이다. 너는 쉽게 상상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일도의 말대로 우주는 미주의 그런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우주의 기억 속의 미주는 그저 소박하고도 온화한 한 떨기 목련과도 같은 여성이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할 줄 모르고, 말을 주도적으로 하기 보단 한없이 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옛날부터… 그런 선배를…”

일도는 어느새 눈이 풀린 채 굉장히 드문드문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슬슬 곯아떨어질 거예요. 여긴 제가 치울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식사 때도 옆에서 조용히 있던 은비가 오늘 처음으로 우주에게 말을 걸었다. 우주는 고개를 돌려 은비를 보았다. 단발머리의 단정한 얼굴은 우주와 조금도 눈이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반찬 따로 챙겨놨으니까 가져가서 두 분이서 드세요.”

처음 만날 때부터 은비는 이런 태도였다. 공손하고 예의바르지만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혹시 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면 이런 식으로 틈날 때마다 일도에게 붙들려 와서 같이 식사를 하는 상황은 분명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일도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요, 실례했어요. 문단속 잘 하고, 사장님은 대충 침대에 눕히세요. 반찬 고마워요.”

우주는 미안함 반 어색함 반의 감정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안 자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자기 발로 걸어가지?”

은비는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일도를 향해 말했다. 일도는 바로 몸을 일으켜 코사크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밤 11시에 입으로는 “딴 따다단 따다다다단~♬” 하며 테트리스 BGM을 흉내 내며 딸에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는 중년 남성은 어디다 내놔도 부끄러운 존재였다.

“잘하지? 잘하지? 아빠 연기 완전 배우 뺨치지?”

“그만해.”

은비는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고 내뱉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계속 참고 있었는지 흰자가 벌겋게 된 채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은비는 말을 이었다.

“소용없는 일이야. 삼 년 동안 충분히 확인했잖아? 더 이상 괴로워지고 싶지 않아…”

일도는 어느새 은비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웃음기는 어느새 싹 사라진 채 우수에 찬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은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우주 덕분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있잖니…”     




가로등과 달빛이 벗이 되어 주는 밤거리를 우주는 걷고 있었다. 한 손에는 은비가 싸 준 반찬이 들려 있다. 아마 미주도 지금쯤 한창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변변히 저녁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서서 생활비를 버는 미주는 사실상 집안의 가장이다. 『메이 플라워』의 매출이 워낙 적다 보니 우주는 사장과 비슷하게 받아도 최저시급 정도이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은 둘 뿐이니 사실상 우주가 절반을 가져가는 셈이다. 언젠가 좀 덜 받겠다고 우주가 이야기를 하자 일도는,

“하루 8시간씩 일 시키면서 그것도 안 주면 내가 잡혀가. 가게 매상이 적은 건 사장인 내가 신경 쓸 문제니까 걱정 말고 일만 해.”

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미주는 “고맙고, 미안하네, 늘…” 하며 쓸쓸한 눈빛으로 일도의 요리를 바라보았다.

우주는 일도가 미주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두 사람은 늘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고 했다.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의 일도의 눈은 마치 연모하던 상급생이 졸업할 때 교복 단추를 받고 싶어 하는 여학생의 그것이었다. 우주는 내심 둘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미주에게 “아저씨 정도면 남자로서 괜찮지 않아요?” 라고 가끔씩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평생 고맙고 또 미안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야. 근데 남자로는 아들을 못 따라가지.” 하며 농담조로 흘려버리곤 했다.

4월의 밤거리는 살짝 쌀쌀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집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미주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주는 미리 밥상을 차려 놀라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한 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가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앗!”

평소 그곳에 없던 커다란 무언가에 발이 걸려 우주는 앞으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반찬은 지키겠다고 반사적으로 팔을 올려서 봉지는 무사했지만, 나머지 한쪽 팔과 양 무릎을 그대로 돌에 찧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다들 자는 시간이라 비명을 지를 순 없었다. 뒤돌아서 발 언저리를 확인하자 거기엔 교복을 입은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순간 식은땀이 주르륵 하고 우주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우주는 차분히 정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뛰어가던 성인 남자가 온 몸이 앞으로 쏠릴 정도로 크게 넘어졌고, 소녀는 그 무게를 그대로 받았다. 도대체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 다쳤을 것이라고 우주는 결론을 내렸다. 우주는 소녀의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그러나 들릴 만한 크기로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기요, 괜찮아요? 저기요?”

대답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의식이 없어 보였다. 코에 손가락을 대 보니 숨은 쉬고 있었고, 목덜미를 짚어 보니 정맥도 확실히 뛰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소녀를 한밤중에 이런 돌바닥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일단 집으로 옮기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끄응…”

아픈 무릎과 팔꿈치를 어루만질 새도 없이 우주는 소녀를 등에 업고는, 오른손에는 봉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등에 업은 소녀의 둔부를 지탱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옮기는 데는 의식이 있는 사람의 경우보다 배로 힘이 든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오르던 108계단이 오늘만큼은 시지프스의 언덕처럼 느껴졌다.      




‘투웅-’

입에 봉지를 물고 집 문을 따고 들어갈 즈음에는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우주는 냅다 소녀를 침대로 던졌다.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소녀의 가방을 벗겨서 신분을 확인할 수단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가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교과서도 필기구도 그 나잇대 여자아이라면 하나쯤 갖고 다닐 액세서리조차 없었다.

뭐 하나라도 걸리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 우주는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가방 밑으로 손이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당황하며 그대로 손을 들어 가방을 살펴보니 커터칼로 찢은 흔적, 가래침 자국, 때가 낀 껌딱지 등이 수두룩하게 나 있었다.

“뭐야, 얘…”

우주의 머릿속 생각이 무심코 입을 통해 나왔다. 그러자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소녀가 움찔거렸다. “일어났어요?” 우주는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문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쌔근쌔근하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주는 ‘그렇다면 좀 더 신사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고는 가방을 관통한 손을 뻗어 손등으로 소녀의 종아리부터 쓸어내려갔다. 파르르 하고 몸을 떠는 것을 손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발바닥에 다다르자 우주는 씨앗을 묻을 흙을 파듯 손끝으로 움푹 들어간 곳을 살짝 긁었다.

“푸흡!”

씨앗을 묻을 토양을 고르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물이 너무 안 스며들면 씨앗이 썩을 수 있고, 물이 너무 잘 빠지면 씨앗이 애초에 싹을 틔우기 힘들다. 어느 생명이든 발아 단계에서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환경이 안배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핫, 아하하하! 그만, 그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씨앗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도 한다. 아스팔트 길가나 전봇대 밑에서 얼마 안 되는 먼지 수준의 흙에 터를 잡고 자라나는 그들을 보며, 생명이란 잘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태어날 생명을 쉽사리 배제할 수 없음을 성찰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사, 살려줘! 항복, 항복할 테니까!”

꽃을 키워 파는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이 자연의 본성을 이용하는 것과 자연이 사람의 인위를 묵묵히 포용하는 것의 비율이 각각 어느 정도나 될지 사색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식용 버섯을 재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통나무에 버섯균을 배양해서─

퍽!

“여자 다리 붙잡고 통나무가 뭐야! 숨질래!?”

일순간 우주의 눈앞이 번쩍하며 코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소녀의 발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코를 감싸 쥐었다. 따뜻한 액체가 손가락에 닿았다. 소녀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미성년자 약취 유인에 강간 미수라니… 젊은 나이에 안됐네~”

“뭐, 뭐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상황을 제3자가 본다면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심지어 만인의 브라더인 시국이 형이 이 모습을 본다면 뭘 인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갈喝!”하며 꾸짖을 것이다. 당했다. 처음부터 이럴 심산으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건지도 모른다. 코피를 흘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주를 내버려둔 채 소녀는 교복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던졌다.

“욕실 좀 빌릴 테니까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쪽 처분은 목욕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볼게.”

우주는 ‘처음 본 남자 집에서 단둘이 있는데 목욕이라니 제대로 얕보였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분명 이 상황을 뒤집을 카드가 있다고 생각하며 우주는 코피를 채 닦지도 않은 손으로 외투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지갑, 휴대폰… 외에는 별 다른 게 없었다. 지갑에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체크카드, 휴대폰은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액정이 심하게 깨져서 잘못 만졌다가는 손가락을 다칠 것 같았다. 소지품의 행색만 봐도 그다지 평범한 여고생의 아우라는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소녀가 개운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긴 머리칼이 묘하게 젖은 게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하룻밤만 재워 줘. 그럼 없었던 일로 할게.”

머릿속으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우주는 “뭐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 어머니가 강미주 작가님 맞지? 수소문해서 겨우 알아냈어. 꼭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소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강미주 ‘작가님’이라, 일도가 술에 취하면 단골 레퍼토리로 읊는 옛날이야기지만 적어도 우주의 기억 속에는 글을 쓰는 미주의 모습은 티끌만큼도 없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낸 게 언제인지도 모를 전직 작가의 사생팬이 여고생이라니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미주는 마트에서 일하며 일반 서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워킹맘이었다. 오래 전에 절필한 사람에게 굳이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켜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우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 강미주 ‘작가님’은 없어.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

소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뭔데 작가님을 못 만나게 하는데?”

우주는 너무나도 뻔한 전개에 하품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지켜져야 하는 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늘 현재다. 아무리 모든 현재가 과거의 선택과 비선택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거 때문에 현재의 소중한 것들을 위협할 수는 없다. 이는 역설적으로 과거를 과거로서 보존하고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 사는 걸 알고 있을 정도라면 지금은 더 이상 ‘작가님’이 아니란 것도 알잖아? 이제 와서 ‘작가님’을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만 돌아가.”

소녀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말문을 열었다.

“…다…너…때문이잖아…”

우주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소녀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에 펜을 내려놓았잖아! 나잇값도 못하는 아들이나 건사하려고!”

순간 우주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애써 알아보지는 않았었다. 물론 소녀의 외침은 흔한 우상에 대한 비뚤어진 애정에서 비롯된 질투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미주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우주에겐 생판 모르는 제삼자의 외침의 충격이 터무니없이 크게 다가왔다.

별안간 우주에게 와락 달려든 소녀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얼굴이 다가오는 순간 눈에 들어온 입술엔 익숙한 빛깔의 틴트가 발라져 있었다. 미주의 틴트의 맛은 달콤하면서도 끝 맛이 미묘하게 써서 아련한 향수를 불러들였다. 우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 소중한 감정이 마음 속 저편에서 외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털썩!’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눈만 돌려서 확인하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미주가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내일모레 서른인 아들놈이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방에서 여고생과 키스를 하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부모는 그다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는 아직 해명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일도의 말대로라면 미주는 이지적인 사람이다. 지금 이 광경도 섣불리 판단하진 않을 것이었다.

“…삼십 분 뒤에 나와 보렴. 저녁 차려놓을게.”

조용히 그 말만을 남기고 미주는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가방을 들고 사라졌다. 우주는 황급히 소녀를 밀치고는 입가를 소매로 거칠게 닦았다. 소녀는 어느새 아까 전 우주에게 으름장을 놓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대충 이때쯤 돌아오시더라고. 그렇다 해도 그쪽도 은근히 즐긴 거 아냐?”

“시끄러워. 너보다 십 년은 더 살았어. 스무 살도 안 된 발랑 까진 꼬맹이 장난질에 동요할 것 같아?”

그러자 소녀는 요염하게 왼손 검지와 중지를 펼치더니 교복 셔츠의 두 번째 단추와 세 번째 단추 사이를 벌렸다. 어렴풋하게 골짜기가 파인 속살을 리본이 달린 핑크색 브래지어가 감싸고 있었다.

“아직 깐 거 보지도 않았으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소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주는 이를 보며 꼬맹이 장난질이라 생각하며 코웃음 쳤다. 필사적으로 강한 체를 하고 있지만 아까부터 꽤나 무리하고 있다는 걸 우주는 알 수 있었다. 우주는 미성숙한 빈유를 자랑하는 소녀의 턱 밑 10cm까지 얼굴을 가까이 댔다. 10초… 20초… 소녀의 체온이 미묘하게 올라가며 목 위로 피가 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얼굴은 안 봐도 뻔하다. 마무리를 지을 겸 우주는 소녀의 목덜미에 바람을 후 불었다.

“꺄앙!”

하이 톤의 귀여운 목소리를 내며 소녀는 다급히 뒤로 몸을 뺐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수치심과 공포와 쾌락이 뒤섞여 있었다. 조금만 밀어붙여도 이렇게 동년배 여자아이다운 반응을 하는 아이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전직 작가를 만나려고 이렇게 대담한 짓까지 하며 모르는 남자가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겠다고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비일상과의 조우가 로맨틱하게 흘러가는 건 어디까지나 창작물에서다. 더 이상 깊이 관여하면 귀찮아진다고 우주가 생각한 순간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주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무언가를 살며시 내려놓고는 눈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우주는 다가가서 파란 포장지의 그것을 주워들었다. 가로 세로 각각 2.5cm의 정사각형에는 ‘듀○스’라고 쓰여 있었다. 우주는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정 무렵, 부엌 식탁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며칠 굶기라도 한 건지 소녀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미주는 자신의 수저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는 소녀가 식사를 마치는 순간 내쫓을 작정이었다. 일도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마토 된장국까지 그릇째 들이키고는 소녀는 ‘끄윽’ 하며 배를 든든히 채웠다고 과시하는 생리현상을 발했다. “자, 그럼…” 하며 우주가 운을 띄우려 할 때였다.

“그럼 밥도 다 먹었으니 이제 자야지? 잠옷은 빌려줄 테니 걱정 마렴.”

미주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권유는 이십여 년 전에 나온 게임의 미망인 캐릭터를 방불케 했다.

“아뇨, 어머니.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학생은 집에 돌아가야죠, 안 그래?”

우주는 말끝을 최대한 차갑게 하며 노골적으로 소녀를 노려보았다. 마음속으로 ‘허튼 소리 하지 말고 제발 조용히 가 다오’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소녀는 우주를 바라보지도 않고 미주를 향해 강아지 눈을 하고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오늘은 더 이상 못 걷겠어요…”

그러더니 단전에 손을 모으고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란 걸 우주는 깨달았다. “이 늦은 시간에 ‘학생’을 바깥으로 내몰 수 없잖니?” 미주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우주를 바라보았지만 그 이면엔 미묘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럼 소파에서 자. 내일 아침 밝는 대로 알아서 나가고.”

우주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일어서서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뒤따라 일어서서 반찬 뚜껑을 덮고 냉장고로 가져갔다. 우주는 살며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밤중에 어머니 침실로 쳐들어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소녀는 “걱정 마, 그 정도 예의범절도 없을까봐?” 라 조그맣게 대꾸하며 팔을 걷고 고무장갑을 끼려 했다. 그러자 식탁을 닦던 미주가 입을 열었다.

“우주야, 손님에게 뒷정리를 시키는 게 어디 있니! 학생은 날 따라와요, 마침 딱 맞는 여자용 잠옷이 있어요.”

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녀는 정리하던 것을 그대로 두고 그녀를 따라 안방으로 향했다. 소녀는 살짝 뒤를 돌아보고는 우주에게 혀를 쑥 내밀었다. ‘초딩이냐?…’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던 우주는 다시 혼자서 부엌 정리를 계속했다.     


침대에 누워 독서를 시작하려는 우주의 방문이 빼꼼하고 열렸다.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소녀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소녀는 의아한 어조로 우주에게 물었다.

“어째서 모자 가정에 이런 잠옷이 있는 거야?”

 원피스형 잠옷은 소녀의 체형에 딱 맞았지만 실크 재질에 자주색은 청소년이 입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175cm의 장신을 자랑하는 미주가 입기엔 분명히 작았다. 우주는 미주가 저런 잠옷을 왜 갖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뭐, 이런 재미없는 아들이랑 단둘이 살다 보니 한번쯤 딸 하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사신 거겠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가서 자. 내일 아침에 눈 뜨면 알아서 집이든 학교든 가라고.”

우주는 시선을 간밤에 읽다 만 D.H. 로렌스의 책으로 돌렸다. 소녀는 축객령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방을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벽에 설치한 대형 책장의 유리문을 열었다. 우주는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애써 무시하고자 노력했다. 소녀는 우주를 신경 쓰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책등을 쓸기 시작했다.

“남자 방에 컴퓨터는 없는데 책은 엄청나게 많네.”

“컴퓨터를 쓸 일이 없으니까.”

우주는 컴퓨터는 고사하고, 핸드폰도 구형 2G폰을 들고 다닌다. 메이 플라워에서도 컴퓨터로 문서를 만들거나 매상을 정리하지 않다보니 어지간하면 쓸 기회조차 없다. 내일모레 서른이지만 우주는 인간관계라고는 미주를 제외하면 일도네 가족이 전부고, 별다른 거창한 취미도 없다 보니 책이 친구가 되었다.

삼 년 전만 해도 우주는 독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전 직장에서 해고되고 나서 메이 플라워에서 일하게 되자 미주는 오래된 책 몇십 권을 우주에게 건넸다. “지금은 도서관에서나 구할 수 있는 책들이야. 사려고 하면 몇 안 되는 중고본에 네다섯 배 가격을 지불해야 할 거야. 엄마가 해줄만한 건 이 정도고, 나머지는 네 손으로 차곡차곡 너만의 책장을 채워나가 보렴.”

그렇게 시작된 우주만의 주경야독은 처음에는 몇몇 어려운 책의 내용을 이해할 내공이 없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메마른 스펀지에는 물 몇 방울 떨어뜨려봤자 흔적도 남지 않는 법이다. 우주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여행자가 해갈을 하듯 텅 빈 수조와도 같던 마음속에 텍스트의 굵은 물줄기를 대었다. 이제는 보다 높고 넓은 경지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잘 맞는지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그럼 글 같은 것도 쓰는 거야?”

소녀는 여전히 몸을 책장으로 돌린 채 물었다.

“아니. 굳이 필요를 못 느껴서.” 우주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삼 년 동안 독서를 하며 내심 자신이 성장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를 글로 표현할 엄두는 차마 못 내고 있었다. 당장 어떤 주제로 써야할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 허세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데.” 갑자기 소녀의 목소리가 낮고 냉랭해졌다. 우주는 책에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정면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책장 가득 그럴듯한 커버의 양장본들만 쌓아 놓고 그 책들의 개요는 신이 나서 떠드는 주제에, 정작 자기만의 생각은 한 줄도 못 말하는 반푼이들은 널리고 널렸어.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어.”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이지만 결국 전형적인 시비조에 불과하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자기만의 생각’ 같은 거창한 이데아를 내세워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해 희열을 느끼는 부류의 파토꾼들 말이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래도 우주보다 한 수 위인 듯하다.

“혹시라도 자기만의 생각 같은 게 어디 있냐며 냉소적인 자위를 하고 있다면 네 발전은 거기까지인 거고. 책장에만 머무른 채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없으면 아무리 지식이 쌓여도 인간으로서의 넌 제자리걸음일 거야.”

영 한심하다는 듯 소녀는 우주를 흘겨보았다. 내일모레 서른인 남자가 겨우 고등학생한테 독서를 두고 한 마디 반박도 못 하다니. 하지만 소녀의 말투에는 단순한 핀잔을 넘어 무언가 감정이 실린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자신 때문에 미주가 펜을 꺾었다’고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구심과 반발심이 반반 섞인 채 우주는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라면 책상 앞을 떠나 현실의 평범한 일과에 전력투구하는 전직 작가님도 한층 더 나은 인간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다고 봐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을 꺼내면서도 우주는 스스로 ‘어른은 비겁하네’ 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그저 책에서 읽은 이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며 그것이 현실에서도 가당한 이야기라 의심 없이 믿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은 다다를 수 없기에 이상이다. 아무리 과거에 잘 나갔던 문필가라도 더 이상 글로 돈을 벌 수 없으면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그런 ‘평범한’ 일상에 쫒기다보면 새로운 소재를 탐색하고 사색할 정신적・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결국 평생 마음 한구석의 ‘작가로서의 자아’를 충족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한다.

그러나 미주는 우주가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주 역시 괜히 송구스러워하지도 않고, 굳이 이제 와서 미주가 다시 작가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도 없다.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의 행복이며, 미주나 자신이나 그를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굳이 이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소녀는 우주를 맹렬하게 쏘아보고는 홱 돌아서서 “잘래!” 하고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우주 역시 도저히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니어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두 사람 모두 오늘밤은 꽤나 뒤척일 것 같다.    


      

2


        

아침 6시, 빵과 햄을 굽는 냄새에 소녀는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미주가 5cm 앞에서 미소를 짓고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소녀는 누워 있던 소파에서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지만 미주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이마를 밀며 말했다.

“아침 먹으라고 깨우러 온 것뿐이에요. 천천히 해요.”

소녀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자, 미주는 토스트, 햄, 시리얼이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밥상에 있는 쟁반은 세 개, 하나는 랩이 싸여 있었다. 미주가 말했다.

“우주는 늦게 출근해요. 그래서 맨날 혼자 아침을 먹었는데, 오늘은 둘이 먹으니까 평소보다 더 맛있군요.”

“저…”

소녀는 말문을 열었다. 동경하던 사람을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막상 눈앞에 두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소문 끝에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에 그녀가 살고 있는 걸 알고 여기까지 왔다. 가까스로 소녀는 그토록 하고 싶던 질문을 할 수 있었다.

“후회는… 없으신가요…?”

미주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다시 나에게 그 순간이 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똑같이 감사할 테니까요.”

소녀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미주는 스푼으로 소녀의 빵에 잼을 올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선택을 하기 전의 나를 앞으로도 찾는다면, 이 자리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가 될 거에요. 오늘 이후로 더 이상 학생을 반겨주지 않을 거예요.”

소녀는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미주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주의 친구로 온다면 엄마로서 아들의 친구를 기꺼이 맞아 줄 거예요. 학생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에요.”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는 미주는 입가를 닦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주는 말했다.

“마지막 팬서비스로 지하철까지 배웅해줄게요. …오랫동안 날 잊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오후 3시의 도로는 한산했다. 메이 플라워의 포터 차량을 빼면 열 대도 안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운전석의 일도는 차에 타고선 벌써 두 개비 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음 신호등이 나오는 대로 불을 붙일 참이다. 아무리 창문을 열었다고 해도 옆자리에서 이렇게 피우고 있으면 간접흡연 방지의 의미가 없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면허가 없는 직원 대신 사장이 운전을 하는 판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도 염치가 없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자애는 나가고 없었다?”

삼십 분 전쯤, 외출하고 온 일도와 포터에 조경용 분재와 묘목 그리고 장비들을 실으며 우주는 지난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도는 그 소녀에게 꽤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잠깐 말이 끊어지다가도 어느새 다시 이것저것을 묻고 있었다. 우주는 지금 생각해도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기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작가님을 만나 소원 성취했겠다,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겠죠. 저한테 사과나 감사 인사 같은 걸 남기지도 않고요.”

“그런 거로 섭섭해 할 필요 없다. 그저 스쳐지나갈 인연이면 하룻밤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면 되고, 다시 만날 인연이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 은원은 그때부터 생각하는 거야.”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서고는 일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리가 지금 작업하러 가는 식당 『티블리 안나』의 사장이 누군지 아니?”

“저야 모르죠. 단골이면 몰라도 첫 의뢰니까요.”

“내 고등학교 후배다. 구체적으로는 은비 엄마랑 만나기 전에 나를 찬 전 여자친구.”

일도의 표정은 담담했다. 우주는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삼십 년 만에 얼굴을 보는구나. 그땐 서로 쿨하지 못해서 결혼식에도 안 부르고, 또 안 왔는데 말이지.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온 걸 보면 내 쪽이 덜 어른스러운가보다. 이런 별 볼일 없는 홀아비에게 뭘 기대하고 연락하진 않았을 테니까, 핫핫하.”

일도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심 없이 마당을 꾸미고 싶었다면 굳이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가게에 주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과거에 은恩보다 원怨이 깊은 사이라면 더더욱. 대부분의 경우 묵은 은혜는 얼굴과 발로 갚지만 묵은 원한은 살아생전에는 멀찍이서 조용히 용서를 빌고 또 멀찍이서 조용히 용서하는 게 가장 보편적인 상호간의 배려다. 적어도 우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새 포터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그래, 겨우 하룻밤의 인연이다. 나쁜 인상이었다면 굳이 기억해 둬봤자 쓸 데도 없다. 다시 서로와 마주치지 않던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포터의 사이드를 내리고는 일도와 짐을 내리며 우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테라스에 조경 작업하러 오신 분들이시…”

가게에서 나온 익숙한 얼굴과 마주치자 우주는 둘이 들고 있던 분재의 한쪽을 놓쳐버렸다. 일도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주저앉지 않았으면 한쪽이 깨져 못 쓰게 되었을 것이다. 상대도 우주의 얼굴을 보고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우주야, 무슨 일이니? 어디 아픈 거니?”

그새 일어난 일도는 우주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리스의 얼굴은 간밤에 우주에게 독설을 쏘아붙이던 소녀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안 아팠는데 갑자기 아파지려고 해요.” 살짝 질린 채 우주는 대답했다.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걸로 어느 정도 머릿속에 각인되게 생겼다. 사흘 후에 또 봤다간 장기 기억으로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오늘 조경 작업하러 왔는데 사장님은 계신가요?”

일도는 소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곧 돌아오실 거예요, 음료수라도 한 잔 드릴까요?” 소녀는 영업용 미소를 만면에 띠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일도는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오고가는 데 오래 걸리니까 빨리 작업 시작할게요. 사장님 오시면 우리가 왔다고 알려주고요.” 라 말하며 우주에게 윙크를 했다. 우주는 그걸 못 본 체하며 차에서 연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일도가 테라스를 살펴보러 간 사이 소녀가 우주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왜 여기까지 온 건데? 여기 너희 동네에서 한참 걸리잖아.”

“일 가려가면서 하면 먹고 살기 힘들어.”

우주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충 대답했다. 소녀는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내 얘기 우리 사장이나 너희 사장한테 할 거지?”

“굳이? 나랑은 상관없잖아.”

우주가 보기에도 소녀는 그리 떳떳한 상태가 아니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안 가고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떳떳하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그러나 우주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사정이 있는 법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불필요하게 개입해서 괜한 원한을 사고 싶지 않았다.

“빨리 들어가서 일하라고. 손님들 기다리잖아.”

“이 시간엔 별로 없어. 손님이 있었으면 너하고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하진 않는다고.”

“그렇게 손님이 없는데 점원을 왜 고용한 거야?”

“이 시간에만 없는 거야. 그리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소녀는 퉁명스럽게 받아치고는 기지개를 켜며 가게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손님이 없는데 왜 점원을 고용하냐’는 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 할 말은 아니긴 했다. 우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작업을 재개했다.     


“작업은 잘 되어 가나요?”

우주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고는 혼자 일을 마무리 짓던 일도에게 양복 차림의 미인이 다가왔다. 일도는 앉은 채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출장료만 받아야 할 수준입니다. 꽃과 나무들이 테이블과 조화도 잘 이루고 있고, 관리도 잘 되어 있고요. 우리가 한 일은 멀쩡히 있던 것들을 들었다 놓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럴 거예요. 옛날부터 내가 직접 해 왔으니까요.”

『티블리 안나』 사장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비로소 일도는 돌아서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삼십 년의 세월은 못 속이는지 눈가와 입가에는 옅은 주름이 생겼지만 젊은 시절의 미모를 대부분 간직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실한 건 변함없군.”

“그래서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요.”

“피차일반이었지. 그래서 나를 찬 거 아닌가?”

“피차일반이라 하지 말아요. 적어도 난…”

거기까지 말하고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녀에게 첫사랑이자 아마도 마지막 사랑이었다. 미주를 통해 소개받았을 때부터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느꼈지만, 어떻게든 한결같은 사랑으로 돌아보게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주를 바라보는 일도의 눈빛에서 한 번도 자기에게 향한 적 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는 더 이상 그를 붙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자기에게 다정하게 대해 줘도 일도의 첫 번째는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별을 선언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삼십 년 만에 옛 연인은 재회했다.

“…난 적어도 네가 좋은 반려자가 될 거라 생각했어.”

일도는 조용히 말했다. 미주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도의 짝사랑이었고, 무엇보다도 일도에게 미주는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태양과도 같은 존재였다. 눈앞의 여자는 바로 옆에서 그런 일도의 손을 잡고 한평생 걸어갔을 사람이었다. 적어도 일도는 그런 마음이었고, 그래서 그녀와의 이별은 미주의 결혼보다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했는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당신도요.”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직접 연락은 하지 않았지만 먼발치서나마 서로의 소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일도는 얼마 안 가 맞선을 통해 만난 사람과 결혼했고, 꽃집을 차렸고, 상처喪妻하여 홀아비가 되었다. 그 사이의 구체적인 일들은 언젠가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자는 졸업하자마자 사업을 시작했고 이제는 음식점 세 개를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다. 독신 여성의 몸으로 이 정도의 성과를 이루기까지 겪은 고난과 역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아픔과 상처도 시간이라는 약을 통해 무뎌지고, 어떤 행복과 따스함도 시간이라는 물결과 바람 앞에서 온전하지 않다. 그렇게 자신만의 역사를 몸과 마음에 새겨 가며 사람은 성숙해진다. 냉철한 이성보다도 지고하면서도, 폭풍 같은 감정보다도 깊고 신비한 지혜의 눈으로 상대를 볼 수 있게 된다. 가게로 돌아와 비용을 지불하고 일도와 우주를 배웅하는 동안 두 사람은 사무적인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삼십 년 어치 회포는 불과 삼십 분 동안 오고가는 눈빛과 미소를 통해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불이 꺼진 서재에서 일도는 낮의 일을 곱씹어보았다. 식당에서 일하는 그 직원은 분명 우주와 만난 적 있다. 우주의 행동반경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주가 말한 그 학생임이 틀림없다. 그런 소녀가 삼십 년 만에 만난 전 여자친구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도는 그 다음 단계를 밟아도 괜찮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우주를 위한 일이야.’

일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또 다른 희생자를 내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늘 선택은 우주가 해 왔고, 자신이 아는 한 우주의 결정은 한결같았다. 그 결정은 누군가를 반드시 구원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짊어지게 한다. 일도는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지난 삼 년 동안 곁에서 우주를 지켜보아 왔다. 그러나 이대로 우주가 자신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보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등을 떠밀어주는 것에 불과해. 나머지는 두 사람의 몫이야.’

결심이 선 일도는 수첩을 펼치고 맨 마지막 장에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문득 은비의 얼굴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삼 년 전 그날을 기점으로 딸은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웃지 않는 딸의 모습이나마 볼 수 있음에 일도는 감사하고 있다. 만약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자신은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을 기꺼이 도맡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공원은 밤에는 특히 우범지대로 변모하기 쉽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런 인식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적고, 자기 몸을 지키는 최소한의 요령만 있으면 훌륭한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새로 고용된 관리자는 며칠 전부터 국방색 텐트 하나가 진을 치고 있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녀는 텐트로 돌아와 손전등을 켰다. 침낭과 세면도구와 옷가지 몇 개를 제외하면 산더미 같은 책들과 공책들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츄리닝으로 갈아입은 소녀는 침낭에 몸을 반쯤 넣은 채 손을 뻗어 공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낮에 머릿속에서 정리한 이야기를 차분히 써내려갔다.

종이에 글씨가 채워지는 속도는 빠르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다. 수정하는 일도 없었다. 마치 호흡을 하듯 소녀는 연필을 움직였다. 특별한 장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비일상적인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변에서 봤을 법한 군상들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뭔가 대단한 통찰이나 사색을 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필요한 모든 소재는 이미 그 안에 전부 들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혹은 어떤 학문이 스스로를 진리 내지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표방한다면 그의 발전은 거기서 끝난 셈이다. 학문은 이미 알려진 것들 혹은 언젠가 알려질 것들에 대한 이론이며 학자는 그것들을 이론적으로 아는 사람이다. 이미 알려진 것들과 언젠가 알려질 것들을 통틀어 ‘세계’라 일컬을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세계를 구성하는 학문과 비非학문을 넘나들며 에피스테메episteme와 독사doxa를 번갈아 구사하여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단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므로 학문과 에피스테메의 비중이 작품의 절대적 우열, 바꿔 말해 진리성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세계를 이야기하는 모든 작가는 평등하다. 잠시 손을 멈추고 소녀는 중얼거렸다.

“글로 세상을 바꾼다는 놈들 치고 자기 세 살 버릇 바꾸는 놈 보기 힘들다…”

미주가 현역 시절 후기에 자주 적던 문장이다. 세상은커녕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펜대 하나로 젠체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녀의 이런 자세는 동세대 작가들의 반감을 샀고, 그녀의 작품들은 나오는 족족 문단의 원색적인 비난을 샀다. 비난의 주된 요인은 소재와 주제의 천편일률이었다. ‘인간으로서 그 어떤 관용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악인도 인간을 넘어선 차원의 구원을 받는다’는 그녀의 일관적인 메시지는 ‘진부하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따라서 독자가 공감하기 힘들다’는 뻔한 레퍼토리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들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단서가 되고 일종의 경전의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작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말이다. 소녀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미주의 작품을 접하며 그녀의 마음에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용기와 자유가 흘러들어왔다. 그런 소녀에게 이러한 불안한 환경에서의 생활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본인에게는 말이다.     


3     


“그럼 나갔다 오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포터 열쇠를 빙빙 돌리며 일도는 가게 문을 나섰다. 우주는 일도의 등에 대고 까딱 목례하고는 다시 카운터에 앉았다. 아마 일도는 폐점 시간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온전히 우주만의 시간이었다. 청소는 문 닫기 한 시간 전부터 하면 되고 매상 정리는 일도와 같이 한다. 그때까지는 카운터와 입구만 잘 지키면 되었다.

우주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들었다. 책 외의 다른 사물을 갖고 온 건 처음이었다. 굳이 말하면 책을 가져온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도가 없을 때는 말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퇴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딱히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오늘은 어머니가 몇 시 쯤 퇴근하실까’ 하는 정도였다.

우주에게 변화를 준 건 며칠 전 돌연 방문하여 평지풍파의 마이페이스로 모자를 뒤흔든 소녀의 말이었다.  

   

“책장 가득 그럴듯한 커버의 양장본들만 쌓아 놓고 그 책들의 개요는 신이 나서 떠드는 주제에, 정작 자기만의 생각은 한 줄도 못 말하는 반푼이들은 널리고 널렸어.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어.”     


어조는 다분히 도발적이었지만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변명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정면으로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그때 욱했던 건 단순히 독서 습관을 지적받은 차원을 넘어 단조로운 일상 이면의 빈 껍데기 같은 그의 세계관을 지적받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날 이후 우주는 남아도는 시간 내내 그를 고민했고, 습관처럼 노트와 펜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무엇을 써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읽은 책이 그렇게 많은데 그로부터 나만의 문장을 한 마디도 짜내지 못한다는 데 우주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였다.

“하다못해 SNS 계정이란 걸 만들어서 짧게라도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하나…”

“SNS를 할 상대는 있어? 친구도 없으면서.”

“그야 당연히 없…”

대답을 하던 우주는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는 목소리에 무심코 대답을 해 버렸다. 우주의 눈앞에는 알고 있는 얼굴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본 적 있는 유니폼을 입고 손에는 빵과 커피 봉지를 든 채 서 있던 소녀는 이내 정적을 깨고 말했다.

“난 분명히 전해 줬다. 네가 농땡이 피우고 있던 건 입 다물어 줄게, 월급 루팡.”

봉지를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소녀는 얼빠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우주에게 눈길도 안 주고 등을 돌렸다. 정신을 차린 우주는 황급히 카운터에서 나와 소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이게 대체 뭔데. 설명을 해 줘야 알 거 아냐.”

“설명은 너네 사장한테 들어. 난 배달 왔을 뿐이야.”

“너네 가게가 여기서 차로 삼십 분 걸리는데 면허도 없는 널 보냈다고? 말이 돼?”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실랑이를 했다. 앞치마를 입은 청년과 웨이트리스 복장의 소녀가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할 법한 그림이었다. 소녀는 반대편 손으로 자신을 붙든 우주의 손을 짝 하고 때렸다.

“아프잖아! 궁금하면 너네 사장한테 물어보라고! 지금 바깥에 있으니까.”

우주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빗발쳤다. ‘아저씨가 왜? 이십 분 전에 나갔는데? 언제 거기까지 갔다오신 거지?’ 그러자 갑자기 문 밖에서 부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포터 엔진 소리였다.

우주는 황급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포터는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뒷면의 ‘메이 플라워’라는 문구는 분명히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우주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게 다 일도가 꾸민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우웅-’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우주는 한숨을 쉬며 폴더를 열어 수화 버튼을 눌렀다.

“네, 사장님.”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지?”

일도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요.”

“난 오늘 어른의 약속이 있어서 가게로 안 돌아가고 바로 퇴근할 거다. 둘이서 맛있게 먹고, 너도 오늘은 한 시간 일찍 문단속하고 들어가. 걔는 큰길까지 바래다주고.”

“아니 그게 무슨…”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난감한 일이었다. 한 시간 일찍 닫는다고 해도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자긴 조기퇴근하고 놀고 있을 테니 그 시간까지 저 소녀와 단둘이 가게를 보라는 게 일도가 말한 ‘선물’의 정체였다.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 선물은 의미가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며 가게로 들어서자 소녀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대폰을 든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사장님 전화…”

“…”

“어른의 약속 때문에 가게를 일찍 닫았대.”

“…”

“난 여기 있다가 너랑 같이 퇴근하래.”

“…”

“큰길에서 택시 탈 돈은 봉지에 넣어놨대.”

“큰길에서 우리 사장님이 널 픽업한 거였어?”

“…”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루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하루 잘 부탁할게.”

진실은 오직 하나다. 중년 고용주들의 오지랖 때문에 힘없는 직원들이 팔자에도 없던 불편한 합동 근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삼 우주는 소녀의 웨이트리스 복장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절대영역을 과시하는 짧은 프릴 치마에 가슴팍에는 팔뚝만한 리본이 달려 있었다. 머리에 쓴 캡도 프릴과 큐빅이 촘촘히 장식되어 있었다. 늘 남자 둘밖에 없는 살풍경한 점내에 뜻밖의 이질적인 존재가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다.     


“저기, 그만 하고 좀 들어오지…”

우주는 밖을 내다보고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소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묵묵히 화분을 닦고 있었다. 일도나 우주나 이삼일에 한번 닦으면 자주 닦는 수준이었다. 차도 사람도 얼마 오가지 않는 골목길이라 그렇게 먼지가 쌓일 일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점내의 진열대를 닦은 참이었다. 손님이 불필요한 허드렛일을 하고 직원이 그저 지켜보는 이런 상황이 한 시간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우주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북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우주는 밖으로 나와 행주를 든 소녀의 손을 붙들었다.

“이제 됐어. 들어와서 커피 마셔.”

“내버려 둬. 일하는 중이잖아.”

“네가 하는 건 일이 아냐, 어정쩡한 시간 낭비지. 할 일 없으면 먼저 가도 돼.”

“사장님이 차비까지 넣어놨는데 신뢰를 깨라는 거야?”

우주는 살짝 질렸다. 생각보다 고지식한 친구였다.

“여기 딱 두 명분의 커피하고 다과를 보면 모르겠어? 너네 사장과 우리 사장님이 놀러가는 김에 너하고 나도 오늘 하루 일하지 말고 놀라고 배려한 거야.”

“그걸 모를 줄 알아?”

“알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 사장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도 아닌데.”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우주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옆에 있는 게 불편해서일 것이다. 자신은 전직 작가 강미주의 아들이고, 추측컨대 미주의 은퇴에는 자신에게 커다란 원인이 있다.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소녀의 행동은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다. 자신을 소진하면서 주변 사람에게도 불편함을 안겨 주는 소모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우주는 그런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일단 들어와서 같이 식사나 해. 아직 점심도 못 먹었잖아.”

소녀의 손을 잡아끌고 우주는 가게로 들어왔다. 카운터 안의 하나뿐인 의자에 소녀를 반 억지로 앉히고 손에 도넛과 커피를 들렸다. 그리고 자신은 카운터 앞을 막아서다시피 허리를 기대고 커피를 손에 들었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옆에 붙어만 있으라고?”

아까보다 다소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소녀가 물었다. 우주는 도넛을 우물거리며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너 글 쓸 줄 알지?”

소녀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우주는 카운터에 펼쳐 놓은 노트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 거침없는 훈수를 둘 정도로 자신이 있으면, 날 도와줄 수 있겠지?”

우주의 말에 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네가 뭐가 예쁘다고 내가 그런 걸 해 줘야 하는데?”

“너 내가 누구 아들인지 알지?”

“윽…”

소녀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고 우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반응하면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네가 앞으로 나를 도와준다면 그만큼 우리 어머니를 자연스럽게 볼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뿐이야. 어머니도 나름대로 네가 맘에 드신 모양이고. 작가 지망생이 아니고 내 친구로서 말이야.”

소녀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우주는 결정타를 날렸다.

“아무리 절필했다고 해도 자기 작품 좋아하는 지망생을 완전히 쳐낼 수는 없는 법이거든. 창작자들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군상들이니까. 하다못해 네가 쓰는 글을 보여줄 기회라도 있지 않겠어?”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고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맴돌고 있었다. 우주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미주와 일도가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가끔씩 보이는 표정이었다. 쓸쓸함과 기쁨이 공존하는 차마 말로 다 형용하지 못할 그런 표정이었다. 우주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은은한 행복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다.     

  



일도는 찻잔을 입에 대었다. 보이차의 미묘한 텁텁함이 느껴졌다. 창 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무리를 이끌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일도는 아주 오래 전 풍경을 떠올렸다. 사내아이 같이 당차면서도, 혼자 있는 모습은 늘 어딘가 쓸쓸해 보였던 소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일도의 마음 한구석은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콕콕 찌르는 듯 아팠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래 전 연인은 일도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발견했다. 손수건을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직감적으로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님을 눈치 챘다. 아까 전부터 보던 일도의 눈빛은 자신에게 결코 보인 적 없는, 가장 사랑하는 상대를 볼 때의 그것이었다. 한때는 자신을 비참한 기분까지 들게 만들었던 그의 악의 없는 순수함은 그때도 지금도 고귀한 것이라 그녀는 여겼다.

며칠 전 그녀는 일도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그의 진지한 목소리는 “소중한 사람의 멈춰선 시간을 다시 움직이고 싶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도와줄 수 있어?”라는 영문 모를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잠깐의 정적 후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일도가 제시하고, 그에 따라 그녀는 일도가 지목한 아르바이트 소녀를 오늘 우주와 함께 있게 했다.

“이런, 미안하게 됐군.”

일도는 창밖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느라 눈앞의 여자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방치한 것을 깨달았다. 소매로 대충 눈가를 닦고는 일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치마에 작업복 차림으로 나온 자신과 대조적으로 그녀는 얼핏 봐도 한껏 꾸민 외양이었다.

“사장도 사장 나름이군. 이렇게 마당에 있다 온 티 팍팍 내는 주인이 있는 가게가 인기 있을 리가 없지.”

“당신하고는 일의 성격이 다르니까요.”

“오늘은 정말 고마워. 당신 가게 일에 사실상 지장을 주는 부탁이었는데 들어줘서.”

“…”

그녀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립스틱에 팔찌에 귀걸이에 구두까지 일도를 생각하며 밤새 코디네이트한 걸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이 자리에 신경 쓴 반만이라도 나를 생각해 줄 수 없었냐’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자칫 옹졸해질 뻔한 자신이 싫어지기 직전 일도의 ‘고맙다’는 말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위안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었기에 가슴 아픈 기억도 많았지만, 이런 사람이었기에 사랑했음을 재차 떠올리게 되었다.     



 

소녀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펜을 붙잡은 지 두 시간 째, 우주 앞의 종이는 한 글자도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거나 글의 형태면 상관없으니 써 보라고 소녀가 말했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제일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을까.

우주는 말 그대로 움쭉달싹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두 시간 전 소녀는 ‘일단 뭘 쓰고 나서 얘기해. 첨삭을 해 주든 지적을 해 주든 거기서부터야.’라고 말을 꺼내고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채였다. 처음 한 시간 동안은 우주도 호기롭게 글을 쓰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고 단조로울지언정 선명한 일상이 있는데 뭐라도 쓸 게 없을까 싶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하루 일과를 일기처럼 쓰는 건 어린애들도 할 수 있다고 우주는 생각했다. 무언가 인상적인 사건을 조명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게 그럴듯한 ‘어른의 일기’일 터였다. 그러나 최근의 일상을 돌이켜보면 도무지 그런 인상적인 사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있다면 눈앞의 소녀와 며칠 전 조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당사자에게 읽힐 글의 주제로는 낯 뜨겁기 짝이 없었다. 그 외에는 매일 밤 침대 머리맡에서 읽는 책의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막상 글로 쓰려니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지금까지 읽어 온 숱한 철학자들 중 누구의 말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고, 애써 기억해내도 글로 쓰기엔 저자의 해석도, 자신의 해석도 없다시피 했다.

결국 우주는 펜을 내려놓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안 될 것 같네. 도저히 쓰고 싶은 게 생각이 안 나서 말이야.”

아직도 남아 있는 알량한 자존심에 우주는 괜한 말을 덧붙였다. 소녀는 작고 낮게,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쓰고 싶은 게 없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런 욕망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으니까.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욕망이 충족됨과 동시에 증폭되기도 하고, 쓰지 않음으로써 욕망이 거세되기도 하는 법이야. 그걸 다른 표현 수단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

어느새 창문으로 석양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벽에 기댄 소녀의 모습이 세피아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 장소와 시간이건만 우주에게는 소녀의 존재만으로 유사한 나머지 틈새가 없어 ‘보이던’ 일상에 뚜렷한 균열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유사한 일상은 어디까지나 유사할 뿐 동일하지는 않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시간은 연속적일지언정 영속적이진 않다. 정말로 영속적=무기적인 시간과 공간 개념 앞에선 찰나의 반짝임에 불과한 존재인 인간은 당장 눈앞의 순간까지도 보장되지 않은 일상에 익숙해져서는 그에 의존하거나 한탄한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거야.’

미주와 일도, 그리고 은비가 언제까지고 자신의 곁에 있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 소녀도 다를 바 없었다. 우주의 눈에 그녀는 위태로운 하나의 촛불 같아 보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촛불.

우주는 펜을 움직여 눈앞의 소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눈동자, 머리칼, 옷의 주름… 문득 우주에게 눈길을 돌린 소녀는 깜짝 놀랐다. 우주는 자신과 종이를 번갈아보며, 펜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든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가게 안도 선선해졌건만 우주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색이 마젠타와 시안을 거쳐 유리瑠璃 빛깔로 물들 무렵, 은비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원의 확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음 장치가 딸린 창문과 두 대의 신디사이저, 서라운드 스피커 겸 앰프, 독일제 PC 일체형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딸린 이 방은 음악 감독 직함을 단 그녀의 카드키로만 출입이 가능한 전용 공간이었다.

오전에 마침내 콘셉트에 맞춘 미디 노트를 다 따놓고 오후부터 이런저런 가상악기로 여러 버전을 시험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은비의 마음에 드는 음색이 나오지 않았다. 유럽의 U사에서 사용 중이라는 최신 악기 음원이랍시고 회사 차원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입했건만 이래서야 본전도 못 뽑을 지경이었다.

‘비싸다고 언제나 좋은 법은 없지.’

은비는 헤드폰을 벗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사 년 전에 비슷한 분위기의 트랙을 만든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나두워크스의 러브콜을 받아 입사한 은비의 걸작이었다. 그때 썼던 가상 악기 라이브러리는 악기 수는 적지만 절묘하게 은비의 마음에 드는 구성을 하고 있었다. 사원 보급용 PC로 작업한 거라 라이브러리고 작업 원본이고 복사하지 못한 채 하드에 보관되었고, 회사 NAS에는 상용 트랙만 저장되어 있다──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책상 한편에 있는 뚜껑을 열고 렌즈가 내장된 아크릴에 검지를 갖다 대자 ‘철컥’ 소리를 내며 서랍이 열렸다. 오직 이것만이 서랍의 잠금을 해제하는 방법이었다. 가상악기의 정밀도와 일체감이 지금 같지 않던 옛날에는 레코딩의 상당 부분을 직접 연주해서 입력했고, 피아노를 치던 습관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손끝의 지문이 얼마든지 변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직접 연주하는 비중이 대폭 줄고, 더 이상 집에서 피아노를 치지도 않았다.

은비는 허리를 숙여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목적은 삼 년 전 보급용 PC에 사용되던 모델의 하드였다. 당시 첫 작업물을 소장하고 싶던 은비는 한 아트팀 선임에게 남몰래 부탁했고, 그는 어딘가에서 똑같은 사양의 하드를 공수하여 보안 소프트웨어를 제외한 내용물을 통째로 복사해주었다. 걸렸다간 해고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정도 일을 스스럼없이 해 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던 것이다.

감상적으로 되려는 기분을 애써 떨치고 은비는 맨 밑에서 하드를 찾아 끄집어내었다. 다행히 지퍼백에 보관되어 있어서 습기에 디스크가 손상되진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고가의 음향 기기들을 배치한 만큼 평소에도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물병을 늘 옆에 두고 있을 정도다. 단자를 자세히 보니 역시 은비가 지금 사용하는 일체형 PC와는 사양이 맞지 않았다. 소프트웨어를 복사한다고 해도 내장된 가상 악기를 지금 쓰는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인식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결국 이렇게 되잖아…”

은비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는 하드를 연결해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해당 악기 파트를 직접 신디사이저로 연주해서 외부 음원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은비의 눈에 문득 탐색기의 파일 하나가 띄었다. ‘lover.mp4’라는 이름의 동영상 파일이었다.

은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적어도 자신은 디렉터리 최상단에 동영상 파일을 덩그러니 널어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적나라한 공작을 해둘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겨우 떨쳐냈더니 이제 와서 이런 재회는 비겁하다. 그러나 차마 그걸 삭제할 수 없었다. 은비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정말로 떨쳐냈다면 이런 것 정도로 흔들릴 리가 없어.’

굳은 각오와 함께 은비는 동영상을 재생했다. 자신이 입사할 무렵 작곡한 트랙 하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면에는 그림 한 장이 서서히 나타났다. 그림 속에는 그때의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한 채 악보와 씨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은비는 놀랐다. 자신이 아는 그는 그 날 이후 그림을 그리기 위해 펜을 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글씨를 쓰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그의 오른 손끝은 망가졌을 터였다. 그러나 펜의 터치나 얼굴 묘사는 그림에 문외한인 은비조차도 기억하는 그만의 것이었다.

“어, 어, 이렇게 하면 녹음되나?”

“!”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는 순간 입을 가렸다.

“놀랐지? 몇 년 만에 펜을 잡아본 건지 원. 그래도 역시 폼은 어디 안 간다 이 말이야~”

연인이던 시절, 장난스럽게 자신에게 건네던 목소리.

“…라고 으스대고 싶지만, 사실은 꽤 고생 좀 했어. 조금만 손끝에 힘을 줘도 팔이 저릴 듯이 아파서 말이야.”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나오던 어조와 말투.

“근데 어쩌겠어. 연인이 내 옆에 있겠다고 음대에서 장학생으로 부르는 것도 마다하고 회사에 들어와서, 대학 생활도 건너뛰고 월급쟁이의 삶을 살고 있는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어?”

애틋한 시선으로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 목소리.

은비의 눈에서 흐른 눈물은 볼을 타고 턱에 맺혀 방울방울 떨어졌다. 좋아했었다. 사랑했었다. 그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었고, 그가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 사람을 오롯이 소유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모르던 철부지였지만, 올곧은 마음만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애써 외면해 왔을 뿐이다.

아픔을 딛고 당차게 자신의 길을 걷는 어른의 행세를 해 왔지만 여전히 은비의 마음속에는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소녀가 남아있었다. 그걸 깨닫게 해 준 건 한때의 연인이 숨겨 놓은 사랑의 마법이었다.     




우주가 펜을 놓은 건 폐점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의존할 수 있는 햇빛은 진작 한 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제야 소녀는 몸을 움직여 전등을 켜고는 우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살며시 앞에 놓인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볼펜만으로 그린 그림인데도 음영의 묘사가 마치 색감이 있는 착각을 일으키며 눈에 비쳤다.

“그림을 배웠던 거야?”

소녀는 그림에 눈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아마 안 배웠을 걸? 비슷한 일은 했지만.”

우주의 대답에 소녀는 내심 갸우뚱했다. 배웠으면 배운 거고 안 배웠으면 안 배운 거지 저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생각지도 못한 재능이네. 다시 봤어.”

소녀는 눈을 들어 우주를 쳐다보았다. 우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왼손으로 오른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녀는 앞치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마당의 조리개에 있는 물을 끼얹다시피 하고는 꼭 짜서 우주의 오른손을 동여맸다. 우주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보긴 했나 보네. 갑자기 다정한 짓도 하고.”

“쓸데없는 소린 됐고.”

소녀는 정색하고는 뒤돌아서 문으로 향했다.

“너 때문에 퇴근 시간은 한참 넘겼으니까 난 멋대로 가겠어. 너도 알아서 가든지 말든지 해.”

“아…”

우주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몸을 일으켜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바로 소녀의 말에 가로막혔다.

“저번에는 내가 쉽게 말을 했어. …그 정도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굳이 글로 표현해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네.”

딸랑, 하고 방울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소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우주는 오른손에 묶인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이거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살며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아까보단 저린 감이 덜했다. 언제, 무슨 일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우주는 오른손의 상태에 위화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오른손 때문에 큰 불편을 느낀 적도 없었다.

회사 다닐 때 타블렛 펜을 쓰긴 했지만 우주의 담당은 3D 폴리곤을 레벨 디자이너의 의도에 맞게 구현하도록 조율하는 테크니컬 아티스트였기에 직접 디자인 초안을 딸 일은 없었다. 꽃집에서 일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일정 무게 미만의 사물을 드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어지간히 무거운 건 일도와 같이 작업한다. 모든 서류 작업과 정산은 일도가 하기 때문에 업무상 우주가 펜을 들 일은 없다.

만약 방금 전에 글을 쓸 내용이 있었다고 해도 도중에 손이 아파서 단념했을 것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감각만큼은 우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우주의 기억 속에 학교 수업 외에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어떻게 연출해야 효과적으로 전달되는지를 우주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4     


‘쏴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이 미주의 몸을 적셨다. 미주는 옷을 입은 채였다. 두 눈을 살짝 감은 채 그녀는 양 팔을 벌려 위에서 내려오는 물세례를 맞았다. 퇴근하고 와서 어김없이 행하는 그녀의 샤워 습관이었다.

오늘 미주가 일하는 마트에서 20대 초반의 신입 아르바이트생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을 한 그녀는 젖먹이 아이가 딸려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동급생이던 아이 아빠는 그녀가 임신 중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라는 부모의 명령에 그녀는 처음으로 반항했고, 달동네에 단칸방을 얻어 아이와 단둘이 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일하는 동안 아이는 휴게실에 혼자 있었다. 미주를 비롯한 중장년층 여직원들은 딸 뻘 되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겼고, 아이와 놀아 준다든지 분유를 먹인다든지 기저귀를 갈아준다든지 하며 도와주었다.

그런 그녀를 곱게 보지 않은 건 이삼십대 여직원들이었다. 아이를 낳았음에도 그녀는 10대 후반의 얼굴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고, 별달리 꾸미지 않아도, 똑같은 유니폼을 입었음에도 미모가 확연히 두드러졌다. 남직원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그녀에게 유독 친절했으며, 개중에는 같이 식사를 하자, 영화를 보자는 등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현명하게 대처했다. 밖에서 만나자는 남직원의 권유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고, 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모든 동료에게 ‘배려에 대한 감사’의 명목으로 음식이나 간단한 선물을 돌렸다.

그러나 젊은 여직원들의 질투는 막을 수 없었다. 뒤에서 하던 근거 없는 흉보기는 이윽고 가르치지도 않은 일 안 했다고 트집 잡기, 일감 몰아놓고 다 못 하면 갈구기 등 전형적인 직장 내 괴롭힘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돌아가는 사태를 눈치 챈 미주를 비롯한 나이 든 여직원들은 그녀와 같이 근무를 설 때면 최대한 그녀를 감쌌다. 그러자 젊은 여직원들은 남직원들까지 끌어들였다. 저 나이에 눈 맞아서 애 낳은 년이 보통 요물이겠냐고, 순진한 척 하면서 어장관리하는 거라고 회사에서든 술자리에서든 중상모략을 그치지 않았다. 결국 남직원들 대다수가 그에 넘어가 근무 중 남자 손이 필요한 일마저 그녀에게 떠넘기기 일쑤였고, 몇몇 생각 있는 남직원은 처음에는 그녀의 일을 도왔지만 다른 직원들의 ‘네 발로 나가게 해줄까’ 하는 협박에 결국 방관자란 이름의 동조자가 되었다.

간만에 오후에 출근한 미주는 뒤늦게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받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샘 때문에 신입을 왕따 시키고 끝내 내쫓은 젊은 여직원들에게 미주는 화가 치밀었다. 똑같은 돈을 받고 똑같은 일을 해도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먹여 살리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그녀와 자취 비용 내지 등록금 내지 용돈벌이를 위해 일하는 젊은 여직원들은 일에 대한 무게가 달랐다. 그렇다고 딱히 처음부터 특별대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뭐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은 건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갖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어려서 애 낳은 까진 년이라고 낙인을 새겨 놨으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겠지.’

미주는 먼 옛날을 떠올렸다. 그 친구와 비슷한 나이에 미혼모가 된 자신을. 학업을 중단하고 김치 공장에서 익숙지 않은 육체노동을 하며 비좁은 숙직실에 돌봐주는 사람 없이 방치된 우주를 신경 쓰느라 이중고에 시달리던 시절을. 단칸방에서 홀로 우주를 돌보느라 비몽사몽하며 글을 쓰던 나날을.

미주는 우주도, 자기 자신의 꿈도 놓지 않았다. 세상에 그 두 가지를 온전히 양립할 수 있는 부모는 한 줌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 역시 그 안에 편입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라 생각했고 그를 위해 다른 불필요한 것들을 보거나 듣지 않았었다.

미주는 물에 젖어 바짝 달라붙은 옷을 하나씩 벗었다. 속옷을 벗고는 마지막으로 양 손목의 밴드를 풀었다. 자상의 흔적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미주는 빌었다. 그 친구가 새로운 곳에서 보다 많은 사랑을 받기를. 그녀가 베푼 사소한 호의의 몇 갑절만큼 그녀와 아이에게 돌아가기를.     


잠옷으로 갈아입은 미주는 머리를 닦으며 침실에 들어섰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욕실에 들어갈 즈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정도면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거나,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발신 상대는 둘 다에 해당했다. 미주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봐? 샤워를 오래 하네.

일도의 경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삼십 년을 훨씬 넘긴 인연이라도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퇴근 시간을 파악하고 있고, 샤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파악하고 있다면 경도의 스토커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너 이실직고해. 우리 집에 몰카 달아놨지?”

미주는 질렸다는 듯 말했다. 수화기 너머 일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 조악한 장치로는 선배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충족할 수 없지. 여행자가 북극성을 보기 위해 필요한 건 두 눈과 올곧은 의지뿐이거든.

“글재주는 더럽게 없는 놈이 예나 지금이나 입 터는 건 청산유수야.”

미주는 거친 말투로 응수했다. 그녀의 입가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도를 제외하면 우주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이런 험한 말은 하지 않는다. 부모와 의절한 이상 일도는 미주의 막역지우이자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인연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했는데?”

미주의 말투가 낮고 부드러워졌다. 십 년 전 미주가 마트에서 일하고부터 두 사람의 소통은 극히 제한되었다. 설날과 추석 때 모이는 걸 제외하면 따로 만나지 않았고, 중요한 용건이 있으면 이렇게 미주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통화를 했다.

-봄이 오고 있어서.

“…”

수화기 너머 일도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주는 잠자코 들었다.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잖아.

“…”

-선배, 나 이거 허락받으려는 거 아니야. 난 하기로 결심했고, 그러니까 무조건 할 거야.

“일도야.”

미주는 입을 열었다.

“나하고 너, 그리고 은비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니?”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어딘가 깊은 곳에서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선배 입장에서 충분하다는 게 무슨 의미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도의 목소리는 진지하고도 단호했다.

-내 입장에서는, 우리가 우주에게 받은 걸 생각하면 평생을 바쳐도 충분하지 않아.

미주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지고한 구원이 있었고, 숭고한 희생이 있었고, 영원한 비극이 남았다. 구원과 희생과 비극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조용히 가슴에 묻고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일도는 또 한 명, 그를 겪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선배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멋대로 하는 거니까, 책임도 뒷수습도 내 몫이야. 그럼 잘 자.

미주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일도의 마지막 말을 그녀는 곱씹었다. 결국 우주를 위해 자기 혼자 나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엄마인 자신을 제쳐 놓고.

“건방져…”

미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일도의 처절하리만치 우주를 위하는 헌신의 근간을 타고 올라가면 삼십여 년 전부터 변함없는 그녀를 향한 순애보가 있었다. 그녀가 우주를 낳을 때쯤 맞선에서 만난 상대와 결혼하고도 여전히 일도는 마음을 간직했다. 언제나 미주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일도는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일도는 미주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않았다. 미주 역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캐묻거나 적극적으로 부딪친 적이 없다. 일도는 그럼에도 미주와 우주에게 한결같이 호의적이었고, 미주는 차마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하게 되면 일도마저 자신을 떠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일도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폼이나 잡고 앉았어. 하나도 안 멋있는데…”

창밖에는 초승달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전깃줄에 앉아 있던 참새가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미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득 미처 작별인사를 못한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 있는 그녀를 훔쳐볼 때면 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깨를 토닥이며 부르면 곧바로 입에서, 눈에서 미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활기찬 목소리로 “주임님!” 이라 씩씩하게 대답한다. 그렇게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구원해 왔을 것이다.

미주는 유리창을 거울삼아 자신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러나 비치는 건 유리색의 밤하늘뿐이었다. 그럼에도 미주는 입에서, 눈에서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마워…” 라 내뱉었다.      

  



시립도서관 4층의 고서 보관실은 낡고 해진 책들의 쾨쾨한 냄새로 가득했다. 우주는 관장을 따라 영미 문학 코너에 들어섰다. 관장은 “버틀러… 버틀러…” 하며 손가락으로 책등을 훑더니 한 권을 끄집어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책을 스윽 하고 닦으며 관장은 말했다.

“이 양반 안 되겠네요. 사적인 일로 일요일에 직원을 부려먹기나 하고.”

“전 괜찮습니다.”

우주는 관장이 건네주는 책을 받으며 말했다. 어지간하면 중고로라도 책을 사서 읽는 우주에게 도서관은 그다지 친숙한 공간은 아니었다. 일도가 이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킬 때나 가끔씩 가서 책을 빌려 오곤 했다.

“그럼 어서 나갈까요, 여기 공기가 그다지 몸에 좋지는 않아요.”

관장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우주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느낌과 동시에 특별대우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일도는 심부름을 시키면서 평소처럼 책 제목을 알려주지 않고 도서관 층수와 시간을 알려 주었다. 일도가 알려준 대로 열 시에 4층으로 올라가자 관장이 우주를 맞이했다. 관장은 열람실이 아닌 귀퉁이의 ‘출입금지’라 쓰인 문 앞으로 우주를 이끌고는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들어갔다. 십 분 후 다시 밖으로 나와 자물쇠를 잠그는 관장에게 우주는 물었다.

“2주 안에 반납하면 되죠?”

관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사장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난 이만 갈게요. 모처럼 도서관에 왔는데 책이라도 둘러보고 가요.”

“…감사합니다.”

우주는 돌아서서 나가는 관장을 배웅하고는 책을 가방에 넣었다. 한 번쯤 기분전환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우주는 3층으로 내려갔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 적당한 자리를 잡고는 우주는 책장 사이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두세 시간 안에 훑어보기만 해도 떡을 치는 수준의 분량과 난이도의 책’이었다.

마침 가방에는 늘 들고 다니는 노트도 들어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십 분 정도 서가를 두리번거리던 우주는 영화 관련 비평서 한 권을 뽑아들었다. 맡아 둔 자리에 앉고서는 첫 장을 펼쳐보았다. 신간이라 그런지 사용감이 없다시피 했다. 저자는 어느 미학 박사로 몇몇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 우주 역시 게임 그래픽을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던 만큼 나름 흥미가 돋았다.

이십 분도 채 안 되어 우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감히 평해보자면,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을 분명 봤었는데 책 내용에서 그런 기시감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기억나지도 않는 스쳐지나간 컷들을 벤야민이니 보드리야르니 하며 생경한 용어들을 나열하며 해석하고 있으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런 걸 읽고 생각을 정리한다는 건 무리였다.

우주는 한숨을 쉬며 책장을 덮었다. 문득 아까 전 관장에게 넘겨받은 책이 생각이 났다. 가방에서 봉지를 꺼내 열자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책표지에 도금되어 있어야 할 제목은 벗겨져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책장을 열자 첫 페이지에 비로소 『THE AUTHORESS OF THE ODYSSEY』라는 제목이 큰 활자로 찍혀 있었다. 맨 밑에는 영어로 된 출판처와 함께 189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뭐야, 너 이런 거 보니?”

우주의 등 뒤에서 누군가 고개를 쑥 내밀고 말했다. 순간 놀란 우주의 엉덩이가 들썩 하고 의자에서 들렸다. 우주가 뒤돌아보자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교복 차림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지?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네!”

우주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주가 읽고 있던 책을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책장을 팔랑거리면서 말했다.

“전부 영어네. 게다가 이거 학술서잖아, 읽어낼 수 있어?”

“나 좀 봐.”

우주는 소녀가 들고 있던 책을 덮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뭐야? 무게나 잡고.”

“무게가 아니라 상호 존중의 문제야.”

우주와 소녀의 만남은 이걸로 벌써 네 번째였다. 이쯤 되면 이제 비일상적인 조우라고 말할 빈도와 횟수는 넘어섰다. 지난 수년간 지극히 한정적이던 우주의 인간관계에 새로운 관계가 편입된 거나 마찬가지다.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이 있어야 한다. 지금 지적해두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치게 될 것이다.

“나한테 반말하는 건 좋아. 나도 너한테 반말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너’라고 불리는 건 아닌 것 같아.”

“그건…”

“사회에서 만난 사람끼리 반말을 쓴다는 건 그만큼 지킬 건 지킨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거지. 안 그래?”

소녀는 시선을 떨궜다. 우주는 잠자코 기다렸다. 딱히 어른 대접을 받겠다는 건 아니었다. 몇몇 면에서 소녀는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훌륭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의 잡아먹을 것 같은 태도에서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사리 분별을 할 줄 안다면 알량한 자존심을 세울 문제가 아니란 것도 알 것이다. 이윽고 소녀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싫어.”

이긴 건 자존심이었다. 우주는 기가 차서 말했다.

“그럼 너하고 난 여기서 끝이야. 앞으로 아는 체 하지 말도록.”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우주의 팔을 소녀가 붙잡았다.

“아직 약속 안 지켰잖아. 끝은 무슨 끝이야.”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준다는 거? 됐어. 아들이 이런 취급당하는 거 알면 치를 떠실걸?”

열람실 한가운데서 실랑이가 벌어지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우주는 소녀를 뿌리치지 않고 적당히 힘을 뺀 채 소녀와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는 조그맣게 말했다.

“…안해.”

우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고분고분해지나 보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뭐라고? 안 들렸어! 나 간다!”

“미안해!”

소녀가 버럭 외쳤다. 우주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소녀는 얼굴이 벌개진 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적어도 열 살 이상 어린 여자애와의 알력 싸움에서 이긴 데 의기양양해진 우주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소녀의 턱을 잡아들었다.

“아니쥐, 아니쥐. 어른한테는 반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오. 따라해 봐, ‘미안합니다.’”

소녀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토마토처럼 되었다. 우주는 표정을 바꾸고는 목소리를 깔고 굳히기에 들어갔다.

“두 번은 없어. 자, 5초 준다.”

“미…”

소녀의 입이 가까스로 벌어졌다. 눈에는 오만 부의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우주는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미… 미…”

“풉!”

우주는 참고 있던 웃음을 거하게 터뜨리며 소녀의 안면에 아밀라아제를 분무했다. 이윽고 악에 받친 소녀가 도서관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미친놈아 네가 반말하라며!!!”

그와 동시에 소녀는 우주의 양팔을 붙든 채 있는 힘껏 정강이를 차기 시작했다. 우주는 우주대로 소녀에게 꿀밤을 먹이기 시작했다. 우주와 소녀의 비명 소리, 참다못한 사람들이 항의하는 소리, 그리고 다급히 직원을 호출하는 사서의 외침으로 열람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5분 후, 사서와 직원들에게 내쫓긴 우주와 소녀는 도서관 밖 벤치에 앉아 씩씩거렸다. 우주는 정강이를 어루만지며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 역시 머리를 감싸 쥐며 우주를 흘겨보았다.

“그래서 넌 뭐하러으어어! 이어와(이거 놔)! 아하(아파)!”

소녀가 입을 열자마자 우주는 곧바로 양 볼을 잡아당겨 응징을 가했다.

“아할게(안 할게)! 어아고 아할게(너라고 안 할게)!”

소녀는 우주의 팔을 탁탁 치며 항복을 표시했다. 그제야 우주는 볼을 쥔 손을 풀었다. 소녀는 양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강우주 씨는 뭐 하러 왔는데?”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은 것 같았다. 우주는 방금 전 소녀가 들춰보던 원서를 건넸다.

“이거 빌리러 온 거야.”

소녀는 책을 받아들고는 시선을 고정했다. 삽시간에 소녀는 책에 몰두했고, 약 십 초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게 되었다. 다른 책을 빌릴 새도 없이 쫓겨난 우주는 잠자코 소녀를 보고 있었다. 가끔씩 책장을 곁눈질했지만 빽빽하게 쓰인 영어를 보고는 이내 단념했다.

“읽으면 다 알아?”

“…”

우주의 질문에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다 읽기 전까지는 계속 이 모양일 것이다. 우주는 옆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소녀를 내버려둔 채 벤치에 몸을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옆에 있는 되바라진 꼬맹이만 아니면 휴일에 밖에 나와 유유자적하는 것도 괜찮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탁 하고 책장을 덮는 소리에 우주는 옆을 보았다. 소녀는 우주에게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책을 건넸다.

“재미없네.”

우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됐네. 재미없는 책을 끝까지 다 읽어서.”

“그러게, 차라리 다른 책을 읽는 게 나았어.”

소녀는 도도하게 말했다. 우주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렇게 읽으면서 내용이 머리에 다 들어와?”

그러자 소녀는 우주를 째려보았다. 눈동자엔 힘이 가득한 채 눈썹은 팔자를 그리고 있는 이 모습이야말로 소녀가 자신을 보는 기본 표정이 아닐까 우주는 생각했다.

“강우주 씨.”

“뭐, 뭐야?”

‘지금 내가 허세라도 부리는 줄 알아?’ 같은 반응을 예상한 우주는 당황했다.

“강우주 씨가 작정하고 그림을 하나 그렸고, 세기의 명화네 뭐네 하며 호평을 받았다 쳐.”

소녀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강우주 씨가 강미주 작가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나, 직업이 전업 화가가 아닌 동네 꽃집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고 쳐.”

우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격양되어 갔다.

“그러면 자칭 타칭 평론가들이 강우주 씨의 그림에 대고 ‘역시 예술가의 핏줄이라…’, ‘개천에서 용 났네…’ 같은 말을 반드시 하겠지. 그러면 유쾌한 기분이 들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봐.”

우주는 뒤통수를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달을 가리키는 사람은 청중이 정작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이나 보면 힘 빠진단 소리야.”

우주는 그제야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예컨대 소녀가 소설을 썼고 그것이 문단이나 독자로부터 걸작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치자. 그런데 자의로든 타의로든 여고생이 그걸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출판사가 판촉을 위해 혹은 언론이 화제성을 노리고 그를 대서특필한다면, 당연히 작가의 나이와 성별에 초점을 맞춘 평이나 분석이 조금이라도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 책이 그런 내용이야?”

우주의 질문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질이 나빠. 원작의 여러 대목에서 저자의 선입관을 들먹이며 ‘이건 젊은 여자가 썼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야.”

문득 우주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리면서도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작품 외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끌어들여 작품을 감상・평가하는 것과 작품 자체에서 작품 외적인 사실을 추론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시대적 사료가 희박한 고전 작품일수록 후자의 방법론은 문학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적용된다.

전자의 경우도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비유’는 적절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달은 무기적이고 타자적인 자연 현상이지만, 작품은 오롯이 작가의 손에서 유기적인 작업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작품만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논제는 타당하지만, 작품과 작가가 서로의 맥락에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젊은 여자가 작가’란 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소녀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요컨대 소녀는 ‘작품만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존재로부터 완벽히 중립적인 작품은 없다. 더군다나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졌다. 언어는 수학 기호가 아닌 이상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고, 하나의 상징체계를 이룬다.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통해 소통한다는 건 달리 말하면 그러한 상징체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아무리 자신을 감추어도 독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를 읽어내는 현상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다.

“강우주 씨 덕분에 앞으로 여긴 못 오겠네.”

“그래, 네 똥 참 굵다…”

우주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한 가지 새삼 확인한 건 이 소녀는 과연 자존심이 강한 게 이해가 될 정도로 똑똑하면서도 자기 세계가 확고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인지 능력이 뛰어나도 자기주장, 자기 철학이 없으면 그저 성능 좋은 기계를 체내에 탑재한 것에 불과하다. 마음속의 커다란 그릇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그것이 세상에 등장하여 유행을 선도하고, 척도를 개편하고, 궁극적으로 패러다임을 새로 쓸 때,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제 아무리 천재라도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터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감의 원천은 다양할지언정 그를 받아들이는 수단은 공통된 상징체계이며, 그를 등장시키는 수단 역시 마찬가지다. 이윽고 그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고서야 천재의 활약은 시작된다. 이것이 천재와 비천재의 결정적인 차이다. 비천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존의 패러다임을 충실히 답습하는 것만으로 제 역량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친구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 우주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럼, 친구가 된 기념으로, 번호 찍어.”

“뭐어어!?”

소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주 씨, 꽃집에서 양귀비 같은 거 키우는 거 아니지? 정신감정이라도 받는 게 어때?”

“너 그러다 임자 만나는 날엔 정말 큰 코 다친다….”

우주는 이제 소녀의 폭력적인 언사는 적당히 흘려듣기로 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간 언젠가 마음이 꺾일 것이다. 단 이쪽도 눈높이를 맞춰줘야 할 것이다.

“하긴 친구끼리 키스 같은 거 안 하지,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 말을 들은 소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든 먼저 몸을 던져 낚은 것도, 집안에 들어와 들이댄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나 입술을 포개기 전까지 소녀는 우주에게 그 어떤 정서적 흥분도,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우주가 남자인 걸 알았지만 우주에게서 남자를 느끼진 않았다.

그러나 까치발을 하고 입을 맞추는 순간, 소녀는 생전 처음 느끼는 기분에 휩싸였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입술부터 시작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말초 신경의 모든 첨단까지 한 줄기 전류가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직후 괜히 어설프게 유혹한 것도 태연한 척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 이후 더 이상 안 볼 줄 알았는데 무슨 인연인지 계속 마주치게 되었다. 말을 섞다 보니 점차 허물이 없어졌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첫 만남부터 얼마나 대담한 짓을 했는지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다.

“그… 그건…!”

“안 됐지만 꼬마 아가씨, 우린 친구까지가 마지노선이야. 그 이상 넘어가면 내가 전과자가 되고, 애초에 너 같은 껌딱지는 내 취향이──”

‘찰싹!’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우주는 왼쪽 볼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소녀는 오른손을 치켜든 채 벌개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 질렀다.

“처음 봤을 때부터 혐오스럽고 싫었어! 지금은 열 배는 더 싫어!”

소녀는 그대로 등을 돌린 채 뛰어갔다. 소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우주는 팔베개를 한 채 바라보았다.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하지만 저러한 아집도 그 나잇대 작가 지망생이 가질 법한 순수함의 발로일 터이다. 우주는 젊은 날의 미주도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5     


달동네의 밤은 언제나 음산하리만치 조용하다. 마스터 업을 두 달 앞둔 시점부터 은비는 밤 9시 전에 퇴근하는 날이 없었다. 회사를 나와서는 사십 분 가까이 전철을 타야 집에서 도보로 이십 분 걸리는 역에 도착했다. 계단과 비탈길로 이루어진 이십 분을 거쳐야 비로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도는 보증금을 대줄 테니 회사 근처에 방을 얻길 권했지만 은비는 “판교 근처에서 방 구해서 살면 삼각김밥이랑 라면만 먹고 살아야 돼.”라며 사양했다. 연차는 얼마 안 될지언정 명색이 중견 게임회사의 부서장인 만큼 아무렴 삼각김밥이랑 라면만 먹어야 한다는 말은 오버였다. 그러나 은비는 기꺼이 편도 한 시간 통근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녀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한 치즈와 마카로니의 향기가 은비를 반겼다. 식탁에는 그라탕이 노릇노릇한 윤기를 발하며 부글거리고 있었다. 앞치마 차림의 일도가 유리잔에 주스를 따르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오렴.”

잠시 후 부녀는 식탁에 마주보고 앉았다. 척 봐도 고열량인 걸 알 수 있는 그라탕의 비주얼에 은비는 살짝 질린 기색을 보였다. 일도는 너스레를 떨었다.

“창작이란 게 어디 보통 힘든 일이니. 이 정돈 먹어야 버틴다.”

은비는 피식 웃으며 수저를 들어 그라탕을 푹 찍었다. 그대로 수저를 뜨자 주욱 늘어난 치즈에 옥수수와 마카로니가 대롱대롱 매달려 나왔다. 후후 불어서는 입 안에 넣고 씹자 옥수수와 마카로니의 톡톡 터지는 식감에 은비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일도는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이렇게 은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일도는 어김없이 야식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은비의 업무가 크런치 모드에 돌입하는 기간에는 일도는 은비를 기다리느라 저녁을 먹지 않다시피 했다.   

생활비의 기여도를 따지면 물론 은비가 7할은 내고 있다. 일이 없을 땐 집에서 책을 보며 유유자적하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어슬렁어슬렁 손님도 잘 안 오는 가게에 마실 가듯 출근하는 일도의 수입은 은비의 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생기면 일도는 우주보다 먼저 현장에 들어가서는 저녁에 우주를 먼저 퇴근시키고 자신은 그날 목표량을 다 채우고서야 집에 들어왔다. 일도의 ‘가족 밥상’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도가 은비에게 회사 근처에 방을 얻을 것을 권한 건 상당히 오랜 고민의 결과였다. 그리고 일도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은비는 “안 바쁠 땐 오히려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게 손해야” 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간 한정 잔업과 야근이라도 통근을 고집하려면 은비나 일도나 적잖이 수고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은비가 그럼에도 그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막차 끊기면 나도 방법 없어. 회사에서 자든 찜질방에서 자든 할게.”

은비의 말에 일도는 틈을 주지 않고 대꾸했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지 자는 곳이 아냐. 정 막차 끊기면 포터로 마중 나갈게.”

은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그라탕을 삼켰다. 은비가 기억하는 한 일도는 그 부분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어떤 미사여구와 명분을 들이대도 회사는 회사고 사원은 사원일 뿐이다. 회사 생활과 개인 생활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일상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는 게 일도의 신조였다. 일도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딸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중한 일상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지킬 수 있는 것임을, 그조차도 하루아침에 상실할 수 있는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이견은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선 있을 수 없었다.

“일은 어떠니? 이번에는 안 해본 거 하느라 꽤 힘들다며?”

일도는 빈 잔에 주스를 채우며 물었다. 은비는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상 이번 작품이 감독으로서 데뷔작이라 모르는 것투성이야. 게임 장르도 SF는 처음이라 콘셉트 잡는 것부터가 일이었어.”

은비가 음악 감독으로 승진하게 된 계기는 이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전임자의 갑작스러운 퇴사였다. 어디까지나 임시였지만 바통을 이어받아 사운드팀을 이끌어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무리한 공로로 은비는 그대로 정식으로 감독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은비의 팀은 신규 프로젝트에 배속되었다. SF 마니아층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태미수 작가의 소설 『별과 바다의 전쟁』을 원안으로 한 어드벤처 액션 게임 『버스터 걸즈』를 제작하는 기획이 통과되었는데, 총괄 프로듀서가 바로 전작까지 함께 한 사운드팀이 아닌 은비의 팀을 지목한 것이다.

“그 PD도 한국인 종특이랑은 거리가 있나 보다.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인데 전 파트를 3년차 이하의 신예들로 꾸렸다면서? 모험 좋아하면 회사 생활 편하게 하기 힘들텐데.”

“신예들 입장에선 밑져야 본전이니까. 성공하면 커리어가 되고 실패해도 PD 탓하면 끝이고.”

자신의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으면서도 책임에서 자유로운 처지가 되면 어떤 사람들은 해보고 싶던 시도를 죄다 하면서 열의에 불타고, 어떤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열심히 하는 시늉만 한다. 은비는 전자였다. 사무실에 작가의 전작들을 구비해 틈틈이 읽으며, 정규 회의 시간 외에도 총괄 디렉터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일도는 사 년 전 일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앳된 얼굴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던 은비가 입학만 하면 장학생 신분이 확정된 음대를 걷어차고 취직을 하겠다고 밝힌 날.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는 진로에 의아하게 여긴 일도가 집요하게 묻자,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은비는 “우주 오빠가 있으니까…” 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이 교제하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일도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는 차분히 말문을 떼었다.

“딱히 대학이 아까워서가 아니야. 우리 은비라면 뭘 하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 걸 아빠가 알지. 하지만 한 가지만 확인하마. 네 음악은 계속되는 거니?”

그러자 은비는 일도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사람과 대등하게 있기 위해서라도, 음악은 그치지 않아.”

얼마 후 은비는 판교 소재의 게임회사 제나두워크스에 내정되었고, 오늘에 이른다. 당시 일도는 여러 가지를 우려했지만 무엇보다도 은비의 열정이 우주와 같은 타인을 촉매로 유지되는 걸 안타까워했다. 만약 관계가 어긋난다면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에 흥미를 잃는 건 물론 갈 곳 잃은 정념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파괴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도가 간과한 것은 열정보다도 깊고 큰 사랑의 힘이었다. 설령 꿈을 잃고 열정을 잃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도 사랑으로 일깨워져 계속 살아가는 한 새로운 꿈과 열정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때와는 또 다른 열정이 깃든 은비의 눈동자를 보며 일도는 다짐했다. 그 사랑을 믿고, 자신이 믿는 바를 관철해 나가겠다고.     

  



귀갓길 밤하늘에는 아크투러스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대중목욕탕을 나온 소녀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별을 볼 일이 줄어든다는데 소녀는 오히려 요 근래 부쩍 별자리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돌덩이 내지 가스 덩어리일 뿐일 텐데 옛날부터 사람들은 몇 십, 몇 백 광년 떨어진 그것들을 보며 물리적인 이정표는 물론 정서적인 시상으로 삼기도 했다.

짐작컨대 별은 인간에게 우주 규모의 약속의 징표로 기능해 온 게 아닐까. 계절이 바뀌면 사라지지만 계절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실은 정작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별이고, 자전과 공전을 하는 지구 위의 인간이 ‘별이 사라졌다’고 착각해 왔을 뿐이다. 그러니 사실 별이 지키고 있는 약속을 사람이 전부 감당하지 못해온 셈이다.

사람이 평생을 투신해야 할 약속을 지켜내려면 얼마나 수없이 의지가 꺾이고, 그를 그보다 큰 정념으로 다시 환기해야 할까? 소녀로서는 아직은 도무지 그를 가늠할 수 없었다. 분명히 깨달은 게 있다면, 그러한 약속을 이행하는 자세는 날개가 녹는 것도 마다않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자가 아닌 별을 바라보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자의 그것이 더 적절하다는 사실이다.

소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네 달 전만 해도 나이에 걸맞게 보드라웠던 피부는 하루 몇 시간씩 설거지를 하느라 까끌까끌해져 있었다. 특히 일을 하기 시작한 처음 한 달 동안은 근무 시간 내내 설거지만 했다. 여사장의 테스트였다. 처음 『티블리 안나』에 온 날, 여사장은 교복 차림으로 막무가내로 일을 시켜 달라는 소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부모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제시하는 테스트를 통과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집에서 주방 일을 돕는 수준이었던 소녀에게 식당의 설거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중노동이었다. 식기를 꼼꼼하게 닦지 않으면 선임의 핀잔과 함께 되돌려졌고, 빠르게 닦지 않으면 다음 타임에 쓸 분량이 모자랐다. 그렇게 하루 근무를 마치고 나면 몸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글을 쓰는 건 고사하고 이렇게 한 달을 버틸 수 있을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자신의 다짐을 접을 순 없었다. 그를 위해 집을 뛰쳐나왔으니까.

찜질방에서 자는 건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남녀 구분 없이 얇은 옷차림으로 매트 한 장 깔고 자는 공간은 아무래도 신경 쓰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비용을 생각하면 가성비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소녀는 그제야 새삼 주거 문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자 여사장은 ‘정말 버틸 줄 몰랐다’며 유니폼을 주었다. 부모의 동의를 받지 않은 미성년자라 4대 보험에 들어줄 수 없으니 자기 몸은 스스로 챙기란 말도 덧붙였다. 첫 월급을 받자마자 소녀는 텐트와 침낭을 샀다. 설치를 다 하고 나니 마치 자기 집이 생긴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여사장은 연락용으로 통화와 문자만 가능한 휴대폰도 개통해 주었다. 남은 음식을 가져가는 것도, 점내 세탁기로 옷을 빠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그녀의 호의로 소녀는 한 번에 의식주 문제를 급한 대로 해결할 수 있었다. 소녀는 신분도 보증되지 않은 자신에게 베풀어 준 여사장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고, 세 달 만에 어느 파트에서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녀는 잘 곳이 생겼고, 직장이 생겼다. 무엇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만의 시간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집과 학교를 두고 온 결과이기도 했다. 원체 학교에는 바보들밖에 없다고 소녀는 여겨 왔다. 아무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주보고 진지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굳이 자신이 이해해주는 것도 시간 낭비고 에너지 낭비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고독이 해결된 건 아니었고, 시간이 많아지고 자신의 내면을 마주할 기회가 늘자 그것은 칼날처럼 십대 소녀의 섬세한 마음을 저미었다. 소녀는 그를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렇게 비로소 소녀는 자신의 다짐을,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자신이 원하는 창작을 해 나가는 것.

물론 소녀는 자신이 매우 운이 좋은 경우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가출한 미성년자의 처지를 이용해 뼈 빠지게 부려먹거나 이상한 윤락 산업으로 꼬드기는 어른에게 걸렸다면 무슨 신변의 위협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집을 나오는 승부수를 던진 건 자신이다. 그에 대해서만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이런 그녀인 만큼 학교를 그만두고 각고의 노력 끝에 작가로 대성한 미주를 롤 모델로 여기는 건 당연했다. 동시에 그런 미주가 절필하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우주를 곱게 볼 수 없는 건 더더욱 그랬다.

‘그게 뭐하는 거야, 나잇살이나 먹고 아직도 엄마와 단둘이 살며 아르바이트나 다름없는 꽃집 일이나 하는 게.’

미주의 거취를 수소문하면서 알게 된 우주의 존재는 소녀의 눈에는 미주의 인생의 이물질처럼 느껴졌다. 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주변 이웃들은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는가 싶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그만뒀는지 유 씨네 꽃집에서 화분을 닦고 있는 거야. 그래도 아들이나 엄마나 그늘진 얼굴 한 번 보인 적 없는 걸 보면 행복한 것 아니겠어.” 라며 훈훈한 덕담을 했지만 소녀에겐 우주가 마치 젖을 떼지 못한 아이와 다름없게 느껴졌다.

멀리서 훔쳐본 메이 플라워의 우주는 정말로 속없어 보일 정도로 태평하고 맹했다. 오죽하면 등 뒤로 몰래 숨어들어가 씨앗을 슬쩍하는데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다. 퇴근길 길목에 엎드린 채 기절한 척을 하고 있자니 예상대로 오지랖을 발휘해서 집까지 편안하게 모셔 왔다.

그런 덩치 큰 얼간이로만 생각했는데, 미주와 이야기할 기회를 잡기 위한 기습 키스를 하는 순간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입술을 포개는 관습적이면서도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소녀는 작가로서의 열망보다 앞선 원초적인 여자로서의 감각을 일깨워 버린 것이다. 소녀는 생전 처음 접하는 감각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바로 다음 날 가게에 찾아온 우주와 맞닥뜨리자 소녀는 놀라움과 동시에 지난밤의 감각이 떠올라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사 기질이 충만한 소녀는 ‘코끼리 생각하지 않기’란 격언을 떠올리며 우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우주는 태연하게 그를 받아주었다. 소녀는 편할 리 없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우주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지배하던 낯선 감각도 희미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며칠 후 여사장이 그녀를 부르더니 손수 만든 커피와 다과를 들려주며 서둘러 택시에 태웠고, 택시에서 내리자 저번에 왔던 꽃집 사장이 나타나 그녀를 포터에 태웠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우주가 혼자 보고 있던 메이 플라워였고, 사장은 그녀를 내리자마자 포터를 끌고 도망가 버렸다. 단둘이 있게 되자 소녀는 다시금 예의 감각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와 되도록 떨어져 있기 위해 별 의미 없는 행동을 하며 가게 앞을 서성거렸지만 그의 반 강제적인 권유에 결국 글쓰기를 시도하는 그를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우주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는 단순히 맹하고 태평한 걸 넘어 속이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에서 몇 권의 서적을 읽은들, 그것이 그의 고유한 삶과 정신에서 재구축되지 못한 채 도구적 이성의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만고의 지식도 허무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 인간에게 삶의 궤적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소녀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우주를 보며 한심함보다는 연민을 느꼈다.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그는 틀림없이 무해하다. 그러니 남을 상처 입히는 짓 같은 건 도저히 못할 것이고, 거꾸로 누군가 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상처 주면서 상처 입히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삶의 방식이다. 그것이 어딘가에서 거세되어버렸다면, 그를 주도한 누군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펜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 백지 상태였던 그에게 서서히 선과 면, 명암과 색깔이 입혀짐을 소녀는 목도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관찰하는 우주의 눈빛에 소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곳에 맹하고 태평한 청년은 없었다. 대신 고고하면서도 확신에 찬 창작의 화신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림을 완성하자 우주는 다시 맹하고, 태평하고, 백지인 사람으로 돌아왔다.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어느 쪽이 진정한 그인가? 아니, 그보다도 자신은 왜 이 남자에게 이다지도 휘둘리고 있단 말인가? 그는 나잇값 못하는 한량일 뿐이다. 미주를 파트타임 근로자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소녀가 만난 미주는 우주를 보며 더없이 행복해했고, 후회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미주의 답은 온화하면서도 단호했다.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다시 나에게 그 순간이 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고,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똑같이 감사할 테니까요."


그 말을 하는 미주의 눈동자에는 부모의 초월적 사랑을 애써 부여잡는 인간적인 번민도,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자기기만도 티끌만큼도 없었다. 적어도 소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작가란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종이다.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유전자 단계에서 결정되는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미주 작가는 애당초 작가를 할 운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소녀는 그것만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우주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그가 자신 안에서 얼마나 큰 존재가 되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민일수도 있고, 경외일수도 있고, 호기심일수도 있고, 동질감일수도 있었다. 결단코 호감은 아닐 것이다. 호감 가는 짓을 해야 호감을 가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째서일까, 외로움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면서도 종종 사무치게 고독할 땐 그가 생각났다. 어떤 의미로든 그는 도처의 바보들하고는 결이 달랐다. 기가 찰 정도로 속이 텅 빈 것 같다가도 방심하다가는 무수한 상념의 폭풍에 빨려들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주야말로 소녀의 모든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초적인 갈증부터 궁극적인 단계의 갈증까지 말이다.

며칠 전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부끄러워서 도망친 게 소녀는 못내 후회되었다. 다시 만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하다못해 번호 교환이라도 해둘 걸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역시 부끄러워서 자기 입으로 먼저 묻는 건 못할 것 같았다.

‘위이잉-’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여사장뿐일 것이고, 그녀가 이런 시간에 전화한 적은 없었다. 폴더를 열어 보니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소녀는 두근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이 번호가 맞나 보네. 나 강우주 씨.

아는 목소리였다.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주에 대해 생각했을 뿐인데 그에게서 전화가 오다니, 우연 치고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안 거야?”

-티블리 안나에 전화했더니 너네 사장이 받더라고. 네가 우리 가게에 놓고 간 게 있다고 하니까 알려주던데?

“아니 잠깐…”

‘보통 그럴 땐 택배로 보내라든지 기회 있을 때 들러서 갖고 가겠다고 하지 않나’ 란 생각이 들었지만 여사장과 저쪽 사장이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소녀는 납득해버렸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우주가 굳이 이유를 만들어서 먼저 연락했다는 사실이었다.

“헤에, 거짓말까지 하면서 내 번호를 딴 거야? 대담하네.”

-거짓말 아니거든. 네 손수건 아직 나한테 있다고.

그러고 보니 그걸 아직 안 받았었다. 노점에서 헐값에 산거라 굳이 안 돌려줘도 되지만 소녀에겐 이러한 계기를 만들어 준 고마운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속마음을 애써 감추겠다고 소녀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 것 때문에 굳이 이 시간에 전화한 거야? 강우주 씨도 참 속없는 사람이네.”

-뭐어???

수화기 너머에서 우주가 기가 차다는 듯 대답했다. 소녀는 아차 싶었지만 머리에서 제동을 걸기도 전에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강우주 씨한테 줄 테니까 버리든 말든 알아서 해. 그럼 됐지?”

소녀는 말을 뱉어놓고는 절규하듯 머리를 감쌌다. 정말, 하늘이 복을 줘도 자기 발로 지평선 너머까지 날리는 꼴이었다. 이윽고 우주가 말했다.

-하아, 그럼 그냥 버린다. 불만 없지?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독설을 원망했다. 손수건을 빌미로 만날 약속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신나게 상대를 바보 취급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저쪽에서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녀의 외로움을 해갈해 줄 사람이 이렇게 없어지는 것이다.

소녀는 땅을 바라보며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공원 앞 횡단보도에 다다랐다. 시선 끝에서 참새 한 마리가 종종거리며 지나갔다.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그 고집은 자신을 위한 것도, 우주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해지지 못할 거였으면 적어도 미움 받을 짓, 그리고 후회할 짓을 자초하면 안 됐다. 아니다, 아직 기회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되돌릴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리고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깨닫자마자 행동할 때 가장 단축된다.

소녀는 폴더를 열고 통화목록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주가 전화를 받은 건 세 번 정도 발신음이 울린 후였다.

-…뭐야?

“이, 있잖아.”

소녀는 우주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할 말을 하나도 정리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이지… 음…”

소녀는 계속 뜸을 들이고 추임새를 넣으며 시간을 끌었다. 우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가 간신히 짜낸 말은 가관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어쨌든 내가 그날 다과도 가져오고 모델도 되어 줬는데 입 싹 씻는 거야?”

-…

“그래, 손수건까지 포함해서 나한테 뭔가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

“뭐야, 괜찮은 기회잖아? 현역 여고생과 비밀 친구 하는 건 모든 남자들의 로망 아냐?”

저번에 만났을 때 젊은 여자 운운 하는 소리 듣는 게 싫다고 한 게 누군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우주는 조용히,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그런 것 때문에 굳이 이 시간에 전화한 거야? 너도 참 속없는 사람이네.

“…”

소녀는 잠자코 있었다. 이제야 겨우, 소녀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시금 정리하고 있었다. 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소녀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 말 한마디를 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소녀는 이어서 말했다.

“손수건은 줄게. 아직 나를 친구로 여겨 준다면, 선물이야.”

휴대폰을 든 소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우주는 여전히 듣고만 있었다.

“나, 한 번 더 강우주 씨 그림을 보고 싶어. 내가 쓴 글도 보여주고 싶어. 친구끼리 하는 것들을… 하고 싶어.”

소녀의 목이 살짝 메어 있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자존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가장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줄줄이 말소리로 바뀌어 나왔다. 네 번의 만남과 한 번의 통화 끝에 소녀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우주의 선택이었다. 소녀는 귀에 휴대폰을 댄 채 가만히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이 소녀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이것이 우주의 대답이었다. 용서하는 말도, 힐난하는 말도 없었다. 소녀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렇게 소중한 인연이 떠나가는구나 생각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자신은 외면당했고, 외면당할 짓을 했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소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흐느꼈다.

얼마쯤 지났을까, 소녀는 머리 위에 무언가 폭 하고 얹히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려니 눈물이 차서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곧이어 무언가 쓱 하고 자신의 눈을 닦아 주자, 거기엔 우주가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장난도 못 치겠네, 정말…”       

   

6     


-아마 지금쯤 깜짝 놀라고 있을 걸?

수화기 너머 일도의 낄낄거리는 소리에 미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놀란 건 나라고. 지난 삼 년 간 우주가 이 시간에 집에 없던 적은 없단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전화해서 알려주고 있잖아.

방금 전, 퇴근한 미주는 집에 불이 꺼져 있는 걸 발견했다. 우주는 먼저 자는 일이 있어도 불을 끄진 않는다. 집 안에는 역시 우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미주는 황급히 일도에게 전화했고, 일도는 방금 막 여사장에게 들은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소녀가 퇴근하고 십 분이 지나, 우주가 티블리 안나에 전화를 걸었다. 소녀를 찾는 이유를 듣자마자 여사장은 그가 일도가 말한 청년임을 알았다. 일도의 부탁으로 저번에 소녀를 단둘이 있게 하긴 했지만, 여사장은 한 번쯤 이 강우주라는 청년과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직원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소녀는 어른이 보기엔 미성숙한 어린 아이이자 보호의 대상이었다. 최소한의 분별력과 절제력도 없는 성인 남성이 곁에 있으면 안 되었다.

-용건은 알겠어요. 근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우주 군?

우주는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이내 일도의 얼굴이 떠올라 납득했다.

“무슨 일이죠, 사장님?”

-그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이건 또 꽤나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우주는 직감적으로 이 질문엔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자신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는 정체 모를 여고생이자 미주의 사생팬이었다. 거기다가 자신 때문에 미주가 절필했다며 대놓고 혐오를 드러냈다. 질 나쁜 에피고넨의 극단적 사례라 해도 무방했다.

바로 다음 날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메이드를 방불케 하는 귀여운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냥 용돈벌이 아르바이트라 생각했는데 밖에서 조경 작업을 하는 사이사이 볼 때마다 그녀는 혼자서 일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치우고, 계산을 하고, 음식을 나르고, 손님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고… 같은 제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근무 중 절반은 딴 짓을 할 때도 그녀는 묵묵히 혼자 일했다.

“정말이지 요령 없고 서투른 어린애지요.”

요령이 없으니 당연히 여유도 없을 것이다. 툭하면 겉돌기 쉬웠을 것이다. 조금 부족한 정도였을 타인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중도의 무관심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또래 여자아이가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신체성도, 언어도 그녀는 잊어버렸다. 자신을 철통같이 지켜야 상처받지 않기 때문에 말수가 적어진 만큼 배타성은 늘어났다.

“좀 힘 좀 빼고 살았으면 하고요.”

한 번쯤 아무 것도 안 하고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가게에 가면 일만 할 테고, 집에 가면 글만 쓸 테니,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 붙들어 놓았다. 그날 우주가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 건 당연했다. 가장 인상적인 사건, 유일하게 뚜렷하게 각인된 사태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자신의 손은 그녀가 있는 풍경을 필사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뇌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마치 본능이 시키듯 펜을 쥔 그의 손은 움직였고, 그가 펜을 내려놓을 때까지 오랜 통증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애를 생각하다 보니, 걔가 시야에 없을 때도 떠올리게 되었고요.”

틀림없이 그녀는 우주의 뮤즈이자 마돈나였다. 만날 때마다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재기와 활기를 우주는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아직은 꽃봉오리에 불과하지만 햇빛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이윽고 화사하게 필 것이다. 돕는다든지 돌보고 싶다든지 하는 마음이라면 주제넘은 참견이겠고 꿋꿋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실례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개화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적어도 옆에서 끝까지 지켜봐주고 싶어요.”

여사장은 묵묵히 우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우주가 소녀에게 가진 감정의 정체는 적어도 그녀를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건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뚜렷하거나 적극적인 호감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책임감이 옅은 관심’에 가까웠다. 적어도 여사장이 느낀 바는 그랬다.

여사장은 미소를 지었다. 딱 그 정도가 그녀가 우주에게 기대하던 태도였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타인에게 강한 책임감을 발휘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믿을 수 없다. 무슨 자격으로, 무슨 배짱으로 타인의 삶에 그리 간단히 관여할 수 있겠는가.     




우주는 소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걸어오던 맞은편을 향해 걸었다. 굳이 손을 잡을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면, 옆에 가는 여자가 수시로 자신의 손을 힐끗힐끗 보는데 그에 응해 주지 않는 것도 신사가 할 짓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소녀는 말없이, 홍조를 띤 얼굴로 우주와 발걸음을 맞추었다. 우주가 소녀를 만난 이후 제일 조용하면서도 평온한 순간이었다.

둘은 편의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샀다. 미네랄워터 500ml 두 병과 스프링노트 두 권 그리고 볼펜 두 자루. 지갑을 꺼내려는 우주를 소녀가 제지하고는 교복 주머니에서 체크카드를 꺼냈다. 가게를 나온 두 사람은 이윽고 모텔과 술집이 즐비한 유흥가로 들어갔다.

제일 가까운 모텔에 들어설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었다. “방 하나요.” 우주는 주머니에서 오만 원 지폐 한 장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직원은 우주와 소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말없이 호실 카드키를 내밀었다.

방에 들어서자 우주는 침대에 편의점 봉지를 던져놓고는 “나 먼저 씻는다”는 말과 함께 샤워실로 들어갔다. 소녀와 길에서 만난 순간부터 우주의 머릿속 제일 큰 욕구는 그거였다. 오해하지 말자. 소녀와 모텔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샤워를 하고 싶었다.

친절하게도 여사장은 소녀의 전화번호뿐 아니라 통화 당시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소녀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에게 준 휴대폰에 GPS를 달아 놓은 것이었다. 밤 9시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는 여사장의 가게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공중 목욕탕이었다. 그러나 삼십 분 후 우주가 도착했을 땐 이미 소녀가 목욕을 마친 후였다. 우주는 다시 여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녀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그리고는 소녀에게 전화를 걸며 다른 길로 앞지르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그렇게 소녀가 직선으로 30분을 걸어온 거리를 우회하며 5분 만에 뛰어가 앞지른 것이다. 이렇게 전력을 다해 뛴 게 얼마만인지 우주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찬물을 끼얹으며 씻고 난 후에야 우주는 자신이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샤워실을 나가면 전라 상태로 소녀와 맞닥뜨릴 것이었다. 그러나 땀으로 흥건한 옷을 다시 입을 순 없었다. 우주는 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했다.

“있잖아, 혹시 갈아입을 거 있나 좀 찾아봐줄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소녀의 왔다갔다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뒤이어 무언가가 바닥에 폭 하고 놓이는 소리가 났다. 5초 정도 세고 문을 열어 조심스레 팔을 뻗어 끌어와 보니, 흰색 목욕 가운이었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소녀가 속옷 차림으로 등을 돌린 채 가운을 입는 모습이 보였다. 우주는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마저 가운을 걸쳤다. 우주가 조심스럽게 돌아보자 이미 소녀는 침대에 앉아 공책의 포장을 뜯고 있었다. 우주는 말없이 의자를 가져와 탁자 앞에 앉아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볼펜을 입에 물고 있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우주를 마주보았다.

“왜?”

“아니, 괜찮나 해서…”

쉴 곳을 찾아 무작정 소녀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지만, 그 와중에 소녀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잡힌 손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울음은 진작 그쳤지만 표정에 생기는 없었다. 태도가 순순해진 건 우주 입장에서는 일단 편했지만, 너무나도 극적인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강우주 씨도 빨리 시작해. 그러려고 들어온 거 아냐?”

“아니, 난 그냥 쉬러 들어온 건데…”

말투를 보니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다. 소녀는 뭐라 할 새도 없이 다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침대를 선점당한 이상 옆에서 자려고 해도 신경 쓰여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할 것이다. 우주는 단념하고는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는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십대 여자아이가 무릎에 베개를 받치고 글을 쓰는 모습은 설정 사진이 아니고서야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뭔가 아쉬웠다. 좀 더 무언가를 바꾸면 그의 마음에 딱 드는 비일상의 정경이 보일 것 같았다.

“뭐 도와줄 거 있어?”

소녀가 고개를 들자 윤기 나는 머리칼이 사르르 하고 볼을 타고 어깨로 떨어졌다. 우주의 머릿속에 별안간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일으켜 소녀에게 다가간 우주는 그녀의 머리칼을 양 손으로 쥐어 귀 뒤로 넘겼다. 매끄러운 곡선의 귀와 귀밑머리가 드러난 소녀의 속살은 뽀얀 두부 같았다. 이윽고 김칫국물이 묻은 두부처럼 소녀의 살갗은 붉어졌다.

“도와줄 게 있어.”

우주는 그대로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녀는 홍조를 띤 채 차마 우주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주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머리 묶어줘. 트윈테일로.”

키스라고 하려는 줄 알고 눈을 감을 뻔했다가 돌아온 뜻밖의 대답에 소녀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우주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소녀는 한숨을 푹 쉬고는 벗어놓은 교복 상의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뭐 이런 남자를…’ 하는 생각과 함께 소녀는 팔을 들어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펜을 쥐고 집필에 몰두했다.

헐거운 가운을 입고 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느라 양 어깨가 드러난 걸 소녀는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덩달아 내려간 앞섬의 곡선을 따라 소녀의 쇄골과 희미한 능선이 드러났다. 우주는 곧바로 펜을 들어 그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종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뛰어난 화가는 흑백의 묘사만으로도 얼마든지 총천연색 실사보다 더 농염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그려내는 법이다. 한숨을 돌리던 소녀가 자신의 꼴을 확인하고 우주의 그림을 뺏어들고는 또 다시 유치한 몸싸움을 하기 두 시간 전의 일이었다.     




-우주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밖에서 잘 자고 들어오지 않겠어?

수화기 너머에서 일도는 낄낄거렸다. 미주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아무 예고도 없이, 전화 한 통 없이! 밖에서 자는 게 잘 하는 게 아니잖아…! 넌 뻔히 알면서 그걸 방치한 거야?”

내일 모레 서른이라고 해도 자기 자식의 일이었다. 그걸 감안해도 미주의 걱정은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부모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일도는 짓궂은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걱정해야 할 건 우주보단 같이 있는 여자애가 아닐까?

“…너 그게 무슨 의미야?”

-선배가 생각하는 의미.

미주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자신을 동경해서 집까지 수소문해서 찾아올 정도면, 자신에게 걱정을 끼칠 만할 일은 섣불리 안 할 거라 믿고 싶지만, 남녀 간의 일은 정말이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미주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뿐이야, 그 뒤의 일은 모두 두 사람의 선택이고. 그리고 난 걔네들이 알아서 잘 해나갈 거라 믿어.

“말은 잘 하네, 상황을 이렇게까지 이끌어 놓고 이제 와서 보기만 하겠다는 거야?”

-지켜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든. 늘 꼿꼿이 서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 만일의 경우에 버팀목이 되어 줄 수도 있고.

미주는 우주에 대한 걱정으로 두통이 오는 한편, 넉살 좋게 말하는 일도에게서 익숙한 듬직함을 느꼈다. 아무 타산도, 보험도 없이 그저 주변인들을 묵묵히 지지하는 나무와도 같은 든든함이 언제나 바로 옆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야말로 세상에서 우주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인 그녀 자신보다도 더욱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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