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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hoo Kim Aug 28. 2023

사랑, 때때로 구원

봄 (2)



7


“안녕히 가세요!”

소녀는 문을 나서는 커플의 등 뒤에 대고 인사했다. 티블리 안나의 수요일 런치 타임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오후 2시, 휴식 시간 한 시간 전. 방금 나간 손님이 오늘 개점하고 일곱 번째 팀이었다. 평일 점심시간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정직원이 아닌 홀 담당 아르바이트생을 이 시간대에 배치하는 일은 어지간해선 없다.

처음에 여사장은 소녀를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마찬가지로 평일 저녁이나 주말 점심시간에만 배치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로부터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소녀가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힘든 업무는 소녀에게만 몰고, 사물함에서 가방을 꺼내 칼로 찢고, 교복을 변기 물탱크에 숨기고…

여사장의 대처는 단호했다. 확실하게 물증이 걸린 아르바이트생들은 즉각 해고하고, 심증이 있는 동 시간대 아르바이트생들은 소녀와 같이 근무를 못 서게 했다. 그 여파로 정직원 몇 명의 근무가 조정되어 저녁 시간에 배치되고, 소녀는 낮 근무를 설 일이 많아졌다. 여사장은 소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될 거야. 여기가 시내에서 떨어진 데라 아르바이트생 모집이 수월하지는 않으니까, 당분간 이런 식으로 근무하게 될 거야. 다른 직원들이 좋게 안 볼 수 있어. 힘내렴.”

아르바이트생 모집이 수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쉬쉬하지 않고 강경한 대처를 한 여사장 덕에 소녀에게 노골적인 악의를 품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노골적으로는 말이다. 하루아침에 근무 시간이 바뀐 홀 담당 직원들은 시간 날 때마다 뒤에서 소녀의 욕을 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목소리가 작아!”

창가에 있던 제복 차림의 여자가 손에 걸레를 든 채 씩씩대며 걸어왔다. 그리고는 소녀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았다.

“가뜩이나 사람 없어서 썰렁한데 너라도 크게 해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여자는 키의 십분의 일은 차지할 법한 힐을 딱딱거리며 혀를 찼다. “하… 이게 아닌데…” 소녀는 작은 어깨와 어울리지 않게 팔뚝을 가릴 정도로 묵직한 눈앞의 가슴에 걸린 ‘지이재’라 쓰인 명함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목소리도 작고, 웃지도 않고! 접객 태도가 글러먹었어!”

“죄송합니다!”

소녀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음, 족히 H컵은 될 것이다. 아니, 더 되려나? 이재는 가슴부터 허리에 닿는 포니테일까지 부들거리고 있었다. 머리를 묶은 방울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소리 듣자는 게…”

“예, 거기 접객 못하는 알바생은 이쪽이나 도와줘요!”

주방에서 두건에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재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허두영, 나 교육 중인 거 안 보여? 어디서 알바생을 빼 가!”

“교육은 무슨, 생트집만 잡고 있으면서. 자, 여기 와서 튀김옷 묻히는 것 좀 도와줘. 홀은 이재 씨 혼자 보라고 하고.”
 “죽을래?”

“성급한 여자는 딱 질색이에요. 그런 식으로 하면 미움밖에 안 살걸요?”

두영이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하자 이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이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잠깐 도와주고 돌아올게요, 매니저님.”

“…빨리 와”

이재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사람 없어서 썰렁하긴, 목소리가 주방까지 쩌렁쩌렁 울리는데.”

두영은 재워 둔 돈가스용 고기의 랩을 벗기며 말했다. 소녀는 묵묵히 두영이 건네주는 고기에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튀김옷을 바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주방에서 일한 터라 능숙하게 손발이 맞았다.

“미안하다. 한 시간만 여유롭게 있으면 퇴근인데 붙들어서. 이재 씨는 서툴러서 맡기기 좀 그렇거든.”

“아니에요.”

“뭐, 서툰 건 너도 똑같지만.”

두영은 히히 하고 웃었다. 문제를 일으킨 아르바이트생들이 짤린 결정적인 계기는 현장을 찍은 이재의 사진이었다. 가해자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해 소녀를 낮 시간으로 옮긴 것도 이재였다. 두영에게서 낮 근무 때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이재는 아예 소녀와 똑같은 시간에 근무를 신청했다. 홀 매니저가 근무 때마다 붙어 있으니 도저히 소녀를 해코지할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한번 식사라도 권해 봐. 이재 씨 친구 없어서 비번 때 엄청 한가하거든.”

“그걸 어떻게 아세요?”

“심심해서 부를 때마다 거절한 적이 없거든. 시끄럽게 굴긴 하지만.”

‘네가 불러서 나간 거겠죠…’ 소녀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알고 그러는 거면 난봉꾼이 따로 없고, 자각을 못하는 거면 바보가 따로 없었다. 하루는 이재가 출근하는데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방울을 단 채 이재는 “어떤 멀대 자식이 이걸 주면서 ‘이재 씨는 키가 쥐방울만하니까 왕방울을 달고 다니면 더 커 보이지 않을까’라는 객소리를 지껄이더라고.”라 으르렁거렸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하루도 안 빼놓고 달고 다니고 있다.

소녀는 눈앞의 두영을 바라보았다. 올해 스물둘이 된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요리 실력도 완성되어 있었고, 직장 내에서 사교적이면서 눈치가 빨랐다. 이십대 초반에 조리장 승격을 앞둔 두영은 이재보다 나이도, 근속 연수도 적었지만 직장인으로서는 오히려 역전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직원들의 대시가 끊이지 않았고, 이는 이재의 자신감을 억누르는 데 일조했다.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이재로서는 그럼에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다. 우주에 대한 감정은 보다 깊고 근원적인 것이었다. ‘좋아한다’ ‘반했다’ 는 상투적인 어휘로 그 외연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는 소녀의 의지나 감정과 상관없이 그녀를 때로는 흥분시키고, 때로는 좌절시킨다. 애써 강한 척을 하면서도 결국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소녀는 어제에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친구가 되어 줘…라.’

누군가는 말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친구라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같이 노는 사람이 친구라고. 물론 누군가에겐 연인의 전 단계로서 서로 간을 보는 관계도 친구일 것이다. 그를 온갖 말과 글을 동원해 부정하는 사람일수록 자신들만은 그렇지 않다고 맹렬하게 자기기만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소녀에게 우주는 기꺼이 같은 목표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같이 놀면 즐거운 사람이었다. 연인이 될 가능성은… 감히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정념들에 앞서, 소녀는 지금 우주를 만나고 싶었다.




“솜씨가 좋아졌구나, 우주야.”

일도는 등받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우주에게 말했다. 우주는 대답하지 않고 장미 가시를 제거하는 일을 계속했다. 일도는 피식 웃고는 다시 독서에 집중했다. 가게 문은 두 시간 전에 닫았다. 잔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다면 일도는 자기가 남아서 했으면 했지 우주에게 떠넘기고 간 적은 없었다.

“역시 띠동갑은 좋지? 순진해서 길들이는 맛도 있고.”

“띠동갑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거 어머니 드리는 거라니까요!”

우주는 버럭 하고 소리쳤다가 이내 시선을 피하고는 침묵한 채 작업을 계속했다. 일도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누가 뭐래니? 네가 아까 전에 말해놓고 뭘 새삼스레 그러냐.”

이날 우주는 출근하자마자 일도의 “오, 로리콤 출근했냐?”를 시작으로 ‘여고생 킬러’ ‘롤이랑 어… 리니지?’ ‘저그는 7드론 우주는 칠드런’ 등등 뒤 없는 드립으로 쉴 새 없이 놀림 받았다. 처음에는 열심히 태클을 걸던 우주도 점심 이후로는 그냥 무시로 일관했다. 가게 문을 닫을 무렵, 미주에게 줄 장미 다발을 만들어 가겠다고 하자 일도는 “야, 요즘 꼬맹이들 메타는 미니멀리즘이야. 이제 보니 2프로 부족한 페도구만.” 라며 로리콤 드립의 끝을 찍었다.

우주 앞에는 어느새 육백 송이에 달하는 장미가 손질되어 있었다. “너 이번 달 장미 매상 거덜내려고 그러냐?” 일도가 살짝 질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우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우주는 미주의 출근 시간을 피해 늦게 집을 들어왔다. 거실에는 입사 이래 세 번 이상 쓴 적 없는 연차를 낸 미주가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쭈뼛거리며 ‘다녀왔습니다’ 하는 우주를 말없이 바라보던 미주는 이내 돌아서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다림질한 새 옷을 우주에게 건네주고 간밤에 땀에 전 셔츠와 팬티를 가져가면서도 미주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둘이서 아침을 먹고 우주가 출근하는 순간까지 미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싱숭생숭한데 눈치 없는 중년이 끈질기게 놀려대자 우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미주에게 용서를 빌 선물을 마련하는 겸사겸사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 장미 손질만한 게 없었다. 파묻힐 정도로 가져가면 미주가 알아서 회사 동료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우, 우주야. 장미꽃만 있으면 대조가 안 되잖니, 안개꽃도 좀 섞어서 묶으면…”

“필요 없어요. 오늘 장미 꽃잎으로 욕조 채워드릴 생각이거든요.”

“그만해! 한 송이씩 팔 물량도 없다고!”




6시가 되자 판교 제나두워크스 사옥에는 퇴근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깨를 두둑거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은비 앞에 가방을 든 팀원들이 모여 섰다. 제일 앞에 선 염색에 헤어밴드를 한 팀원이 말했다.

“감독님, 퇴근 안 하세요?”

은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전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수고들 했고 먼저 들어가세요.”

“그게 아니라…”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내린 팀원이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희 회식 안 한 지 오래돼서… 혹시 안 가시나 하고…”

은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법인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전 그럼 작업실 갈게요. 재밌게들 노세요.”

팀원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카드를 받아들고는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은비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앉아 있다가 책상 위의 식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가려던 그녀는 문 앞에서 키가 작은 남자와 맞닥뜨렸다.

“아, 감독님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

“네, PD님은 어쩐 일이세요?”

『버스터 걸즈』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신하난 PD는 늘 말쑥하게 양복을 빼입고 다녔다. 힐을 신은 은비와 눈높이가 비슷할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비율이 좋아 멀리서 보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의논할 게 있어요. 바쁘지 않으면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1층 커피숍에서.”

“네, 어차피 할 게 남아 있어서 괜찮아요.”

일주일에 두 번 꼴로 하난은 퇴근 시간에 맞춰 은비를 기다렸다가 이런 식으로 담소를 청했다. 사무실을 나온 둘은 나란히 로비를 걸었다. 캐주얼한 남방 내지 반팔 티 차림의 사원들 사이에서 까만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은 단연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개발사에 방문한 퍼블리셔 측 직원으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커피숍에 들어선 두 사람은 약속한 듯이 나뉘었다. 은비는 가장 구석자리에 가 앉았다. 하난은 카운터로 가 "토마토 주스 스몰 사이즈랑 카라멜 마키아토 뜨거운 거 라지 사이즈로 주세요." 하며 카드를 꺼냈다.

잠시 후 점장이 주스와 커피 그리고 과자 몇 개를 쟁반에 담아 왔다. "서비스입니다." "고맙습니다." 하난은 가볍게 목례하고는 쟁반을 들고 은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삼십 분만 쉬었다 일하자고요. 퇴근 없는 게 일상인 직군은 자기 휴식은 자기가 챙겨야 하지 않겠어요."

하난은 토마토 주스를 은비에게 건넸다. 은비는 살짝 주스를 입에 대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하난은 이어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곁눈질 안 하고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게 감독님 매력이지만요. 저는 그런 사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아주 좋아합니다."

"…PD님은 역시 솔직한 사람이군요."

"음? 뭐가요?"

하난은 대수롭지 않은 듯 뜨거운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내심 속이 타는 걸 감추려는 듯이.


십 분 전, 은비에게 제안을 하고자 외근에서 서둘러 복귀한 하난은 저쪽에서 은비네 사무실에서 본 적 있는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은비가 있을까 싶어 다가가려는 순간 누군가 하난의 어깨를 건드렸다.

"신 PD 복귀했어?"

"아, 고 감독. 이제 퇴근하는…"

"쉿."

프릴 드레스에 어깨에 숄을 걸친, 하난의 입사 동기 고빈우 프로그래밍2팀 감독은 입에 손가락을 대며 하난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잠자코 들어. 앞으로 일하는 데 참고하고."

하난은 영문도 모른 채 빈우와 마주보며 저 뒤에서 퇴근 카드를 찍는 은비네 팀원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들었다.

"와, 긴장했다. 눈치 없이 따라오면 어쩌나 했어."

염색한 머리를 헤어밴드로 묶은 여자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옆에 있던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넘긴 여자가 대꾸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일모레면 입사 5년차인데 그 정도 눈치도 없겠어?"

"하긴, 우리랑 동갑인데 감독 자리 달 정도면 바보는 아니겠지."

그러자 옆에 있던 투 사이드 업 머리의 교복 코스튬을 입은 여자가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어머, 그럼 감독님 스물넷이에요?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고졸 입사했으니까. 그때 우리 팀이 『스피릿 스트림』 프로젝트 참여한 지 딱 일 년 지났다고 했지?"

"고졸이라고요? 아니, 어디 예고라도 나왔대요?"

"아니, 인문계. 음악은 온전히 독학이래."

"와, 천재는 정말로 있구나."

"천재는 무슨. 회사 입장에서야 저런 사람 한 명 뽑아놓으면 좋은 홍보 효과가 되겠다고 생각한 거지. 자기도 그걸 아니까 혼자 정장 입고 다니는 거고."

"그나저나 저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엄청 성숙한 분위기인데."

"야, 단발에 정장 하고 다니면 원래 나이 들어 보여!"

"그러니까! 실력이 없으니까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거지! 진짜 용 쓴다니까! "

팀원들은 깔깔거리며 문 밖으로 나갔다. 하난의 얼굴은 아까 전부터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빈우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저럴 시간 있으면 곡 하나라도 더 쓰든지. 유 감독 발끝에도 못 미치면서 말은 많아요."

"…"

"분명히 말해두는데, 그때 유 감독이랑 당시 장 감독 없었으면 스피릿 스트림은 좋은 소리 못 들었을 거야. 두 사람까지 손 놔버렸다면 개발 막바지에 외주 투입해서 사운드 작업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유 감독은 알아? 팀원들이 저렇게 생각하는 거?"

"글쎄. 알고도 태연한 건지,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 건지. 같이 일해 봐서 알겠지만 일 외에는 무서울 정도로 무관심한 친구니까."

빈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잘 해봐, 이래저래.” 빈우는 그 말과 함께 하난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혼자 남겨진 하난은 복잡한 표정으로 은비의 사무실로 갈 길을 재촉했다. 몇 번이고 태연함을 가장하는 연습을 하면서.


은비는 더 이상 마실 생각이 없는 듯 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하난은 냅킨으로 입가의 휘핑 크림을 닦고는 말문을 열었다.

“내일 저랑 같이 파주 좀 갈 수 있어요?”

“파주요?”

“네, 4시에 회사에서 출발해서 8시쯤 복귀할 거예요.”

하난은 쿠키 하나를 집어 한 입을 깨물었다.

“태미수 작가님 집이 파주에 있거든요. 만나서 진행 상황도 알려드리고, 설정 관련으로 이것저것 여쭙고, 향후 판권 문제 같은 것도 재검토하고요. 감독님은 옆에서 이야기만 들으셔도 되고, 질문이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은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태미수 작가는 단 한 번도 오프라인 인터뷰를 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SNS나 블로그는 물론 작품이 아니면 인터넷에 댓글 하나 안 쓸 정도로 폐쇄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었다. 프로젝트를 개시한 지 이 년이 지났지만 참여 인원 중 누구도 작가에 대한 소문 하나 듣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하난은 태미수 작가의 거주지를 알고 있고, 만날 약속까지 잡고 있었다.

물론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원작자와 연락이 안 되면 그것이 더 문제긴 하다. 그러나 지난 이 년 동안 하난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태미수 작가와 직접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작가님 쪽 담당자하고 유선으로 상의하고 있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권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난은 은비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작가님이 유 감독님 한 번 보고 싶다고 했어요. 『스피릿 스트림』을 감명 깊게 하셨다고. 그때 악곡 대부분을 만든 사람이 이번에 음악 감독으로 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저 혼자 만든 게 아닌걸요. 커팅이랑 믹싱은 장 감독님이 다 하셨어요.”

은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던 걸까. 하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도 좋은 생각이라 말씀드렸어요. 여기서만 말하는 거지만, 유 감독님 말고 다른 사람은 데려갈 견적도 안 나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뭐라고…”

하난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은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게임회사에 꿋꿋하게 정장 입고 다니는 사람이니까요.”

유명한 이야기지만 게임회사나 IT 업종은 기본적으로 자유 복장이다.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자기 일에만 몰두해 있기에 딱딱한 정장이 부담스럽다는 게 1차적인 이유고, 차차 창작자・개발자의 자유도를 보장한다는 상징성까지 덧붙여지게 된다.

제나두워크스는 한술 더 떠서 ‘일만 제대로 한다면 코스프레를 하고 와도 상관없다’는 방침이 있다. 그러다보니 매일 출근길에 성별과 직급을 막론하고 한두 명씩 마법소녀 복장이나 격투 게임 캐릭터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 사원을 볼 수 있다. 하난이 아까 본 은비네 막내 팀원의 아이돌 패션조차도 다른 게임회사였다면 바로 관리자의 지적이 들어올 사항이었다.

이러다보니 오히려 정장을 고집하는 하난이나 은비가 무리에서 두드러져 보이게 되었다. 보통 게임회사나 IT회사에서 어느 날 누가 갑자기 정장을 입고 다니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면접 보러 다니나 보다’라고 짐작한다. 재밌는 이야기다. 정작 입사 전까지는 정장을 입고 자신의 업계력을 있는 대로 끌어내 보이면서 입사하게 되면 당연하다는 듯 정장을 벗어던진다. 창작자・개발자의 자유를 입에 담으면서 말이다.

“회사에 출근하는 데 정장은 기본이니까요.”

“어허, 그럼 지금 사원의 9할 이상을 두고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얘기?”

“굳이 그런 이야기를 안 해도 되게 해 주는 게 정장이란 거니까요.”

은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난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정장은 회사이기에 유효한 갑옷이다. 복장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당연히 정장도 상관없다. 캐주얼한 복장은 물론 만화나 게임에서 튀어나올 법한 복장으로 점철된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정장은 의상 요소로서의 독자성과 ‘회사와 같은 공적 공간에서 마땅한’ 당위성까지 갖춘 복장이다.

“유 감독님 실적과 실력이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녀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거예요. 뭐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을 땐 실제로 그러겠지만.”

“그건 PD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조용히 웃었다. 누군가 말했다. 자긴 ‘천재’ 소리 들으면 굳이 정정하지 않고 내버려둔다고. 그러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녀도 ‘천재니까’ 라며 용인해 준다고. 그러나 그들도 여지없이 뒤에서 무수히 노력하고 실패를 거듭하기는 매한가지다. 어중간한 데서 손을 놓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들의 성공만을 두고 체념하거나 시기한다. 그렇기에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결과로 스스로를 증명할 수밖에 없다. 정체되고 추락하는 순간 기다렸던 듯 냉소와 조소가 그들을 휩쓸 테니까.

“…는 사실 옷 고르기 귀찮아서 입고 다녀요!”

은비는 살짝 혀를 내밀며 말했다. 하난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저도 키 커버하려고 입고 다녀요.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도 키가 작으면 난쟁이 똥자루밖에 안 되거든요.”

짐짓 자유로이 물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오리는 수면 아래서 열심히 다리를 움직인다. 그러나 물을 벗어난 오리는 예외 없이 뒤뚱거리며 흙을 묻히고 다닌다. 그 가운데서 백조가 오리 흉내를 내 봤자 그 기품과 자태는 완전히 숨길 수 없다. 물 위에 있든, 흙을 뒤집어썼든 말이다.


8


테마전 《빛과 어둠으로부터의 초대》가 열리고 있는 회장은 인적이 드물었다. LED등의 불빛을 반사하는 하얀 대리석은 하얀색 벽과 어우러져 비일상적인 정취를 발하고 있었다. 반면 전시물들은 암실에 놓인 채 주먹만 한 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한 발짝 앞서 가던 소녀는 우주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주 씨네 사장이 표를 줬다고 했지? 이거 그냥 땡처리한 거 아냐?”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우주는 늘 그렇듯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적당히 대꾸했다. 그날 우주가 손질한 장미 764송이(소매가 약 170만원 상당)를 포터에 실어 주며 일도는 전시회 티켓 두 장을 건넸다. “친구네 후배들이 출품한다는데 사람이 여간 없는 게 아니란다. 한번 권해서 관람객 수라도 채워 주고 와라.” 그리고 오늘 와 보니 과연 사람이 없을 만 했다. 그래도 소녀는 나름 열심히 창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같이 밤을 보낸 지 일주일 만에 전화했더니 소녀는 “왜 바로 다음 날 전화 안 한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스워?” 하며 쏘아붙였다. 우주가 적당히 사과하며 전시회에 같이 가자고 권하자 소녀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흠, 흠! 뭐 친구끼리 그런 데 같이 가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아니지! 전시회 좋네! 우주 씨 센스 좋네!”

마치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말이 길어지는 전화 너머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우주는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저 앞에서 소녀가 우주를 향해 손짓했다. 우주가 다가가자 소녀는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창문이 2m 높이에 나 있었다. 소녀의 발치에는 40cm쯤 되어 보이는 책장용 발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쯤 되면 약 올리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되는데.”

“지나친 생각이겠지… 이건 그냥 넘어가자. 여태까지 다 봤잖아.”

“앉아 봐. 올라타게.”

우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가 요즘 많이 피곤한가 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방금 들었는데.”

“우주 씨 어깨에 올라타서 보겠다고.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얘, 하다못해 등에 업히는 거로 하자. 나 목뼈 부러뜨릴 일 있냐?”

“싫어. 등에 가슴 닿으면 이상한 생각 할 거 아냐.”

“…”

우주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팔짱을 끼고는 소녀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정말… 우주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방금 전의 침묵은 무슨 의미야? 괜찮으니까 말해 볼래?”

“자, 목마 타자! 까짓 거 목뼈 한 번 부러지지 두 번 부러질까! 어서, 어서!”

“그래, 나 작다! 가슴 작은 년들은 수치심도 없는 줄 아냐? 이 나쁜 자식아!”

등을 팡팡 때리는 소녀의 주먹질에 아파온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우주는 먼 옛날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본 대사를 마음속으로 읊었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결국 우주의 제안대로 소녀는 등에 업혔다. 대신 왼손으로는 소녀의 둔부를 지탱한 채, 오른손은 벽을 짚고 상체를 굽혔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업고서 집에 데려갔었다. 그때도 깨어 있었으니 가슴이 등에 닿는 건 처음 겪는 일도 아닐 터이다. 그렇게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던 소녀가 지금은 팔을 꼿꼿이 편 채 어떻게든 몸이 안 닿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앞으로 한 발짝 더 가! 머리를 벽에 대다시피 하라고!”

정정한다. 지금도 뻔뻔하긴 마찬가지다. 영문 모를 수줍음이 한 스푼 추가되었을 뿐이다. 우주는 시키는 대로 하얀 벽에 정수리를 대다시피 했다. 소녀는 살짝 상체를 굽혀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뭐가 있는데? 난 안 보이니까 한번 설명해 봐.”

우주는 왼손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말했다. 소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 과연 높이 설치한 건 나름의 연령고지인가. 엄청 야해.”

“?”

“조각상인데, 겁나 리얼해. 남자랑 여자가 69하고 있어. 와, 남자 가슴팍 찌찌파티 대단하다. 여자도 최소 G컵은 되겠는데?”

“뭐야, 그럴 리가 없잖아!”

우주는 황급히 소녀를 내려놓고는 받침대를 딛고 올라갔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창문을 곁눈질하듯 들여다보았다. 어둠 너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형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신의 상상력이 곧 작품이 되리라───’

“에이 씨!”

“꺄하하하하하으아으아아이허 안 하?”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내려온 우주는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소녀의 양 볼을 꼬집었다. 소녀는 우주의 정강이를 발로 차며 저항했다. 두 바보는 그렇게 1분간 실랑이를 하다가 지쳐서 주저앉았다. 정강이를 어루만지며 우주가 중얼거렸다.

“누가 구상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악질적이네. 근데 그걸 보고 바로 그런 생각을 떠올린 너도 보통은 아니다.”

소녀는 볼을 어루만지며 툭 내뱉었다.

“우주 씨가 먼저 봤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뭐?”

“우주 씨는 볼 수 있었는데 그냥 지나가려고 한 거고, 나는 우주 씨 도움을 받아서라도 본 거고. 둘의 차이는 그것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방금 말했잖아.”

소녀는 일어나서 엉덩이를 팡팡 털었다. 우주의 앞에 선 소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받침대가 없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라. 세상에는 알아야 하는 진실만 있는 건 아니니까.”


오던 길을 돌아가 화장실로 뛰어간 우주를 뒤로 한 채 소녀는 다음 전시실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6면이 검정색인 복도가 소녀를 맞이했다. 색이 바뀌는 걸 기점으로 조명은 자취를 감추었다. 복도 끝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새까만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빛이라곤 벽에 드문드문 보이는 눈 하나를 겨우 갖다 댈 정도로 작은 푸르스름한 액정뿐이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액정 너머의 작품을 감상하는 구조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소녀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벽면의 푸른 불빛을 빠짐없이 들여다보며 나아갔다. 어둠이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 전시실은 한없이 고요했다. 숨을 죽인 채 네 번째 작품을 들여다 본 소녀가 이윽고 다음 불빛으로 넘어가려고 몸을 돌리자 별안간 안면부에 꽁 하는 충격이 전해졌다.

“아으!”

머리 위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소녀는 벽 쪽으로 바짝 붙어 걸어갔다. 목소리의 주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인기척이 한 발짝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콘셉트가 그렇다지만 정말이지 이용자의 편의나 안전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은 전시였다.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실을 다 돌고 나오자 우주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뭐 영감이라도 얻었어?”

“혹을 얻을 뻔했어.”

“고생 많았어.”

우주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손을 가볍게 쳐 내며 물었다.

“안 들어갔다 올 거야?”

“굳이? 반응을 보아하니 영 시원찮았던 모양이고.”

“그건 내가 그랬단 거지, 우주 씨도 그럴 거란 얘기는 아니잖아.”

“너한텐 못 미치더라도 나한테도 미적 감각은 있어. 앞의 전시실의 답 없는 상황을 보면 얼추 예상은 된다고.”

우주는 출구 쪽으로 뒤돌아섰다. 소녀는 우주의 옆에 나란히 섰다.

“아까 했던 얘기 벌써 잊었어?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그럼 이번에도 상상력을 발휘해 주면 되잖아. 어둠 속에서 용이 SUV에 박기라도 하든?”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잠시 후, 은비는 아무도 없는 전시실로 걸어 나왔다. 온통 새하얀 방에서 홀로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은 어느 특별한 성 정체성을 지닌 형제의 대표작을 연상케 했다. 우주와 소녀가 사라져간 쪽을 은비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늘 두 사람이 오리라는 것을 일도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간밤에 은비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일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본적으로 집 안에서는 담배를 안 피우는 일도가 이럴 때면 아주 드물게 난처한 얘기가 나오곤 했다.

“아빠는… 너하고 우주를… 자유롭게 해 주기로 했다…”

갑작스런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 하는 은비에게 일도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우주와 소녀가 조우한 일, 이후 우연과 타의를 통해 몇 번이고 마주친 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일까지 전부. 모든 사실을 들은 은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일도는 이어서 말했다.

“너에게 우주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도 그랬단다. 하지만 더 이상 우주가 너를 예전처럼 여겨줄 수 없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야. 이 아빠를 얼마든지 원망하렴, 아무리 미움 받는다 해도 너희들만큼 아프진 않을 테니까.”

그러면서 일도는 전시회 티켓을 건넸다. “보내줄 각오가 되었다면…” 이란 말과 함께.

은비는 풀썩 주저앉았다. 참고 있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슬픈 물방울은 얼굴을 감싼 두 손 사이로 멈추지 않고 새어나왔다.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를 좋아했었다. 철이 들 무렵 호의는 호감이 되었고, 그가 남자임을 느꼈을 때는 이미 연정이 되어 있었다. 한결같은 마음이 마침내 통한 열아홉 살의 여름, 그와 함께하고자 분투한 이 년의 시간. 은비는 행복했던 그 시간을 떠올리며 지난 삼 년간 실연의 아픔을 버틸 수 있었다.

‘오빠가 있었기에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었어요…’

정신없이 오열하는 가운데 은비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것은 오랜 짝사랑이자 한때의 연인에 대한 진심어린 고백이자 건승을 기원하는 최선의 전별이었다.




일도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손깍지를 베고 누웠다. 꽃무늬 벽지로 도배한 천장은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듯 누리끼리했다. 스프링이 고장 난 침대는 몸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었다. 약속 장소와 마침 제일 가까이에 있어 들어간 모텔이라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대실 비용이 3만원도 안 되는 시점에서 의심을 했어야 했다.

“미안하군, 이런 곳에 몸을 눕게 해서.”

일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일도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여사장은 쿡 웃었다.

“자영업하는 사람이 여전히 계산은 못 하네요.”

“계산 못 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던 시절이 있었지.”

“이제 자랑스러워하진 않아도 여전히 고칠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요.”

여사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세 시간 전 일도는 여사장의 가게에 전화해 그녀를 찾았다. 개인적인 연락은 휴대폰을 통해 하던 일도의 뜻밖의 행동에 여사장은 내심 놀랐다. “일하는 중이면 휴대폰은 바로 연락이 안 될 테니까…” 라 말하는 일도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우울함이 잔뜩 느껴졌다.

“여자라면…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는지 알지?”

일도가 자신에게 그 말을 한 건 미주의 결혼식 날 이후 삼십 년 만이었다. 슬픔과 무력감에 빠진 자신에게 따귀라도 올려붙이며 화를 내 줄 것을 기대하던 일도의 도발에 당시 여사장은 따귀를 때리고는 입을 맞추며 일도의 셔츠 단추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것은 일도에게나 여사장에게나 처음으로 하는 섹스였다.

여사장은 한숨을 푹 쉬고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나와 있어요. 이 꽉 깨물고.” 삼십 년 만에 연인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곧바로 이곳으로 들어와 주인이 주는 카드키를 낚아채다시피 건네받아 입실, 짐승처럼 서로의 몸을 탐했다. 오랜만에 하는 정사인지라 두 사람은 입에서 소리가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두 시간 가까이 몸을 섞고 기진맥진해진 둘은 얌전히 누워서 여운을 즐겼다.

“또 다시 너한테 상처를 주는군.”

“그런 말할 필요 없어요. 내가 선택한 거니까.”

“난 네 호의를 이용하고 있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새삼 말할 것도 없어요.”

사랑이란 참으로 얄궂은 감정이다. 응답 받지 못함을 알면서도 상대의 주위를 맴돌고, 그와의 사소한 접점이라도 생기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큰 의미가 없는 그의 행동 하나,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그야말로 나 자신에 대한 지배권을 상대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우상 숭배와도 비슷한 양상이다.

음식점 세 개를 운영하며 아직도 30대 초반을 방불케 하는 미모로 종종 남자들의 구애를 받는 여사장이 홀아비에 겉늙고 몸에 흙 묻히는 일을 하며 수입도 변변찮은 일도에게 헌신하는 건 세간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일도의 진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 오래 전에 펜을 꺾었고, 그보다 오래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은 사람을 향해서 말이다.

우상은 동경하고 숭배하되 소유할 수는 없다. 물론 원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우상은 상대를 중심으로, 또는 ‘나’를 중심으로 존재를 기꺼이 동일시한다. 이때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가 된 양 만족감과 고양감에 휩싸이는 강렬한 감정을 체험한다. 그러나 순간순간 상대와 내가 엄연히 분리된 존재임을 깨달을 때마다 맹렬한 허무함과 상실감이 뒤따르게 된다.

은비와 우주는 연인도 아니며 이제는 소꿉친구도 아니다. 그저 이웃에 사는 직원과 고용주의 딸에 불과하다. 미주 역시 사돈이 될 뻔한 짝사랑에서 그저 짝사랑으로 돌아갔다. 실연당한 딸의 처지를 슬퍼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떳떳하게 미주를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 데 대해 일도는 극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일도는 말없이 그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사장은 자신에게 응석을 부리는 일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주의 결혼식 날, 일도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걸 깨닫고도 성실하게 옆을 지켰다. 일도를 위로하고자 처녀도 바쳤다. 그러나 다시 그가 웃는 일은 없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한결같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가시가 달린 장미였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떠났고, 이십여 년 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다.

그녀를 또 다시 이용하는, 자신을 한심한 놈이라 매도해 주길 진심으로 바라는 이 남자를 여사장은 기꺼이 품어주었다. 그가 자신의 양심 때문에 고통 받기를, 동시에 그녀를 통해 위안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며.


9


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제나두워크스 1층 커피숍은 몇몇 테이블을 제외하면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은비는 다소 빠른 걸음으로 들어서서는 점내를 둘러보았다.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정장 차림의 미인이 한 손을 들고는 빙긋 웃으며 이쪽을 보았다. 은비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여자가 앉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여자는 일어나서는 은비의 팔꿈치 언저리를 토닥거렸다.

“어서 와요, 바쁜 와중에 불러내서 미안해요.”

긴 생머리를 모아 끝을 묶고 상하의 백색 정장에 짙은 데니아의 스타킹을 신은 미주의 모습은 은비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 볼 때도 미주는 춘추남방에 청바지나 롱스커트 같은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은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미주의 정복 차림은 적어도 십 년은 되었다.

“잘 지내셨나요, 어머니.”

은비의 인사에 미주는 조용히 시선을 낮추어 마시고 있던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렸다. 여전히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는 건, 다른 호칭은 새삼 어색한 것도 있지만 그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음을 새삼 확인하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주는 손윗사람으로서 그나마 나은 처지였다. 호칭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나야 다를 바 없지요. 은비 양이 요즘 회사에서 고생이 많다고요.”

은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일도에게 우주가 그렇듯, 은비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미주는 성장 과정을 지켜봐 온 어른이었다. 일도의 오랜 인연이자 이웃에 사는 전업 작가인 여자 어른으로서 대소사를 함께 했으니 사실상 반쯤 엄마 역할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은비가 중학생이 되고, 미주 역시 작가를 그만두고 마트에서 일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지만 서로에 대한 애착은 여전했다.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는 사이 서로 격려하고 격려 받으며 오히려 더욱 애틋해졌다. 그래서였을까, 우주와 은비의 교제 사실을 밝혔을 때 일도는 별 말이 없었지만 미주는 탐탁지 않은 입장이었다.

“이모, 이모 하고 따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 참 빨리 가요, 그렇죠?”

은비는 대답이 없었다. 그날부터였다. 미주는 은비를 ‘은비 양’이라 부르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은비가 우주를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은비는 무조건 우주에게 시집 와야지, 너희들은 품절이야, 품절. 어디 다른 잘난 연놈이 상회입찰 같은 거 하게 못 둔다!” 하며 놀리곤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그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미주는 일도네 가족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카페 창밖에는 참새가 종종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미주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바깥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은비는 그런 미주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 테이블이 일 이야기, 동료 이야기 등으로 왁자지껄한 와중에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은 조용히 지난 이십여 년의 추억을 곱씹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었는지도 몰라요.”

침묵을 깬 건 미주였다. 미주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은비 양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 왔고, 그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그저 우주를 지탱해야한다는 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서, 미처 은비 양을 신경 쓰지 못했어요.”

“어머니…”

“우주는 정말로 운이 좋은 아이에요. 은비 양 같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미주의 말에 은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주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은비 양을 반대한 건 내 교만함 때문이었어요. 은비 양의 앞날을 가로막을 순 없다는 어른의 책임이라고 스스로 되뇌었지만, 그 이면에는 은비 양이 모든 걸 내던져서라도 우주와 함께할 수는 없을 거라 속단하던 나약한 어미가 있었던 거예요.”

“어머니, 저는…”

“은비 양은 사랑을 위해, 사랑을 통해 훌륭하게 성장했는데, 오히려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건 나였어요. 은비 양이 우주와 잘못되기라도 하면 두 사람을 동시에 잃어버릴 거란 생각을 한 거죠. 상처받고 싶지 않았을 뿐인 겁쟁이였어요.”

“어머니!”

은비가 말을 끊고는 미주의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저는 행복해요. 시간이 지나고, 겉모습이 바뀌어도, 여전히 어머니는, 우주 오빠는… 변함없이 상냥한 사람들이에요. 그 상냥함 속에 여전히 제가 있을 수 있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미주는 애틋한 눈빛으로 은비를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은비의 눈빛은 마치 ‘아무 말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기애 없는 상냥함이, 자기보신 없는 이타심이 오히려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상처 입히는 양날의 검임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소요된다. 아무리 머리로 알아도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찌됐든 세상에 혼재하며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있는 건 완전한 신의 사랑에 앞선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이다.




“두영 씨, 어떻게 생각해요?”

창고와 붙어 있는 대형 냉장고 앞, 여사장이 방금 막 수령한 키위 사십 박스를 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두영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발주한 양보다 많이 왔군요. 그것도 아주 많이.”

“앞으로 며칠이나 더 쓸 수 있죠?”

두영은 입을 살짝 틀어막으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글쎄요… 따고 나서 바로 냉장보관했다면 2주는 버티겠지만, 이건 바로 쓸 수 있게 후숙해 온 거니 1주… 출하일부터 계산하면 앞으로 약 5일 뒤에는 맛이 떨어질 겁니다.”

여사장은 ‘끄응’ 하고 신음했다. 두영은 팔을 걷어붙이며 여사장에게 말했다.

“일단 보관부터 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고, 못 팔면 잼이라도 만들어 보죠.”

“그래요. …아, 그리고 두영 씨. 저번에 얘기한 건 생각해 봤어요?”

“…죄송합니다. 조만간 확답을 드리겠습니다.”

여사장은 두영의 어깨를 토닥거리고는 “그럼 부조리장님, 뒷일 부탁해요.”라 남기고 사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형님들 까대기 할 시간입니다!”

두영이 외치며 나서자 주방에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잠시 후, 일사불란하게 키위 박스들이 냉장고에 쌓이는 걸 먼발치에서 보며 여사장은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당면한 발주 미스에 따른 과다 물량의 처치는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건 인사 차원의 뒷수습이었다.


디너 타임 한 시간 전, 즉 이재와 소녀가 교대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이재는 자기가 청소를 맡은 구역인 내부 테이블을 요령 있게 순식간에 끝내버렸다. 소녀는 야외 테라스 청소를 이제 겨우 반 정도 끝낸 상태였다. 소녀가 굼뜬 게 아니라 이재가 유별나게 빠를 뿐이다. 이재는 손을 풀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남았어? 저 끝에서부터 하면 돼?”

소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행주로 의자를 닦으며 말했다.

“얼마 안 남았어요. 먼저 옷 갈아입고 쉬고 계세요.”

“요즘 무리하는 거 아냐? 연장근무 같은 거나 신청하고. 너 어리다고 건강에 자만해선 안 돼.”

“전 괜찮아요.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이재는 뜨악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요즘 소녀가 변하긴 했다. 분위기도 밝아지고, 웃는 일이 많아졌다. 음습한 괴롭힘이 없어진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무언가가 더 있었다. 설마하니…

“너, 너 있잖아…”

이재가 흠, 흠 하며 헛기침을 하자 소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왠지 모르게 이재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 뭐…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있잖아…”

“매니저님,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사무실에 상비약 가져올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럼 당 떨어진 거 아니에요? 두영 오빠한테 가서 설탕물 좀 얻어올까요?”

“글쎄 아니라니까!”

이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리 질렀다. 소녀는 놀라서 행주를 든 채 굳어버렸다. 잠시 정적이 지나고 이재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주방은 내가 갈게. 빨리 청소 마무리나 하고 와. 쉬어도 같이 쉬어야지.”

뒤돌아서서 식당 문을 들어서며 “하아, 얘가 이럴 동안 난…” 하고 이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소녀는 듣지 못했다. 가끔 이재는 소녀가 볼 때 정서불안이 의심되는 언동을 보일 때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배려심이 좋은 사람이고, 전반적으로 실제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외관 때문인지 귀여운 여동생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서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 가슴은 반칙이지…’

이재가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메론 두 짝은 뒤에서 봐도 흉흉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 저녁은 과일과 채소류가 입고되는 날이다. 저번에 이재의 지시로 소녀가 발주서를 낸 물량이 오늘 도착했을 것이다. 지금 주방에 들어간 메론은 예외 물량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오늘 일도 끝났다…”

소녀는 허리를 두들기며 점내로 들어갔다. 주방 쪽에는 두영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연장근무라고 했다. 가까이 가 보니 팔짱을 끼고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들어간 이재가 필시 약이라도 올렸을 것이다.

“오빠.”

소녀가 들어서며 인사를 하자 두영은 고개를 돌려 끄덕거리고는 눈빛으로 소녀를 제지했다. 소녀는 어리둥절하며 두영이 보던 쪽을 바라보았다. 창고로 통하는 문이 닫혀 있었다. 문 너머로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1호점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내일부터 이쪽으로 돌리겠어요.

-본인이 납득 못할 겁니다. 열다섯 테이블, 그것도 커피랑 케이크만 서빙하던 애한테 갑자기 버스도 잘 안 다니는 곳으로 출퇴근에 두 배 규모 테이블에서 식사류까지 서빙하라고 하면 차라리 관두겠다고 할 겁니다.

-웃돈을 얹어서라도 설득할 거예요. 어차피 한동안 이쪽 지점엔 아르바이트생이 안 올 거예요. 이 방법밖에 없어요.

-사장님, 정말 괜찮습니다. 충원 안 해주셔도 돼요.

-괜찮지 않아요. 이재 씨 안색부터가 전보다 확연히 안 좋다고요. 저번 일로 아르바이트생들 여럿 자르고 또 남은 사람들 단속하느라 일이 몇 배로 늘어났잖아요. 이재 씨가 제 역할 하느라 그렇게 된 건데 내가 너무 신경을 못 썼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신중하게 처리했어야 하는데…

-물량에서 비롯된 적자는 금방 메꿀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을 잃으면 영영 메꿀 수 없어요.

얼핏 들어도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여사장의 결단에 이재가 한사코 만류하는 모양새, 무언가 원인이 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두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오늘부터 당분간 이재 씨랑 잔업해야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잔업을요?”

“어. 키위 서른여섯 박스 분을 잼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대로 버릴 순 없는 노릇 아니겠어?”

소녀는 순간 앗 하고 소리를 낼 뻔했다. 분명 열흘 전의 일이다. 오버워크 때문인지 이재가 38.9도의 발열을 일으켜 세 시간 일찍 조퇴했고, 발주 기한임을 기억해 낸 이재가 소녀를 시켜 자신의 계정으로 식당 주거래 사이트에서 대신 주문하게 했다. 물량은 품목 하나하나 이재가 직접 불러주었으니 문제없었을 터였다. 문제가 있다면 디너 타임이라 한창 바쁜 와중에 홀과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는 점이다.

키위 주문 물량은 분명 10kg 4박스. 그렇다면 경황없는 와중에 자리에서 일어설 때 0을 눌렀단 것이다. 그 때문에 일어난 재정적 손실은 공급처로부터의 신뢰도 하락, 보관과 가공에 소모되는 공간과 인력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다. 소녀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잠시 후 이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영의 옆에서 굳어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야, 나 오늘은 퇴근 못할 것 같아. 고생했고 어서 옷 갈아입고 퇴근해.”

“죄송합니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서 있던 두영은 팔짱을 끼고 무덤덤하게 쳐다보았다. 이재는 소녀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한숨을 푸욱 쉬며 말했다.

“갑자기 사과는 무슨, 일 잘해놓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그렇지만 주문을 잘못한 건…”

“조용.”

이재가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럴 때의 이재에게는 작은 체구와는 별개의 박력과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이재는 계속해서 말했다.

“주문을 잘못한 건 나야. 발주 담당자는 나고, 따라서 책임을 지는 것도 나야. 알겠어?”

소녀는 이재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도 같이 남을게요. 그렇게 하게 해 주세요.”

“뭐…?”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에요. 사람이 부족해지고, 매니저님이 무리해서 일하고, 그래서…”

“…어이 알바생. 알바 끝났으면 빨랑 가라, 이런다고 시간 외 수당 안 준다.”

목소리가 차분해진 이재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걸 소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안 끝났어요! 오히려 받은 돈을 뱉어내도 한참 부족해요!”

“…마지막 경고다. 옷 갈아입고 당장 나가.”

“제 잘못이니까 제가 책임지겠다는데 왜 막으시는 거예요! 그런 식의 배려는─”

“이게 오냐오냐 해주니까 주제넘게!”

이재가 별안간 소녀의 멱살을 쥐었다. 처음으로 보는 이재의 격노한 얼굴에 소녀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재의 손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잘 들어라, 이 핏덩이야. 너는 4대 보험 가입도 안 된 미성년자다. 당장 내일 너를 날려버려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우린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야. 네가 얼마나 일을 잘 하고 열심히 해왔냐는 아무런 참고사항도 안 돼!”

처음 듣는 이재의 험한 말에 소녀는 완전히 위축되었다. 이재는 소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업장의 입장만 따지면, 그래, 그 망할 년들을 눈감아주고 너를 내치는 게 백 배 나았지! 하지만 어른이라면, 사회인이라면 약자인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거고, 아르바이트생들을 관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이야! 사장님이나, 나나, 이런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을 것 같냐?”

“…”

“책임을 지고 싶으면 지금 질 수 있는 것들이나 열심히 져라. 어차피 싫어도 나이 먹으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날로 늘어날 테니까. 어른으로서, 인간으로서 말이다.”

잡고 있던 멱살을 놓고는 이재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창고로 향했다.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저 혼자 노력해서 자신의 있을 곳을 얻었다고 은연중에 생각해 왔는데,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감수한 배려가 있었음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아무 말 없던 두영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멋지지 않아? 역시 사장님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야.”

훌쩍이고 있는 소녀에게 두영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잠자코 눈가를 닦는 소녀의 옆에 서서는 두영은 말을 이었다.

“너 처음에 주방에서 한창 구를 때 이재 씨가 엄청나게 반대한 거 알아?”

“네?”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이유는 네가 요령 하나 안 피우고 일하다가 쓰러질까봐, 두 번째 이유는 방금 들었다시피 여차할 때 네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결국 네가 사장님의 테스트를 통과하고 정식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도, 너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같이 하고 있었어. 뭐 이젠 후자밖에 안 남은 것 같지만.”

“…”

“기꺼이 응석을 부려. 이재 씨도 어른 행세는 있는 대로 다 하는 주제에, 너한테 이미 많은 걸 의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거든.”

“그런가요…?”

“내가 아는 이재 씨는 아무리 아파도 조퇴는 안 하던 사람이야.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두영은 소녀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소녀는 얼굴을 정돈하고는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그날 온몸이 불덩이인 채로 업무를 마치고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이재를 억지로 끌어내서 택시를 불러 태워 보낼 때, 두영의 “이 친구를 트레이닝시킨 게 누군데. 좀 믿어보라고.”라는 말에 피식 하고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고는 그녀가 말하던 게 생각났다.

-아직 한참 멀었어. 그래도… 나쁘지 않아.

탈의실에 들어간 소녀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십대 후반의 여고생이 있었다. 몸은 성인에 준할 정도로 성장했을지언정, 마음은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이재에 비하면 여전히 무력한 어린아이임을 실감했다.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고,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느냐의 척도만으로는 잴 수 없는 어른의 역량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얼마나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사랑을 오롯이 실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메이 플라워』의 하루가 저물려 하고 있었다. 우주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서는 어디선가 날아온 참새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시나브로 황혼이 지는 비탈길은 언제나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선함과 싸늘함의 사이에 있던 저녁 날씨가 한층 포근해진 게 피부로 느껴졌다.

일도는 가게 안 의자에 앉아 그런 우주를 지켜보았다. 결국 일도가 획책한대로 우주와 소녀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우주로부터 처음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소녀를 직접 보았을 때, 일도는 한눈에 그녀의 비범함을 알아챘다. 단순히 외모나 재능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집을 수소문해 들이닥치는 물불 안 가리는 행동력, 마치 오래 전부터 우주를 알고 있는 것처럼 격의 없이 대하는 태도… 옆에서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소녀는 마치 운명이 점지한 듯 우주를 휘말리게 하고, 또 우주에게 휘말리고 있었다.

‘하기사, 나나 은비나 선배나 크게 다를 바 없지.’

부웅 하고 우주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자신에게 전화나 문자를 할 사람이라면 얼마 전까지는 일도나 미주밖에 없었다. 당장 일도는 눈앞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으니 절반의 확률로 미주일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한 사람밖에 없다. 우주는 휴대폰을 열었다.

<우주 씨가 보고 싶어.>

짧고도 절박한 내용이었다. 우주는 잠시도 지체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자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누가 전화해 달래? 문자로 답하라고 문자로!

“말은 잘 하네. 먼저 놀라게 한 게 누군데.”

-뭐 그렇게 놀랄 내용이었다고 그래! 친구끼리 그냥 독백하듯이 할 수 있는 말 아냐?

“친구라면 걱정해 주는 호의도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아.

순간 소녀의 짧게 토해내는 말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그를 깬 건 우주였다.

“그래서, 통화 곤란해? 문자로 할까?”

-아냐… 통화가 좋아.

“많이 발전했네. 친구로서 참으로 기쁘다.”

-치, 의기양양해져서는… 정말이지 남자란…

일도는 전화 너머의 상대와 투닥거리는 우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투쟁하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변모한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러한 양상은 보다 노골적이고 극단적이게 된다. 돌이켜보면 이미 서로 만나기 전의 자신은 더 이상 존재로서의 동일성을 느낄 수 없다. 적어도 자신에게 그는 그저 하나의 현상이었을 뿐이다.

과거와 현재의 인과관계를 아무리 연역적으로든 귀납적으로든 추론한들 명징한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과거를 통해 또 다른 현재(결과)를 상정할 수 있는 가짓수는 무한대지만, 현재가 세계에 단 하나 존재하는 우리의 차원에서 과거(원인)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역vice versa이 성립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나 많은 가능성을 품은 동일성을 느끼면서, 과거의 자신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마음의 경향성은 참으로 골계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서로를 몰랐던, 사랑하지 않았던 시간을 뒷전으로 하고 두 사람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제 사랑을 했던 자신을 치열하게 타자화하고 분리시킨다.

“웃기는 일이지?”

일도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인간의 자기보존을 위해 정신에 각인된 채 대대로 내려온 경향성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거칠게 말하면 행복을 위한 중요한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은 보편적인 부분에서 인간으로서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운명을 부정할 것이다.

어느새 일도의 옆에 방금 전 참새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피식 웃고는 가게로 들어간 일도는 물망초 씨앗을 들고 나와 참새 주변에 뿌렸다. 참새는 미동도 없이, 씨앗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10


주말 낮의 2호선은 예상보다 한산했다. 만원 전철에 시달리는 일도, 우연이든 필연이든 타인의 손길이 몸에 닿는 일도 없이, 은비는 합정역에 내렸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39분. 약속시간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는 애매했다. 은비는 지체 없이 택시 승강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흰 티 위에 베이지색 가디건의 앞섬을 단추 하나만 잠근 채 짙은 청바지로 마무리한 은비의 캐주얼한 복장은 회사에선 결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 승강장에 대기 손님이 없어 은비는 맨 앞 차의 문을 열고는 말했다.

“다산교 사거리까지 부탁드립니다.”

자리에 앉은 은비는 곧바로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홈 화면의 바로가기 아이콘을 눌러 ID와 비밀번호를 치자 곧바로 NAS에 연결되었다. 상단의 ‘태미수’ 폴더에 들어가자 3분대의 트랙 하나가 있었다. 은비는 가방에서 원목으로 하우징된 헤드셋을 꺼내 쓰고는 단자를 단말에 연결했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머리를 좌석에 기대자 사르르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에 작업했던 곡인데도 녹음을 위해 피아노로 연주할 때는 나름대로 긴장했다. 다 녹음하고 커팅까지 마친 뒤에는 담백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보다 더 큰 스케일의 BGM이나 보컬곡을 작업할 때는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례해 완성에 따른 성취감도 컸지만 불안함이나 아쉬움도 만만찮게 동반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불안함이나 아쉬움보단 묘한 기대감이 은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오른쪽으로는 다산교, 왼쪽으로는 파주출판도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은비는 다산교를 건너며 눈앞의 심학산과 양옆의 호수를 천천히 음미하였다. 콘크리트와 유리창으로 점철된 IT회사 건물들이 밀림을 이룬 판교에 비해 확연히 숨통이 트이는 경관이었다. 맞은편에 다다르기까지 삼 분 남짓밖에 즐길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은비 씨, 어서 와요!”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한 블록 너머에 카페가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계속 응시하던 플래티나 블론드의 여자가 서둘러 문을 열고 나와 은비를 맞았다. 배꼽이 드러나는 빨간 민소매 티를 입고 흰 남방을 대충 허리에 두른 옷차림은 출판 종사자들이 대부분인 이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은비가 까딱 목례하며 다가가자 여자는 선글라스를 치켜 올렸다. 마주서서 악수를 권한 손에 은비가 응하자 왼손으로 은비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파주까지 차 없이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흔쾌히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작가님이 알려주신 방법대로 왔더니 차로 올 때하고 별 차이 없이 편하게 왔어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은비 씨, 호칭.”

“아…”

은비가 황급히 입을 가리며 시선을 돌렸다. 미수는 후훗 하고 은비를 잡아끌었다. 저번에 하난과 동행한 미팅 때 두 사람은 통성명을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미수는 은비가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니었는지 미팅 자리에서도 하난을 제쳐 두고 이것저것 물어보아서 은비가 난처할 지경이었다. 이후 미수 쪽에서 수시로 문자를 보내고 은비가 응답하는 식으로 연락이 이어졌다. 오늘 약속도 주중에 문자를 주고받으며 한 것이었는데, 미수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원작자와 게임회사 직원의 관계를 떠나 친한 창작자 사이로 대할 것. 그리고 미수가 원한 호칭은 이거였다.

“어, 언니…?”

“그래요, 은비 씨. 갈까요? 예약 잡아놨어요.”

미수는 얼떨떨한 은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은비는 내심 혼란스러웠다. 저번에 셋이 만났을 때는 그래도 저 화사한 금발을 단정히 뒤로 묶고 뿔테 안경에 정장을 입었었다. 매너도 시종일관 완벽한 OL의 그것이었다. 사무실에서 일해 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었다.

오늘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다른 의미로 힘을 잔뜩 준 게 눈에 보였다. 뭐랄까, 본판이 예쁜 사람이 소재를 최대한 살리려고 신경 써서 가볍게 입은 모습? 문득 은비는 오늘 무슨 메뉴를 대접받을지 기대되었다. 미수는 은비를 이끌고 점점 골목 깊숙이 들어갔다.


“자, 사양 말고 먹어요!”

미수는 팔팔 끓고 있는 능이백숙의 다리 하나를 뜯어서 은비의 앞접시에 올려놓았다. 은비는 삐질 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미수는 그저 신이 나서 소주병의 뚜껑을 따며 냄비에서 올라오는 한방재와 닭 냄새를 만끽하고 있었다.

“귀~한 손님 데리고 옹께 제일 좋은 재료로 해 놓으라 캐싸서 누군가 캤드만… 니도 참 고약하데이 이년아.”

주방에서 휴대폰으로 고스톱을 치던 중년 여자가 욕지기와 함께 혀를 끌끌 찼다. 미수는 이에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나 보겠다고 성남에서 여기까지 온 동생이 그럼 귀한 손님이지, 천한 손년이야?”

“누가 츤하다캤나? 척 봐도 곱게 자란 규순디 이런 거 무가 되겠노?”

“언니, 모르는 소리 마세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데? 미리미리 안 먹어 두면 나중에 골병들고 후회한다?”

“니 잘났다 이 종간나 가시내야! 글밥 무꼬 산다꼬 아주 말 한 터럭을 안 지는 거 보소.”

중년 여자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다시 휴대폰 화면에 몰두했다. 미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냄비로 몸을 돌려 자기 몫을 펐다. 닭의 뱃속에서 곱게 익은 찹쌀과 밤과 대추가 무척이나 고운 빛깔을 하고 있었다.

은비가 살점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을 미수는 턱을 괴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수는 자기 앞의 고기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은비에게 소주잔을 건넸다. 은비는 황급히 잔을 받아들고 한 손을 나머지 팔에 받쳤다. 미수는 능숙하게 졸졸졸 소주를 따르고는, 이내 은비에게 마찬가지로 따라 받았다.

“이런 자리 참 오랜만이네요. 사적인 자리에서 술 마시는 거.”

“네…”

은비는 가볍게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미수는 여전히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은비를 보고 있었다.

“은비 씨는 어때요?”

“어떤 거 말씀하시는…”

“누구랑 같이 술 마시는 거 말이에요.”

은비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별로 술을 안 좋아해서요…”

“그래요? 허, 참. 이거 괜히 곤란하게 만들었네.”

미수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은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녜요, 안 좋아해도 못 마시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어쨌든 굳이 사적으로 만나서 술을 먹진 않죠? 그럼 안 마셔도 돼요.”

비로소 미수는 닭다리를 집어 뜯고는 소주잔을 단번에 비웠다. “크으, 기분 째진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잔을 채워서는 호쾌하게 목의 힘줄을 울리며 마셔댔다. 은비는 조용히 자기 앞의 접시를 비웠다.


이십 분쯤 지나자 미수의 앞에는 소주 다섯 병이 내용물을 잃고 나뒹굴고 있었다. 주방 너머께로 중년 여자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벌개지고 나서야 미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은비를 보며 말했다.

“있잖아요 동생~”

은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작가님.”

“아냐 아냐~ 언니라고 하라니까~ 언, 니!”

술 때문인지 미수의 목소리가 다소 커져 있었다. 은비는 어렵게,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언니”

“좋아 좋아…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거등? 근데 이게 좀 프라이빗한 질문이야~ 괜찮아~?”

은비는 미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게 어지간히 짓궂은 내용이 아닐 거란 예상이 들었다.

“일단 말씀해 보세요.”

“그럼 사양 안 할게요~ 신 PD하곤 어떤 관계예요~?”

미수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은비는 긴장이 살짝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과 하난이 그런 식으로 보였다니. 어쨌든 이건 하난과도 연관된 질문이니 분명하고 담백하게 말해 주면 될 일이다.

“프로젝트 리더랑 스태프죠. 배울 점이 참 많은 상사예요.”

“그래요~? 그거 뿐?”

“네.”

미수는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은비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미수에게 물었다.

“저도… 언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응~ 얼마든지, 얼마든지!”

미수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은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 동안 대외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미수는 흠칫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며 허공을 응시했다. “하하… 이거 당했네” “곤란한데 이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미수를 은비는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미수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일어섰다.

“일단 나가죠. 가면서 얘기할게요. 언니, 계산!”

비틀거리며 지갑을 찾는 미수를 은비가 부축하려고 다가갔다. 미수는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으이구, 독한 것!”

중년 여자는 질려 하면서도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비와 미수는 거리로 나왔다. 희한하게도 그날따라 거리에는 ‘인파’라고 할 만큼의 행인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나가는 사람 중 십중팔구는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미수를 보는 시선일 것이다. 은비는 수시로 옆을 보았으나 선글라스를 낀 미수의 얼굴은 좀처럼 읽을 수 없었다.

이십 분쯤 걷자 탁 트인 광장이 나왔다. 광장 한가운데 분수는 마침 비어 있었다. 은비와 미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분수를 둘러싼 돌 위에 앉았다. 말문을 연 건 미수였다.

“내가 사는 동네 괜찮죠? 조용하고, 한가롭고.”

은비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미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런 동네일수록 소비하며 살기는 좋을지언정 생산 능력은 떨어지죠. 산업 형태가 편중되어 있으니 일을 고르는 스펙트럼도 좁고, 경쟁도 심하고…”

미수는 어딘가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동네에서 나는 유년기를 보냈고, 고등학교까지 나왔어요. 졸업하자마자 마이너한 장르의 서적들을 내는 중소 출판사에 들어갔죠. 이래봬도 신문부 고정 연재까지 했고 아, 이건 말할 필요 없나. 그래도 역시 대졸들 사이에서 혼자 고졸이다 보니 좋게 안 보는 시선들이 많았지만요.”

은비는 고개를 돌려 미수를 보았다. 미수는 짐짓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뭐,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결국 삼 년 만에 관두었고, 퇴근 후 취미로 투고 사이트에 소설을 쓰던 걸 본격적으로 전업으로 하게 됐죠. 운 좋게도, 감사하게도 화제가 되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제대로 생계 수단으로 끌어올리기까지가 큰일이었어요. 동안 소설로 번 수입이 월 오십 만원도 안 되었으니까요. 파트타임으로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죠.”

“그럼 역시 아까 백숙집은…”

“내가 일했던 곳이에요. 개인적인 사정을 봐 주는 데가 거기밖에 없었거든요.”

미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양손 검지로 자신의 볼을 찌르며 말했다.

“신비주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작가의 정체가 이렇게 반반한 미인이란 게 밝혀지면 플러스가 됐으면 됐지 무슨 문제가 있어, 안 그래요?”

은비는 순간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난 사람도 자기 외모가 잘났다고 스스로 말하는 건 한국 같은 나라에서 보통 배짱이 없으면 못 할 짓이다. 그런 면에서 미수는 확실히 마이너 장르 작가다운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은비는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저절로 ‘하하하…’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럼 오랫동안 매스컴에 노출을 안 한 이유는…”

“그냥 바빴어요, 증명 종료. Q.E.D.”

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켜며 별안간 “으아아, 술 다 깼다!”고 외쳤다. 은비는 미수의 등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녀에게 느낀 친근감의 정체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이 좋아하고 따르던 누군가와 매우 닮았다. 소탈하면서도 고집이 세고, 맘에 든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운, 자기긍정의 화신과도 같은 사람. 은비가 바라는 자신의 힘으로 이를 수 없는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오늘 너무 많이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새삼 어깨가 무거워지는데요?”

은비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미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쳤다.

“그래도 명색이 언니인데 내 쪽에서 먼저 오픈해야 경우가 맞지요. 이런 얘긴 하난이 오빠도 아는 내용이니까.”

“오빠요? 세상에, 둘이 벌써 호칭 텄어요?”

“나만 텄어요. ‘미수야’라고 부르랬더니 자긴 게임 출시할 때까진 작가님이라 부르겠다던데? 키가 작아서 융통성도 없는 건가?”

“…방금 그 말씀 그대로 신 PD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작가님.”

“안 돼~! 한 작품 더 하기로 구두로 얘기가 되어 있단 말야~! 개런티 달달하단 말야~!”

자신의 팔을 장난스레 붙잡고 늘어지는 미수를 보며 은비는 마음 속 구름이 조금 걷힌 기분이 들었다. “포기해요, 포기해!” 은비는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오늘의 목적을 위해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오후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해질 무렵이 되자 서서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디너 타임이 되자마자 티블리 안나 안은 평소와 다르게 비를 피하기 위한 손님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홀 직원들이 테라스의 의자와 테이블에 방수포를 씌우는 동안 주방에서는 갑자기 수십 인분의 재료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재 씨 오므라이스 두 개랑 해물 크림 파스타 세 개 7번 테이블에!”

“야, 오므라이스 데코 안 되어 있잖아!”

“거기 케첩 있으니까 좀 해 줘요! 오늘은 주방도 일손이 딸린다고!”

“지금 홀에 세 명밖에 없는 거 안 보여? …너 끝나고 보자!”

이재가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케첩 아트인지 피 칠갑인지 헷갈릴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사이, 소녀는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계산을 하는 동시에 신입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매운 치즈 돈가스 두 개랑 크림소스 함박 스테이크 세 개 해서 칠만 원 결제 도와드릴게요. …하린 언니! 10번 테이블 치우고 곧바로 7번 테이블에 음식 갖다드리세요!”

“…네.”

저쪽에서 손님 두 사람을 빈 테이블에 안내하던 장신의 직원이 고개를 돌려 조용히 대답했다. ‘단하린’이라 쓰인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 몸을 틀어 빠르게 걷는 그녀의 뒤로 치렁치렁한 생머리가 흩날렸다. 동시에 화악 풍기는 샴푸의 사과 향에 근처의 손님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빼어들고 코를 씰룩거렸다. 빈 그릇을 쌓아올리는 그녀의 갈색 피부와 무뚝뚝한 표정을 바라보며 두영은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사장님 참 대단해요. 어디서 저런 미인을 데려왔지?”

“야, 말할 시간 있으면 요리나 마저 해!”

거칠게 케첩 튜브를 짜며 이재가 대답했다. 두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체조 선수였다고 했죠? 그래서인지 순진한 구석이 있어요. 말 그대로 덩치 큰 강아지. 남녀노소 막론하고 적어도 미움은 안 살 캐릭터예요.”

“하, 그래? 말하는 거 보니 꽤 마음에 들었나 보네?”

두영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두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이재는 살짝 침울해졌다. 하긴 비주얼 면에서 두영의 옆에는 비슷한 키의 하린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긴 하다. 조금만 올려다보고 있어도 목이 아픈 자신에 비하면 말이다. 문득 발밑의 맥주 박스에 화가 치밀었다. 키는 비정상적으로 작은 주제에 가슴만 비정상적으로 커 봤자 평범한 남자들은 이성으로 진지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

“…매니저님.”

별안간 머리 위에서 자길 부르는 소리에 이재는 놀란 나머지 몸의 중심을 잃었다. “어, 어어…” 그대로 뒤로 넘어지려는 이재의 몸을 하린이 붙잡았다. 팔을 뻗어 배식구 선반을 부여잡고는 이재는 후우 하고 숨을 돌렸다.

“고마워, 십 년 감수했네.”

“…그럼 7번에 갖다드리고 올게요.”

“같이 가, 그거 혼자서 못 날라.”

“…괜찮아요.”

하린은 쟁반에 파스타 세 접시를 올리고는 오른쪽 손과 팔꿈치에 오므라이스를 하나씩 올렸다. 그리고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속도로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며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전입 이틀째인 신참의 묘기에 가까운 서빙을 보며 이재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8시가 가까워지자 손님이 들어오는 빈도가 가파르게 줄었다. 홀도 주방도 슬슬 직원들의 표정에서 여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8시 반이 넘어가자 마지막 팀도 슬슬 식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나온 여사장이 주방 최고참인 총주방장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눈가에 주름이 진 총주방장은 여사장이 나가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고 “아싸!” 하며 쾌재를 불렀다. 마침 주방에 들어서는 두영을 보고 그가 외쳤다.

“신입 들어온 기념으로 오늘 거하게 한 턱 쏘신단다!”

뒷정리를 하느라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주방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두영은 조용히 홀 쪽을 내다보았다. 아직 손님이 있는 만큼 괜히 들뜨게 해서 실수가 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사장도 똑같은 생각을 한 듯 홀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정문의 표찰을 ‘폐점’으로 돌리고 있었다.

‘딸랑딸랑~’

“이야, 갑자기 이렇게 내리고 말이야. 마침 근처에 좋은 가게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두 남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중키의 후줄근한 외모의 중년과, 장신의 비실해 보이는 청년이 작업복 차림으로 들어섰다. 뜻밖의 상황에 멍하니 서 있는 여사장의 손을 잡아들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며 중년은 말했다.

“Ça te dérange si j'apprécie un dîner, ma chérie?(자기야, 저녁 좀 먹어도 될까?)”

말을 마치자마자 중년은 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냈다. 난데없이 사이비 프랑스 신사 행세를 하는 일도를 보며 우주는 할 말을 잃었다. 문을 열기 직전까지 이들은 “작업도 공쳤는데 밥이나 먹고 가자”, “문 닫을 시간이잖아요, 아무리 친분이 있는 집이라도 민폐예요”, “걱정 말고 나한테 맡겨” 식의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일도가 그런 행동을 한 후의 반응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재는 마시고 있던 물을 주르륵 입에서 흘렸고, 표정 변화가 없던 하린이 처음으로 온몸으로 당황스러움을 나타냈다. 소녀는 처음 우주를 대할 무렵의 한심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되돌아왔고, 두영은 내심 감탄한 듯 일도를 보며 입을 가렸다.

‘저런 뻔뻔함으로 사장님을 낚은 건가?’

여사장은 잠시 굳은 표정을 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내심 조마조마하던 일도도 안심했는지 얼굴이 확 펴졌다. 다음 순간 여사장은 일도의 작업복 상의에 장미를 꽂으며 말했다.

“Sors d'ici.(당장 여기서 꺼져.)”

다들 그 광경을 어리둥절한 채 보는 가운데 프랑스어를 알아듣는 일도와 소녀만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일도의 멱살을 잡으며 여사장은 홀의 직원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말했다.

“…얼마나 됐다고, 심지어 이 시간에 뻔뻔하게 찾아온 거죠?”

“어쩔 수 없잖아. 배는 고프고, 마침 가까이에 있고.”

“오늘 신입 온 기념으로 다 같이 회식할 거예요. 주방은 이미 정리 중이라고요.”

“정식 메뉴가 아니어도 괜찮아. 통조림이든 뭐든 조리를 안 해도 좋으니까 줄 수 없을까? 나는 그렇다 쳐도, 우주가 안쓰럽지 않아?”

“전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으면…”

“조용히 좀 해 봐, 이 눈치 없는 녀석아.”

민망함을 참지 못한 우주의 말을 일도가 다급히 끊었다. 눈앞의 촌극을 계속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린 우주의 눈에는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보고 있는 이재와 하린,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소녀가 들어왔다. 우주가 손을 살짝 흔들며 아는 체를 하자 소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호라…” 이재는 소녀의 등을 보며 묘한 웃음소리를 냈다.

여사장은 일도의 멱살을 놓고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내 체념한 듯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야, 오케이 떴다. 어서 앉자.” 일도는 우주의 손을 잡아끌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하린이 주문서를 들고 다가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메뉴는 정하셨나요?”

“오오, 못 보던 아가씬데. 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신입을 데려왔지?”

“저희 그냥 조금만 앉아 있다가 문 닫기 전에 나갈게요. 가서 일 보셔도 돼요.”

일도의 능청스런 말을 가로막듯 우주가 황급히 대답하자 하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사라졌다. 마지막 팀이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소녀가 쟁반을 들고 걸어왔다. 아는 체 하는 우주를 애써 못 본 체하며 소녀는 주스 두 잔과 식빵 두 덩이 그리고 키위 잼 한 병을 테이블에 올렸다.

“팔다 남은 거니까 돈은 안 내셔도 된대요.”

말을 마치고는 소녀는 곧바로 옆 테이블부터 의자를 올리기 시작했다. 저쪽에선 하린과 이재가 각각 의자를 올리고 바닥을 대걸레로 닦고 있었다. 핸드타올로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온 여사장이 “자, 이십 분 안에 끝내고 나갑시다!” 라 외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일도는 그녀를 스윽 보고는 이내 손에 식빵을 들고 입으로 거칠게 뜯었다. 뒤따라 빵에 손을 대려는 우주를 일도가 다른 한 손으로 제지했다.

“하힉 히하혀, 허흐 하히히 히허.(아직 기다려. 너는 할 일이 있어.)”

눈빛으로 의문부호를 보내는 우주에게 일도는 빵을 허겁지겁 삼키고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했다.

“너 가방에 노트랑 볼펜 있지? 음식 값 대신 그림 한 장 그려줘. 마침 저기 모델들도 있잖니.”

“아니, 서비스로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이런 러프 수준의 사생 그림을 내밀면 오히려 창피하다고요.”

“그런 식으로 생각할 거 없다. 이쪽도 서비스라 치면 돼.”

우주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가방에서 필요한 문방구들을 꺼냈다. 그래봤자 줄 없는 노트와 0.3mm 볼펜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우주는 주방 쪽에서 남자 조리사와 수다를 떨고 있는 웨이트리스들을 발견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우주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재는 하린을 올려다보며 어깨를 토닥여주려고 했다가 팔을 치켜들어 겨드랑이를 한껏 드러낸 자신의 모습에 말 못할 회의감을 느끼고는 단념하며 말했다.

“1호점이랑 비교하면 꽤 힘들 텐데 적응을 빨리 해서 다행이야.”

“뭐 이 친구로서는 다행이 아니죠. 웃돈 좀 더 받는답시고 일이 두 배로 힘든 곳으로 왔커헉.”

두영의 울대를 손날로 치며 이재가 째려봤다. 하린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재는 이어서 말했다.

“이 녀석 말은 들을 필요 없고, 이것만 기억해 두면 돼. 자기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터일수록 그 사람은 더 귀하게 쓰일 수밖에 없어. 네가 일을 곧잘 해낼수록 급여든 발언권이든 편의를 보는 거든 피드백이 분명히 반영될 거야. 홀 매니저인 내가 보장한다.”

“…네.”

“그리고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조용히 대답하는 하린에게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재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네, 어떤 거죠?”

“저기 대놓고 우릴 그리고 있는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이재가 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질문하자 소녀도 눈길이 가려는 걸 자제했다. 소녀는 혹시라도 우주에게 들킬까봐 표정을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친구예요.”

“친구? 남사친? 그런 것 치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그냥 겉늙어 보이는 거예요. 별로 나이 안 많아요.”

“그래? 몇 살인데?”

“음…”

소녀는 뜸을 들이는 척 하며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열 살 차이의 이성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하물며 한쪽이 미성년자일 경우는 더더욱 말이다. 아무리 이재와 두영이 호인이라고 해도 속으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생각해 주지 않을 것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기에 실망시키고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또한 소중하기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저기 있는 중년은 여사장의 오랜 인연인 만큼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것이고, 따라서 직원인 우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임시방편으로 거짓말을 해도 가까운 시일 내에 들통 나리라.

단언컨대 지금까지 우주와는 건전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주와 만날 때마다 그에 대한 친애는 날로 크고 깊어져 갔다. 일 년 후, 이 년 후에도 우주가 그저 호의적인 이성 친구일 것이냐는 물음에 확신을 갖고 그렇다고 대답할 거란 자신이 점점 없어져 갔다.

이재는 잠자코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를 보채지는 않을지언정 두영과 곁눈질로 마주치며 점점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 바보가 괜히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피곤하게 되었다며 소녀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는 찰나, 옆에서 여사장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스무 살. 내가 들은 바로는 그래요.”

네 사람의 이목이 동시에 여사장에게 집중됐다. 소녀가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사이 이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저 녀석을 아세요? 제가 아는 한 우리 가게에 온 건 이번이 두 번째인데요.”

“꽃집 사장님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유일한 직원이 올해 스무 살이라고요.”

“허…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요.”

“본인에겐 꽤나 콤플렉스인 모양이더라고요. 꽃집 사장님도 조심하는 부분이라고 하고요.”

여사장은 입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속으로 살짝 안도하는 소녀에게 이재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야,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다 연막 아니면 재는 거지.”

“아니, 정말 그냥 예전부터 알던 친구라니까요.”

“웃기지 마, 설령 네가 그렇게 생각해도 저쪽은 아닐 수 있어. 경험상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가 이해관계가 일절 없이 우정을 존속시키진 않아. 어느 한쪽은 상대방의 팬티를 벗기고 침대에 눕히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거라고.”

“이… 이재 씨…”

두영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인 소녀의 눈치를 보며 애써 이재를 말리려 들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음 순간 하린이 담담하게 한 말은 이재는 물론 두영까지 격침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매니저님과 부조리장님의 사이 같군요.”

삽시간의 소녀의 두 배는 얼굴이 빨개진 이재가 “야, 야! 그, 그거랑 이, 이거랑은! 다른 문제지 다른 문제!” 라며 허둥댔다. 두영은 입을 틀어막은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얘는! 나보다 늦게 들어온 부하 직원! 내가 고삐를 안 잡아 주면 슬슬 흘리고 다닌단 말야! 명색이 매니저인데 내가 신경을 써 줘야겠어, 안 써 줘야겠어?”

“네 다음 키위 사십커헉”

두영이 입을 열자마자 다시금 울대에 이재의 당수가 작렬했다. 매섭게 째려보는 이재에게 두영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하린은 고개를 돌리고 소녀에게 말했다.

“…저희 집에선 엄마랑 아빠가 매일 저런 식으로 싸워요.”

어디선가 땡땡땡 하고 공을 치는 환청이 들렸다. 단 두 마디에 완전히 침묵한 이재가 어깨가 축 처진 채 탈의실로 향했다. 우주는 멀리서 이재의 옆모습을 보며 방금 전까지 싱싱했던 수박 두 짝이 순식간이 시들어버리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두영은 소녀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 하더니 이재를 향해 외쳤다.

“두영 오빠가 오늘은 수수한 팬티라 벗겨지기 민망하대요!”

“시끄러워!”


“그럼 단하린 양, 한 마디 해야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유리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티블리 안나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치킨집은 여사장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었다. 가격 할인, 폐점 이후 연장 이용 등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업주가 음주가무에 진심인 오디오 덕후인지라 문을 닫는 대로 가운데 테이블들을 치우고 스피커와 앰프를 끌어 오고 숨겨둔 100인치 프로젝터를 꺼내 즉석 스테이지를 만들어 준다는 데 매력이 있었다.

“하린아! 한 곡 하고 들어와! 자, 박수!”

이재가 자리로 돌아오려는 하린을 제지하며 호응을 유도하자 옆자리의 두영이 “와~ 하린이 누나 파이팅!” 하며 거들었다. 하린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스피커와 연결된 컴퓨터에서 곡을 검색했다.

이윽고 벽면의 프로젝터에는 한 여자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린은 원 핸드 마이크로 노래와 안무를 동시에 해내는 실력을 선보였다. 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신입의 놀라운 끼에 직원들은 열광했다. 우주는 그저 소녀 오른쪽에 가만히 앉아 박수만 칠뿐이었다.

왜 우주가 여기 앉아 있느냐, 사실 우주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끌려온 것이다. 펜 하나로 뚝딱 그려낸 그림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소녀를 제외하고 너도 나도 가지겠다고 싸웠고, 결국 그림은 하린이 갖고 대신 우주를 회식 자리에 초대한 것이다. “우주 씨도 내일 일이 있는데 억지로 데려가는 건…” 이라는 소녀의 저항은 가볍게 묵살되었다.

하린은 노래 중간 중간 우주 쪽을 바라보며 손짓하는 안무를 했다. 소녀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아무리 잔을 비워도 취할 리 만무했다. 이 날 유일한 미성년자인 소녀의 앞에는 술 대신 탄산음료가 몇 종류 놓여 있었다. 덕분에 치킨을 몇 조각 먹지도 않았는데 얼마 안 있어 배가 부르는 게 느껴졌다. 옆을 보니 우주는 이재와 두영을 위시한 직원들의 질문과 잔 세례를 받느랴 바빴다.

“그래서, 정말 친구 이상은 아니야? 사귀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어?”

“노 코멘트할게요. 잔 받겠습니다!”

“에이, 비겁한 녀석! 넌 괘씸죄로 폭탄주나 받아라!”

우주는 실제로는 자신보다 몇 살은 어린 사람들의 반말에 존댓말로 응대하며 벌써 혼자 맥주를 4000cc 가까이 비운 상태였다. 이재와 두영은 그런 우주 앞에 소주 반 병, 맥주 400cc, 막걸리 두 큰술, 발렌타인 위스키 200cc를 섞은 벌주를 대령했다. 술을 마셔본 적 없는 소녀도 ‘이건 위험하다’는 느낌이 올 정도로 독하고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잠시 망설이던 우주가 마지못해 조끼 손잡이를 쥐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흑장미.”

노래를 부르고는 자리에 안 보인다 싶던 하린이 어디선가 나타나서는 조끼잔을 뺏어들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한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는 폭탄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힘차게 꿀렁거리는 목젖 위로 살짝 땀이 흐르고 상기된 뺨이 보였다. 십 초 만에 원샷을 마친 하린에게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하린은 당당하게 우주의 오른쪽에 앉았다. 이윽고 빨리도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으으…”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잘 했어, 하린아! 예상보다 훨씬 상여자네!”

이재는 하린의 어깨를 주무르며 칭찬했다. 두영은 우주를 슬쩍 보며 압박을 주었다.

“뭐해, 우주 씨? 소원 물어봐야지. 저 정도면 최소 백허그하고 얼굴 부비는 수위부터 가야지 않나?”

“여기가 무슨 호빠인 줄 알아?”

두영과 여사장의 부부만담에 다들 빵 터지는 사이 소녀는 내심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하린이 자기소개를 하고 춤을 추기 시작한 이후 우주는 은근히 높은 빈도로 하린에게 시선을 향했다. 옆에서 내내 그를 지켜보는 소녀의 속은 탈대로 탔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주인공은 하린인 만큼 뭐라 볼멘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하린은 “흐음…” 하고 고민하는 척 하며 모두의 시선이 여사장과 두영에게 쏠린 사이 소녀의 불편한 안색을 빠르게 읽었다.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하린은 “…정했어요.” 하며 다시금 이목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우주의 앞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 대었다.

우주를 포함한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뜨는 와중에 하린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포상.”

우주는 ‘이게 맞나’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하린의 머리에 올렸다. 하린이 잠자코 있는 걸 승인으로 간주한 우주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라 반응해야 할 지 몰라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소녀의 어깨를 어느새 옆에 온 이재가 탁탁 두드렸다.

“너한테 필요한 자세다, 잘 보고 배워 둬.”

소녀는 눈앞의 광경에 정신이 쏠려 이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 분 정도 지났을까, 늘 무표정한 하린의 얼굴이 살짝 풀려 있었다. 우주는 그를 보며 한 마리의 대형견을 길들이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자신은 이런 걸 처음 해 볼 텐데 어쩐지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익숙했다. 그 자리에서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 우주는 오늘 좀처럼 자신과 눈을 맞추지 않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당시 아득바득 달려들던 태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일 줄만 알았던 소녀가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신의 일상에 편입되었고 그녀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게 되었다.

우주는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를 확인했다. 불과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미주와 일도뿐이던 목록에 어느새 소녀, 여사장, 이재, 두영, 그리고 하린의 이름이 있었다. 뒤의 세 사람은 폰을 뺏다시피 하여 반 강제로 등록한 거지만 말이다.

외로움을 많이 타면서도 강한 척이 패시브다시피 한 소녀에게 소중한 동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 오늘 회식에 끌려간 보람이 있다고 우주는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평소 혼자서는 즐기지도 않는 술을 분위기에 취해 너무 많이 마신 탓일 것이다. 그나마 하린이 문제의 폭탄주를 대신 마셔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자기 발로 귀가하고 있진 못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는 그 경과가 어떻든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일종의 위안을 준다. 그것은 사람 본연의 약함이면서 동시에 강함이기도 하다. 유대와 결속에 대한 믿음만으로 사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을 얻을 수 있다.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우주는 소녀가 자신의 이너 서클에서 그러한 직관과 실제를 얻기를 살며시 빌었다.


11


일요일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도 제나두워크스 사옥 곳곳의 창문에는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 하난이 진두지휘하는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사람들이었다. 과연 이제는 개발 막바지인지라 만전에 만전을 기울이고자 하는 마음이 안팎으로 전해졌다. 피곤에 찌들어 있어도 안광만은 예리하게들 빛나고 있었다.

하난은 이번 작품의 그래픽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아트3팀 작업실에서 모니터를 골똘히 보고 있었다.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하세빈 선임의 태블릿 펜을 쥔 손끝이 거침없이 액정 위를 날아다녔다. 군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캐릭터의 키 비주얼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보기 좋네요. 그래픽 작업 와중에 이것까지 갑작스럽게 부탁드려서 한편으론 기한 맞출까 걱정했는데요.”

“이번 한번만 봐드리는 거예요. 저 많이 힘들었거든요.”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하는 세빈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하난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선임님에게 큰 빚을 졌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럼 오늘 밥 사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세빈은 칼같이 대답했다. 하난은 슬쩍 세빈의 얼굴을 보았다. 대충 헤어밴드로 넘긴 머리는 며칠 못 감은 듯 살짝 떡이 져 있었고, 다크서클이 입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며칠을 신티크 앞에서 매달렸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난은 송구스러워하면서도 정중히 이를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요? 누군데요?”

세빈의 질문에 하난은 입을 다물었다. “흐응…” 하고 세빈은 콧소리를 내더니 다시금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만으로 하난은 ‘유은비 감독이랑 만날 예정이구나’라는 말을 면전에서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하고 유 감독 빼곤 다 기정사실인 줄 알아. 뭐, 유 감독도 알면서 굳이 내색 안 하는 거겠지만.

빈우가 며칠 전 하난에게 했던 말이 새삼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를 뇌물로 바치며 더 캐물어 본 바에 따르면, 심지어는 이번 프로젝트 자체가 은비를 낚기 위한 빌미였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래, 소문은 그렇다 치고 진상은 어떤데?

-전혀 그런 거 없어. 나 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 끌어들이는 사람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끌어들이지 않은 거 알겠는데 네 사적인 감정은 어떠냐고.

하난은 빈우의 말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은비가 작업한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관심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음악뿐이었다. 같이 일하며 접하게 된 그녀의 고고하고도 외로운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고, 어딘가 자신과 닮아 있다고 느껴서 이야기를 점점 주고받게 되었다.

그렇게 호의가 호감이 되어가는 와중에 하난은 필연적으로 한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비와 사귀다가 갑작스럽게 퇴사한 강우주라는 사원의 존재였다. 아트팀 소속이면서 프로그래머와 사운드팀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테크니컬 아티스트. 그가 퇴사하기 직전까지 관여한 게임 『스피릿 스트림』는 미려한 그래픽과 높은 완성도로 당해 해외 게임계에서도 주목했다. 무엇보다 은비의 데뷔작이기도 했다.

고졸로 업계에 데뷔하자마자 이름을 떨친 두 천재 크리에이터의 연애와 이별은 당시에도 사내에서 뜨거운 이슈였던지라 하난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같이 일하게 되어 은비와 마주할 일이 많아지자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하난의 실수였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그 자체가 이미 코끼리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는 반증인 셈이었다. 점점 더 하난은 은비에게 빠져들게 되었고 그럴수록 점점 더 지금은 없는 우주에게 묘한 경쟁심이 일었다.

눈앞의 세빈은 자신이 아는 바로는 은비의 입사 동기였다. 문제의 그 작품에도 같이 참여했었고, 당시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난은 비로소 자신과 은비를 둘러싼 소문에 기름을 부을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는 걸 깨달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하난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임님, 그게…”

“이걸로 비싼 거 얻어먹을 명분이 두 개나 생겼네요.”

세빈은 여전히 액정에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하난은 뒤늦게 세빈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좋습니다, 두 번 킵해놨으니까 언제든 사양 말고 말만 하세요!”

말을 남기고는 하난은 또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세빈은 슬쩍 고개를 돌려 하난이 나간 걸 확인하고는 태블릿 펜을 놓고 기지개를 켰다. 일요일 오후에 하난이 불시에 방문할 줄 몰랐기에 편한 차림으로 있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다. 작업에 집중하는 척 하며 최대한 하난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이미 못 볼 꼴은 다 보여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굳이 신경 안 써도 된다. 지금껏 반신반의하던 두 사람의 소문에 대해 방금 전 하난의 태도는 아예 확신을 주고 말았다. 세빈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또 머리를 잘라야 하나…’

모르는 사람은 뻔한 클리셰라고 가볍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 입장에선 그런 말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없으리라.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겠는가.




한 주의 찬거리를 사는 손님들이 대부분 빠진 일요일 오후 8시는 마트로서는 비공식적인 휴식 시간이었다. 연일 내리는 비에 손님 수가 확연히 줄어들다 보니 파트타임 근무자들은 슬슬 퇴근하고 직책이 있는 풀타임 근무자들은 남아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주임 직위인 미주는 입사일로는 반장과 불과 1개월 차이 나는 최고참이었다. 또한 대학 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주말이나 월말에는 반장과 둘이서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하곤 했다.

“이야, 주임님. 우리 마트에도 바움쿠헨이란 게 들어오네요.”

반장이 매입 목록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을 건넸다. 미주는 살짝 미소를 띠며 반장을 쳐다보았다.

“그 동안 들어온 적이 없었나 보죠?”

“말도 마세요. 명색이 근방 5천 세대를 커버한다는 지역 대표급 마트가 의외로 없는 거 투성이라니까요.”

“그만큼 수요가 없었으면 어쩔 수 없죠.”

미주의 말에 반장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본토인 독일에서도 바움쿠헨이 공산화된 지 언젠데, ‘한국에서도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없었겠어요? 잠재적 손님이 지갑을 열 수 있게 갖춰 두는 게 대형 마트의 급이죠, 급!”

“그렇군요.”

미주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다시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반장 역시 할 말을 다 하고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심심해진 반장이 다시 미주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요, 주임님.”

“네, 반장님.”

“바움쿠헨이 왜 바움쿠헨인지 아세요?”

“글쎄요… 바움Baum에다가 쿠헨kuchen이면… 나무 같은 무지 빵? 나무보단 도넛이나 베이글처럼 생기지 않았나요?”

“땡, 절반은 맞았어요. 자른 단면이 나무의 나이테 같아서 그렇게 부른대요.”

“오, 역시 반장님 상식왕! 대단해요!”

엄지를 한번 척 세워 주고는 미주는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반장은 생각했다. ‘지금 나 멕이는 건가? 독일어는 또 언제 배운 거야?’ 이번뿐이 아니라, 미주와 같이 일을 하다 보면 종종 놀랄 때가 있었다. 포장지에 있는 문구가 단테의 신곡에서 인용한 것임을 알아챈다든지, 외국인 손님에게 영어로 능숙하게 대응한다든지… 언젠가는 휴게실에서 혼자 책을 읽는 걸 몰래 뒤에서 보니 일본어 원서를 읽고 있었다.

삼십여 년 전 반장이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어느 날 새로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허여멀건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왜소한 체구의 그는 쌀 포대 하나도 혼자서 못 옮길 정도로 약골이었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늘 진지한 눈빛을 하고는 노동자의 권리니 민주주의의 가치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들을 역설하곤 했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도시성에 대한 시골 소녀의 동경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몰래 직접 음식을 챙겨 주며 남자와 가까워지고자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서울의 어느 대학의 법대생이며, 민주화 운동인가를 하다가 경찰 블랙리스트에 올라 수배 중이라 몸을 숨기러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을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열심히 들어 주었고, 청년은 도망쳐 온 타지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와 주는 묘령의 여인에게 점점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다.

반찬과 간식이 평소보다 빨리 줄어드니 결국 부모님에게 꼬리가 밟혔고, 그녀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이 빨갱이와 정분이 났다고 노발대발했다. 그러면서 멀쩡한 동네 총각 아무하고든 빨리 결혼을 시켜버려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다. 한편 어머니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으니,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드러누운 딸을 부지깽이로 후려 패려는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그래, 지금 임자 보기에야 저 총각이 부모님이 뼈 빠지게 일해가 법대까지 보냈더니 데모나 해 싸는 놈팽이제. 근데 세상만 바뀌어 보소. 농사 잘 지어가, 가게 잘 굴리가, 돈놀이 잘해가 돈 마이 벌어봤자, 그기 무슨 위신이 있고 명예가 있노? 배운 기 곧 위신이고 명예고, 그라믄 돈은 알아서 들어오는기라.”

장래의 법조인 사위 덕을 보겠다는 어머니의 큰 그림으로 처녀는 경사스럽게도 청년과 화촉을 밝히게 되었다. 아들과 딸도 하나씩 낳았다. 결혼 후 첫 명절 방문 때만 해도 사위 못마땅하단 티를 팍팍 내던 장인도 손주를 안았을 때는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그러나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다.

남편은 첫째가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계속해서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그러나 손쉽게 붙을 거란 본인과 주변의 기대와 달리 연거푸 낙방만 계속했다. 그동안 아내는 아이를 돌보랴, 밖에서 일하랴 혼자서 가장 역할을 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배운 거 없는 젊은 여자 혼자서 성인 둘과 아이 둘 총 네 개의 입을 감당하기는 벅찼다. 시가 쪽은 ‘시골 촌부가 내로라하는 법대생 사위 데려갔으면 감당할 일 아니냐’며 냉담한 태도였으니 아내는 이따금 친정에 가서 고개를 푹 숙이고 부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낙방에 남편은 점점 합격에 대한 기대를 잃어갔고, 그토록 넘치던 자신감은 어느새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점점 법전을 멀리하고 집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줄담배를 피며 당구를 치고, 경마장과 술집에 기웃거리는 날이 늘어났다. 그 와중에도 법대를 나와 사시를 준비한다는 알량한 자존심은 남아 있어 집에 오면 아내와 아이들과 말 한 마디 안 나눈 채 밥을 먹고는 방에 틀어박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법전을 펼쳤다. 10수 째가 되자 결국 장인은 사위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이번에도 안 되면 곧바로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그러지 못할 거면 딸과 손주들을 데려가겠네. 집은 자네에게 줄 테니 팔아서 밑천으로 쓰든지 맘대로 하게.”

그렇게 마지막 시험을 모두의 예상대로 낙방하고는 그는 경기도의 어느 기업의 인사과 직원이 되었다. 사법부에 들어가거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그의 동문들 중 몇몇이 옛정을 생각해서 수사관이나 사무장으로 초청했지만 그러한 호의를 받아들이기에 그는 여전히 아버지로서의 책임감보단 한때 법을 공부하며 정의를 부르짖던 법학도로서의 자의식이 월등히 강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기업이란 법과 정의, 건전하고 비전 있는 시장 법칙보다는 생산성과 효율을 위해 사람을 외면하는 매뉴얼의 지배를 노골적으로 공고히 하는 곳이었다. 그는 하루하루 자신이 상궤라 믿고 인륜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격률들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고, 결국 일 년도 안 되어 사표를 던지게 된다. 이 때 “법대 나와서 써 준 줄 알아? 법대씩이나 나와서 그 나이 먹도록 처자식도 못 먹여 살리는 잉여인간인게 불쌍해서 써 준 거야! 어디서 감히 대들어!” 라 말하는 상관에게 재떨이를 쥐고 달려들어 전치 7주의 부상을 입힌 것으로 특수폭행 전과가 생길 뻔했으나 동문 변호사의 도움으로 상당한 액수의 합의금을 내는 것으로 그쳤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남편은 이후의 반생을 사실상 방구석 폐인처럼 살았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해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화장실과 목욕을 제외하면 방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자기 방에 사람을 들이는 건 하루에 세 번 아내가 밥상을 내오고 내갈 때뿐이었다. 아침 밥상을 내려놓는 아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남편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읽고 싶은 책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내는 그것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는 남편이 다 읽고 문간에 둔 책들을 지난 저녁 밥상과 같이 내가는 것이었다.

사위 때문에 화병이 들어 뇌출혈을 일으킨 지 얼마 안 되어 죽은 장인의 유산을 보태어 안방에 화장실이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는 그는 아예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아들과 딸은 돈벌이나 훈육은 고사하고 밥상에 한번 같이 앉지 않는 아버지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고, 어릴 적 문 너머 아버지의 대답이 없어도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지키던 안부 인사도 머리가 크고 나서는 아예 안 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이십 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 반장은 처음 미주가 일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상당한 불신이 일었다. 허드렛일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고운 피부를 가진 도저히 불혹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외모의 미주를 보며 반장은 길어야 한 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주는 가르쳐주면 배우는 게 빨랐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간을 내어 다른 업무들을 파악하기까지 했다.

거의 십 년을 함께 일한 만큼 이제는 거의 한 몸이나 다름없는 팀워크를 자랑했지만 반장은 미주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새 반장을 뽑을 때 사측이나 동료들이나 내심 미주가 될 거라 생각했다. 전체 업무를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기획이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고 덤으로 나이보다 젊은 외모로 의전에도 안성맞춤이니 오히려 미주가 아니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미주는 그를 한사코 사양하며 다른 곳에서의 경력이 많다는 이유로 지금의 반장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결국 사측은 미주의 뜻대로 반장을 뽑았고, 미주는 본인이 앞장서서 반장을 추켜세우며 위신을 세워 주었다. 보통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회의에 참석하고 현장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부담이 있지만, 급여도 올라가고 현장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정시 출근과 퇴근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반장 직위는 주임과는 현격한 대우 차이가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자신이 잘 하는 일을 못하게 되자 아예 바깥세상을 등져버린 남편을 부양해 온 반장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자신의 성향과 맞는 일을 오히려 마다하는 미주가 이상하다 못해 아니꼽게 보였다. 그래서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리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금은보화를 손쉽게 가질 수 있으면서도 그를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한 취급 하며 거들떠도 안 보는 사람은 보통 속세를 초탈한 지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리보단 순진하다든지 가식적인 위선자란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여우와 신 포도’의 사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어쩌겠는가, 범인이 이해할 수 있으면 그게 높아봤자 얼마나 높은 경지겠는가.

“아 참, 깜빡하고 있었네. 주임님 지금 하시는 거 하는 데까지만 해 두세요. 나머진 제가 마무리할게요.”

“무슨 일 있나요?”

“8시 넘어서 사람 한 명 올 거예요. 다음 주말부터 일할 분인데, 미리 일터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때쯤 한가하니까 와 보시라고 했거든요. 원래는 제가 안내해 드리려고 했는데 넋 놓고 있다가 일 마무리도 제대로 못 했어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마무리하세요.”

반장은 속으로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오십 넘은 나이에 처음 중간관리직이란 걸 해 보다 보니 여기저기 신경을 분산시켜서 일하는 게 익숙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종종 이렇게 일정에 구멍이 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마저도 미주가 서포트해주지 않았으면 수습 불가능할 정도였을 것이다.

잠시 후 똑똑 하고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 쪽 자리에 앉은 미주의 “들어오세요.” 라는 말에 양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중년이 조용히 들어왔다. 서로의 얼굴을 본 순간 미주와 중년은 잠시 흠칫했다가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반장은 모니터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중년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서 오세요, 반장을 맡고 있는 함민영입니다. 이쪽은 강미주 주임입니다.”

“강미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새로 일하게 된 한승완이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중년은 반장과 미주와 차례차례로 악수했다. 미주가 곧바로 말했다.

“따라오세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사무실을 나간 두 사람은 매장 이곳저곳을 걷기 시작했다. 미주는 진열대, 방범 장치, 화재 설비 등을 차분히 설명하고, 자신에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가볍게 대응하며 살짝 멀어진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었다. 승완은 아까부터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을 하면서도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공구 창고에 다다랐다. 가끔 공구 작업을 할 때가 아니면, 하물며 일요일에는 거의 들어갈 일이 없다 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미주는 익숙하게 스위치를 켜고는 앞장서 들어갔다.

“여기 있는 공구들은 주로 시설관리팀이 쓰긴 하는데요, 급하면 우리도 쓰니까 사용법은 알고 있어야 해요. 여기 있는─”

“강미주 작가 맞지?”

승완이 사무실을 나오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미주는 등을 돌린 채 잠자코 있었다. 승완은 이어서 말했다.

“하루아침에 출판사 쪽 사람들이랑 전부 연락을 끊어버리고, 오피스텔도 처분해버리고!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런 데서 일하고 있을 줄이야.”

미주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을 서 있었다. 승완은 얼굴을 감싸며 살짝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미주야, 말 좀 해 봐! 나한테 할 말 없는 거야?”

미주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어렵게,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수염 기르셨네요, 잘 어울려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고 있잖아! 작가로서…”

“사모님은 잘 지내시죠? 용준이는 지금쯤 대학교를 졸업했을까요?”

미주는 승완의 말을 끊고 말했다. 승완은 다소 차분해진, 그러나 감정이 분명히 실린 목소리로 받아쳤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다른 뜻은 없어요. 오랜만에 편집장님을 보니까 문득 생각났어요.”

“쓸데없는 소리, 나하고 십오 년을 일하면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면서 생각은 무슨!”

미주의 목소리는 태연자약했지만 승완에게 보이지 않는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설마 이제 와서 다른 곳도 아니고 일터에서 옛날 인연을 만날 줄은 몰랐다. 철저하다시피 할 정도로 과거를 청산할 당시, 한편으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없던 것처럼 하려고 하던 과거가 지금 승완의 모습을 하고 닥쳐오는 것 같았다.

“좋아, 그렇게 궁금했으면 지난 십 년간 얼마든지 와서 물어보았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넌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어. 네가 복귀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쓰던 원고도 미완 상태로 내 사무실에 두고 간 채 찾으러 오지도 않았지. 네 재판된 작품들에 대한 인세도 그대로 출판사에 남긴 채 말이야. 난 그걸 전부 넓지도 않은 내 자취방에 보관하고 있고.”

“…”

“우리가 아무리 마지막에 길을 잠시 잘못 들었더라도, 십오 년 동안이나 이어온 우정이었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같은 이상을 꿈꾸는 지음의 세월이었다고! 그건 내 부모도, 내 처자식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어! 적어도 그런 식으로 끝날 것은 아니었다고! 알아?”

승완은 미주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며 다그쳤다.

“말해 봐! 굶어 죽을지언정 쓰고 싶은 글만 쓰겠다던 말도, 죽을 때까지 드높은 경지를 추구하고 싶다던 말도 전부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그냥 스스로에 취해서 되는 대로 내뱉은 말이야?”

형광등 하나의 불빛에 의존하는 좁은 방안의 분위기가 거대한 기압골이 충돌하듯 급격하게 격렬해졌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마주친, 추억과 현실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공간이었다. 어느 한쪽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책은 출판업자들이 이익을 보기 위해 만든 것이다.’”

미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승완의 목소리가 떨렸다. “뭐, 뭐라고?”

“에코의 『푸코의 진자』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알고 있죠?”

“넌… 내가 네 책을 그저 이익 수단으로 봤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린 서로의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좋은 파트너였단 거죠. 난 당신 덕에 한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당신은 그 담당자가 되었고요. 우리가 둘이서 고고한 이상을 떠드는 것과 별개로 물질세계에서 우리가 유익을 얻은 건 부정할 수 없지 않나요.”

“…입 다물어. 너하고 내가 만든 소중한 자식들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하아, 이봐요 한승완 씨. 분명히 말해 두죠. 그것들은 당신과 내 자식이 아니에요. 내가 ‘썼던’ 작품이자 상품이죠. 이제는 안 팔려서 생산해봤자 자원 낭비고 진열해봤자 공간만 차지하는 상품이고요.”

미주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자식이라… 하긴 당신, 나를 어지간히도 좋아했었죠. 마누라랑 자식이라고 있는 게 뉴질랜드가 좋다고 집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돌아올까 말까니, 더군다나 친구도 없는 워커홀릭인 당신은 회사에서든 바깥에서든 애 딸린 과부인 나하고 제일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쯤 되면 서로가 실질적인 배우자였던 셈이고, 그러니 몸 좀 섞어도 이상하지 않죠. 아, 기분은 제법 좋았어요. 애 아빠보단 못 하지만.”

“닥쳐…”

“몇 번 같이 잔 정도로 남편 행세라니 꼴사납긴. 당신이 조금이라도 현실을 볼 줄 알고 시장을 파악할 줄 아는 유통업자였으면 나 같은 철 지난 생산자 따위는 진작 미련을 버리고 스타성 있고 얼굴 반반한 지망생이나 하나 골라서 입맛대로─”

짜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좁은 창고 안의 공기를 터뜨리듯 울렸다. 승완에게 어깨를 강제로 돌려지자마자 뺨을 강하게 맞은 미주는 그제야 승완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발견했다. 승완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미주를 한동안 노려보더니 그대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미주는 뺨을 어루만진 채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까지 연기를 고수하는 데 성공했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마음에도 없는 지독한 말을 고르고 골라 한때의 친구에게, 어떤 의미에선 그의 말대로 연인이나 가족보다 더욱 귀중했던 단짝에게 퍼붓고 나니 심장이 있는 곳을 손이 닿는 어느 공구로든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다. 그러면 안 된다. 울고 싶어도 마음 가는 대로 울어서 혼자 편해져 버리면 안 된다. 앞서 승완이 한 말에 한 마디 허세나 자아도취도 없었음은 미주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세상 풍파에 찌들고도 남을 나이에, 누구보다 출판 일에 대한 의미가 남다른 사람이 반생을 바친 회사에서 잘려 새로운 일터로 몰린 신세임에도 그토록 아이처럼 순수하고도 고결한 그다. 그날 그 선택을 한 순간 자신은 그런 승완의 곁에 있을 일말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자신의 선택을 고수하기 위해 그런 그의 마음을 유뷰남의 외도로 매도하고 격하시켰다. 그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도매금으로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말을 해 봤자 소중한 말소리는, 소중한 시간은, 소중한 마음은 늘 그 자리에 남아서 빛을 발할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만 어둡고 습한 곳에서 몰염치하고 속된 년이 되면 그것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빛을 발하며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고 희망이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은 십 년 전부터 미주가 각오한 처절한 삶의 편린이었다.


12


며칠째 내리는 비로 우산을 쓴 행인들의 얼굴도 왠지 가라앉아 보였다. 그럼에도 오히려 발걸음은 비를 피하고 싶어서인지 평소보다 빨라 보였다. 남부터미널 옆의 모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숍 지점에는 비를 피하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틈을 내어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사람, 아예 날 잡고 ‘카공’을 하려고 테이블 한 편에 책을 잔뜩 쌓아놓은 사람 등 여러 모습들이 보였다.

창가의 한 테이블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녀 한 쌍과 탱크탑 차림에 허리에 셔츠를 동여맨 채 핫팬츠를 입은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의 조합은 주변에서 보기에는 영 자연스럽지 않았다. 특히 레인코트를 위시한 정장이 주를 이루는 비 내리는 평일 오후 2시의 서울 도심 한복판이란 공간에서 여자의 옷차림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이쪽 테이블에 간간이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하난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이렇게 자기주장 강하게 입고 다니는 양반이 그 동안 언론 노출 한 번 안 하고 어떻게 살았어요?”

미수는 깔깔거리며 손가락으로 하난을 가리켰다.

“이거 봐, 은비야! 이 오빠 너무 성실하게 살았다니까! 만날 때마다 학생주임마냥 복장 지적하고 앉아 있어! 두 번째 만났을 때도 ‘태미수 작가님, 다음부터는 좀 더 무난한 패션으로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은비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미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난은 다급히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딱히 누구도 이쪽 이야기를 들은 눈치는 아니었다. 은비는 미수의 입을 막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패션은 둘째 치고 입이 무난하지 않아요. 언니가 성실하게 산 덕에 아직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걸 지금 판촉의 기회로 삼자는 거잖아요. 협조 안 해주실 거예요? 다음 작품 같이 하기 싫어요? ‘작가님’?”

은비의 눈에 평소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귀기 서린 기백이 깃들자 미수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하난은 일에 관해서 자신만큼 진지한 은비를 동석시키길 새삼 잘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처음 보는 그녀의 위압적인 모습에 등줄기가 살짝 추워지는 걸 느꼈다.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주목시키고는 하난은 방금 전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동안 신비주의를 유지하던 원작자가 알고 보니 예쁜 여자였다는 식으로 유저들을 열광시키는 게 이번 이벤트의 근본적인 목표입니다. 물론 마니아층 중에는 상업주의에 편승해서 지금까지 유지하던 ‘얼굴 없는 작가’ 콘셉트를 버렸단 식으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그 동안 저랑 이야기하면서 감수하시기로 한 부분이고요.”

“뭐 그렇지. 사실 나야 대중 앞에 서든 안 서든 딱히 상관은 없어. 내 작품으로 게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원하니까 하는 것뿐이고.”

미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쪼옥 하고 에스프레소를 빨아마셨다. 은비가 살짝 몸을 기울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번 얼굴이 퍼지고 나면 앞으로 자유롭게 글을 쓰는 데 애로사항이 생길 수도 있어요.”

“대충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너무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장기적으로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는 결국 내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내 팬들 모두가 내 얼굴이 노출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날 작가 이전에 사람으로 존중 못 해주는 잠재적인 또라이들 무서워서 평생 얼굴 없는 작가로 살라고?”

미수는 거침없이 말했다. 하난은 흔들림 없는 미수의 태도에 한편으론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벤트 현장용 대본을 따로 만들어둬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말 한 마디 잘못해서 팬덤의 역린을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이벤트를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건 자유지만 상대방에게 그를 화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의무는 없다. 특히 현대 사회처럼 개개인이 각자 양방향 미디어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 첫인상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만남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엄청난 우연이 발생하지 않는 한 상대의 첫인상이 나쁘면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인상이자 심지어 자신 마음속에서 평생 바뀌지 않는 ‘나쁜 인상의 한 예’로 남기도 한다.

하물며 SF 장르의 팬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아는 작가의 팬 미팅이나 다름없는 자리에서 단 한 명에게라도 미운털이 박히면 그는 그 작가의 평생 안티가 될 수도 있다. 작가가 추후 얼마나 좋은 작품을 써내든 그에겐 그 작품에 대한 일말의 기대보다도 실제로 본 작가의 나쁜 인상이 심리적으로 훨씬 가깝다. 미수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총감독인 하난의 입장에선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은비는 실시간으로 하난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지켜보며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날 언니 옷은 제가 책임지고 준비할게요. 단정한 거로.”

“한시름 놓았어요. 고맙습니다, 감독님.”

미수는 잠시 둘의 모습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국제전자센터 건물을 가만히 응시했다. 현수막을 주로 거는 둥근 벽에 《제나두워크스 버스터 걸즈 서비스 임박! 태미수 원작자를 만나다!》라는 글귀와 함께, 선행 PV에서 가장 먼저 공개한 메카와 소녀 캐릭터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세로 현수막이 당당히 걸려 있었다.

“…멀리 있어도 알 수 있도록, 그렇지?”

미수의 눈빛은 어딘가 아련했다. 은비와 머리를 맞대고 계획서를 다시 읽어보던 하난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뭐 저 정도 크기면 꽤 멀리서도 보이긴 하겠네요.”

미수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이내 피식 하고 웃었다.

“아아, 미안. 혼잣말이었어. …그러게, 그 말도 맞네.”




주말 저녁의 티블리 안나는 거의 예외 없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요 며칠 연이어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지난주와 별 다를 바 없이 손님이 몰렸다. 빗발이 얼마나 거센지 주차장에서 내려서 바로 앞의 가게에 들어왔을 텐데도 입구 앞의 우산들은 하나같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물론 손님 수와 내부 습도 덕에 점원들도 마찬가지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조리사님, 13번 테이블에 새우 필라프랑 봉골레 파스타 두 개씩!”

“하린아, 곧바로 7번 손님 계산 좀 해 줘! 여기 도저히 손 놓을 상황이 아니다!”

홀에서 서로 소리치면서 일을 해도 손님들에겐 어떤 클레임도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음식을 먹으면서 귀로 듣거나 힐끗힐끗 보며 미소를 짓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전투적으로 정신없이 일하는 웨이트리스들의 모습 역시 이곳의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로 통하고 있는 셈이다.

런치 타임부터 연장 근무 중인 소녀는 이재의 배려로 사무실과 창고를 오가며 재고 파악과 물품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잠시 홀로 나온 소녀는 출입구 근처에서 창문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는 브리지 염색에 화려한 화장을 한 아르바이트생에게 힘겹게 외쳤다.

“현지 언니, 일단은 매니저님 백업 좀 해 주세요! 청소는 나중에 해도 돼요!”

현지라고 불린 아르바이트생은 “알았어~” 하고 볼멘 목소리로 대답하며 단체 손님 열한 명이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혼자 치우고 있는 이재에게 터덜터덜 다가갔다. 이재는 치우고 있는 와중에도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호되게 꾸짖었다.

“너 내가 손님 다 나갈 때까지 나오지 말랬지! 그쪽 일 다 끝났으면 사무실에 앉아 있든지 하라고 했잖아!”

“네…”

소녀는 풀이 죽은 채 사무실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이재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테이블에 도착한 현지에게 짐짓 밝은 태도로 말했다.

“왜 주말 저녁에만 일하는데 페이가 그렇게 센지 궁금증이 풀렸지? 진 다 빠진 건 알겠는데 조금만 더 버텨. 다 익숙해진다.”

현지는 “히잉~” 하면서 반 울상인 얼굴로 같이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재는 부아가 끓는 걸 조용히 눌렀다. 일단 4주만 일해보기로 하고 여사장이 급하게 뽑은 아르바이트생인데 문제는 첫날부터 이재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근무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보다 두 살 어리고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다고 해서 어느 정도 일은 하겠다 싶었는데, 업무를 숙지하고자 하는 의지부터 보이지 않았다. 굳이 비율로 나타내자면 하린이나 소녀가 3을 할 시간에 현지는 1을 겨우, 그것도 엉성한 모양으로 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인력 상태를 생각하면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건 불가피했다. 하린이 예상보다 훨씬 더 일을 잘 해 주어서 한시름 놓았지만 이재나 소녀나 연이은 격무로 몸과 정신이 이미 한계 상황까지 몰려 있었다. 소녀를 저녁 근무에서 뺀 것도 이미 안색부터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인분 이상은 기본으로 하는 이재와 소녀가 근무를 줄이면 곧바로 하린에게 부담이 가중될 것이다. 손님의 70~80%가 집중되는 주말에 적어도 1인분은 하는 사람이 꾸준히 있어야 한다.

설렁설렁 식기를 쌓는 현지의 옆에 붙어서 이재는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수저와 포크, 접시와 종지 등을 분류해 쟁반 위에 쌓았다. 현지에게 쟁반을 건네며 이재는 턱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자, 좀 더 힘내보자!” 우거지상을 하고 받아든 현지의 엉덩이를 이재는 다소 감정을 실어 찰싹 때렸다.


소녀는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여사장의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확실히 몸 상태가 안 좋아져 있었다. 적어도 저번에 일도와 우주가 방문한 뒤부터 시작되었다. 쉬어도 쉬어도 피로가 온전히 풀리지 않았고, 그 상태로 똑같이 일하니 피로가 누적되고, 점차 가만히 있어도 몸에서 열이 나고 손발이 아프게 되었다.

분명 일이 힘든 게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또 하나 소녀를 괴롭히는 건 회식 날의 기억이었다. 그날 같이 있던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소녀보다 하린이 우주보다 더 친밀했다고 말할 것이다. 보면 볼수록 하린은 소녀와는 정반대 성향의 사람이었다. 몸을 쓰는 것에 능숙하며, 생각하는 바, 원하는 바를 누구보다 빠르게 또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분을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알고 있고 또 그를 곧바로 충족시켜 준다.

처음 본 그날 하린은 우주의 그림을 얻었고 보답의 명목으로 데려간 회식 자리에서 격정적인 춤과 대담한 흑장미 행세로 우주의 관심을 얻었다. 어느 남자라도 그렇게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여자에게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키 차이도 나이 차이도 자신에 비해 적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탄 살결에 연예인 뺨치는 얼굴과 몸매를 가졌다. 문득 고개를 숙이고 또래 평균보다 못한 자신의 몸의 발육을 본 소녀는 부아가 치밀었다.

탁상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얼굴은 고통과 질투가 어우러져 말도 안 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서는 양쪽으로 묶은 머리를 매만져보았다. 단둘이 밤을 보낸 날 우주가 처음으로 피로한 그의 취향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자신은 그런 남자의 관심을 한번 끌어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슬슬 마감 시간이 다가올 무렵 별안간 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또 다시 이재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소녀는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평상복 차림의 우주가 양손에 한가득 봉지에 담긴 간식거리를 들고 있었다. 이재가 달려와서는 우주의 손에서 빼앗다시피 봉지를 들어 주며 반겼다.

“야, 역시 의리가 있잖아! 차도 없을 텐데 어떻게 온 거야?”

“택시 타고 왔어요. 부조리장님이 안 바쁘면 당장 놀러오라 하셔서 왔는데 일하고 계신가요?”

“두영이? 걔 오늘 비번인데?” “네!?”

소녀는 우주가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이재를 앞에 두고 대화하면서도 수시로 이재의 머리통만한 가슴에 눈이 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편두통이 일었다. 따지고 보면 그저 이상한 인연이 겹친 친구 사이에 불과한 그가 어떤 여자가 취향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재는 이내 이쪽을 보는 소녀를 발견하고는 손짓하며 말했다.

“좋아, 그만 나와서 같이 청소하자고! …괜찮으면 우주 씨도 도와줄래?”

“좋아요. 빨리 끝내버리죠. 뭘 하면 될까요?”

“그럼 이 오빤 내가 좀 쓸게요! 나 오늘 너무 힘들어서 좀 도와줘~”

어느새 나타난 현지가 우주에게 찰싹 붙어 팔짱을 꼈다. 제복 너머로 그럭저럭 있는 가슴이 팔뚝에 부드럽게 찌그러지자 우주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현지는 모르는 척 우주를 곁눈질로 살짝 올려다보며 저쪽으로 이끌었다. 소녀가 청소하는 내내 자기도 모르게 현지를 매섭게 째려보는 걸 하린은 빤히 보았다. 이재는 하린을 툭툭 치며 눈빛으로 만류하고는 속삭였다.

“일어날 일은 어차피 언젠가 일어나는 법이야.”


“자, 우주 씨. 입 벌려, 순대 들어간다!”

우주의 오른쪽에 찰싹 붙은 이재는 순대 한 점을 떡볶이 국물에 찍어서는 밑을 받치고 우주의 입에 가까이 댔다. 우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먹을게요, 제가…”

“으아아아! 팔 아파, 팔! 떨어진다떨어진다! 빨랑 입 벌려어어어!”

이재가 떡볶이 국물을 튀길 기세로 코앞에서 손을 떨자 우주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순대를 으적으적 씹는 우주에게 이재가 흐뭇한 미소로 말했다.

“이 집 맛있지? 원래 알던 데야?”

우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본적으로 혼자 외식을 하지 않는 우주로서는 마지막으로 분식집에서 테이크아웃을 했던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했다. 그저 두영이 알려 준 가게로 가서 제일 푸짐해 보이는 세트메뉴를 사온 게 전부이다.

“흐음? 여기 산 지 얼마 안 됐어? 여기 신주락 떡볶이가 그렇게 맛있거든. 나도 거기서 사 먹은 이후로는 다른 떡볶이는 잘 안 건드려. 이야, 네 친구 센스 있네!”

이재가 장난스럽게 우주의 뺨을 콕콕 찌르며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는 입맛이 없었지만 내색을 안 하고 떡볶이를 한 가닥씩 꾸역꾸역 씹고 있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던 소녀는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뭐야, 매니저님이 아니고 네 친구였어? 오빠, 혹시 몇 살?”

우주의 왼쪽에 앉은 현지가 또 다시 팔짱을 끼며 물었다. 소녀는 우주의 콧평수가 살짝 넓어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 저기 그게…”

“…스무 살.”

어느새 우주의 맞은편으로 간 하린이 상체를 숙인 채 두 눈을 치켜뜨고는 우주의 입에 오징어튀김을 갖다 댔다. 앞섬이 파인 사복 너머로 제복 상태에선 볼 수 없는 하린의 속살이 비쳤다. 융성한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은 까무잡잡한 피부보다도 더욱 깊고 선명하게 그늘져 있었고 오른쪽 젖가슴 위에는 쌀 한 톨 만한 애교점이 있었다.

“응? 아으으읍”

우주가 아니라고 말할 새도 없이 하린은 우주의 입에 튀김을 밀어 넣었다. 우주는 서둘러 입 속의 음식을 씹었다. 빨리 해명해야한다는 생각과 눈앞의 하린의 육체는 동정남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번갈아가며 머릿속을 지배했다.

“뭐야, 완전 연하잖아! 생긴 건 내일 모레 계란 한 판 아저씬데! 어우 귀여워!”

현지는 찰싹 달라붙은 채 왼손으로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그게… 사실은…” 겨우 입에 있는 걸 다 삼킨 우주가 말문을 열려고 하던 그때였다.

(포옥─)

갑자기 우주의 시야가 깜깜해지더니 얼굴 전체에 레몬향의 부드러운 감촉이 깃들었다. 재밌는 구경거리마냥 관전하던 이재도, 우주의 얼굴을 보며 열심히 재잘거리던 현지도, 자기들끼리 떠들며 이따금 이쪽 테이블을 보던 주방 사람들도 놀란 채 몸이 굳어 버렸다. 우주의 머리를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이재는 스읍- 하고 우주의 냄새를 들이키고는 조용히 말했다.

“…흑장미.”

모두들 그저 상황을 뜨악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와중에 우주가 막히지 않은 입으로 중얼거렸다.

“하하, 좀 갑작스럽네요…”

“…원하는 것 같아서.”

“그거 저번에 끝난 거 아니었어요?”

하린은 살짝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아직.”

갑자기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새하얄 정도로 꽉 쥔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돌아보는 이재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저 아래를 노려본 채, 소녀는 내뱉었다.

“피곤해서요, 이만 들어가 쉴게요. 수고하셨어요.”

이윽고 소녀는 빠른 발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 문을 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우주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잠깐 실례할게요!” 여자들을 지나 소녀의 뒤를 쫒아가려는 우주에게 이재는 소리쳤다.

“우주 씨!”

우주가 멈춰 서서 되돌아보자 이재는 이어서 말했다.

“도망치지 마! …도망치게 두지도 말고!”

우주는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재를 바라보고는 이내 다시 몸을 돌려 소녀를 쫓아 나갔다. 이재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내 직원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계속하여 가게 안은 재차 떠들썩해졌다. 잠자코 마저 떡볶이를 우적거리는 이재 옆에 하린이 앉았다. 그리고는 음식에 손도 안 댄 채 이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 뭐야?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하린의 시선을 느낀 이재가 황급히 볼과 입가를 손으로 매만졌다. 하린은 조용히 말했다.

“…매니저님이랑 싸울 때마다 부조리장님이 사 오는 게 이 집 떡볶이였죠.”

“그랬나?”

이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린은 다시 조용히 말했다.

“…오늘 우주 씨를 부른 건 비번인 부조리장님이고요.”

“그렇겠지?”

“…지정해 준 게 아니면 떡볶이 사겠다고 여기서 차로 이십 분은 걸리는 가게까지 가진 않죠. 우린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건데.”

“바보, 쟤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동료인 우리한테 잘 해 주는 거잖아?”

“…정말 그게 전부일까요?”

“…”

이재는 말없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하린의 눈을 보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하린은 잠자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이재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마지못한 이재가 입을 열려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하린은 이재의 양 볼을 꼬집었다.

“으이익!”

“…도망치지 마.”

“아하! 아흐하호! 므으여으호으호히하흐허하!(아파! 아프다고! 무슨 영문 모를 소리 하는 거야!)”

“…도망치게 두지도 말고.”

“*^&^%@^%&^^(%#%!!”

현지는 차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말려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들 이쪽 테이블을 애써 모른 체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계속했다. 보다 못해 총주방장의 어깨를 톡톡 치며 구원을 요청했지만 “일어날 일이었겠거니 하고 내버려둬~” 하고 태평한 반응만 돌아왔다. 자신이 복마전에 걸어 들어왔음을 새삼 현지는 실감하고야 말았다.


소녀는 비 내리는 거리를 우산도 없이 내달렸다. 가게 사람들에게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다. 창피해서 내일 출근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얼굴로 동료들을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우주가 친구라고 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이재와 하린과 현지가 그런 식으로 장난을 쳐도 자신이 정색할 일은 전혀 아니다. 정색을 해도 우주가 직접 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주는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받아주었다.

소녀는 우뚝 하고 그 자리에 섰다. 아프고 열이 나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몸을 움직이며 비를 맞고서야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동료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화가 난 것은 우주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신이 우주를 탓한단 말인가.

잠시 후 소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머리와 어깨에 더 이상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퇴근한다고 했잖아. 따라오지 말고 더 놀다 가면 될 걸.”

“누가 우산도 없이 퇴근해? 감기 걸려서 내일 못 나가면 어쩌려고.”

우주는 소녀를 대하는 언제나의 말투로 응수하며 왼손에 쥔 우산을 내밀었다. 소녀는 묵묵히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잘 쓸게. 어서 돌아가 봐. 다들 기다리니까.”

“바보냐, 너도 없는데 내가 거기 더 앉아 있어봤자 뭐하냐?”

우주는 혀를 쯧쯧 차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티켓 한 장을 소녀의 교복 상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소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음 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우리 가게로 와. 좋은 데 구경시켜 줄 테니까.”

“…”

“용건은 그거야.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고.”

우주는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다섯 발자국쯤에 우주는 자신의 옷자락이 당겨지는 걸 느끼고 멈춰 섰다. 소녀는 우주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물었다.

“우주 씨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

“질문을 바꿀게. 이런 내가 싫지 않아? 우리의 만남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지금도 크게 차이는 없잖아.”

우주는 한동안 대답 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리고는 허리를 숙여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우주는 입을 열었다.

“우선,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해.”

그리고는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 곁을 맴돌 정도로 악취미도 없고 비위가 좋지도 않거든.”

소녀는 얼굴을 붉힌 채 잠자코 우주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우주가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인 것도,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인 것도, …그런 우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도 말이다. 애써 그런 자신을 부인해 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평생을 걸고 실천해야 할 단 하나의 약속, 그를 위해 이제까지 혼자 힘내 왔다.

“…아직 약속을 못 지켰어.”

소녀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잘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우주의 물음에 소녀는 잠자코 머리에 올려진 손을 잡고 내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잠깐만!” 불러 세우는 우주의 목소리에 소녀는 멈춰 서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늦지 말고! 올 때 그 머리 하고 와!”

“…기대할게.”

소녀의 미소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소녀는 다시 우주를 뒤로 한 채 걸어갔다. 우주는 더 이상 소녀를 불러 세울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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