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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Aug 25. 2023

시작부터 다 예상 밖

2023년 8월 1일 인천

이번 여름 휴가는 일주일 남짓 집을 비우기 때문에 모든 대청소를 깨끗하게 다 끝내놓고 여행길에 오르려 했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기분도 좋고 내가 없는 사이 집에서 미생물이나 곤충이 번식할 염려도 차단하기 위해. 하지만 주말에는 도무지 움직일 기력이 나지 않았고 월요일에 성가신 회사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짐을 싸기 시작하자 금방 새벽 두 시가 되었다. 출국은 화요일 아침 10시 반이었다. 직항이 없는 몬트리올까지 가기 위해서는 한 번의 환승을 포함해 거진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야 한다. 시간에 맞추려면 아침 여섯 시 반에는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아직 설거지도, 분리수거도 안 돼 있는데… 혈압이 쭉쭉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알람을 새벽 네 시로 맞추고 잠깐 침대에 누웠다. 두 시간만 쉬어야지. 불현듯, 잠깐 감았던 눈을 뜨니 밖이 환하고 몸이 가벼웠다.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 반이었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좆됐다”고 소리쳤다. 공항 리무진 버스는 탑승 시간도 못 맞출 뿐더러 인천 공항의 2터미널까지 가는 데에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린다. 네비를 찍어보니 자동차로는 50분 컷이다. 여덟시 반까지만이라도 공항에 도착하면 세이프다. 차로 10분이면 오는 거리에 사는 아빠에게 전활 걸었다. “아빠! 나 지금 일어났는데 공항 데려다 줄 수 있어?” 아빠는 나처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어이구 어이구 어이구"라고 대답했다. 정말로 10분만에 도착한 아빠의 차가 집 앞에 정차했고, 여전히 엉망이고 더러운 집을 그대로 둔 채, 아직 열려있던 캐리어에 옆에 널브러진 물건을 손에 쥐는대로 모두 구겨넣었다. 쓰레기통은 비워야 될 것 같아 그 와중에 종량제 봉투를 꼭꼭 묶어 캐리어와 같이 들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머리는 감고 나오고 싶었는데 세수도 못하고 떡진 머리에 모자를 눌러 썼다. 


다행히 아직 체증이 없는 도로를 달려 제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했다. 시간 딱 맞으니 뛰지 말라고 소리치는 아빠를 뒤로 하고 허둥지둥 체크인 카운터와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분명히 빼놓고 온 것들이 있을 것 같았지만 제 시간에 비행기를 타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게이트 앞에 앉아 그제야 한숨 돌리며 면세점 픽업대에서 찾아온 노이스 캔슬링 헤드폰의 포장을 뜯고 전원을 충전 했다. 보스 헤드폰의 베이스 소리는 만족스럽게 쿵쿵 울렸다. 안전 문제 때문에 탑승이 한 시간 지연된다는 문자가 왔다. 안전문제라니, 승객들의 짐 검사에서 뭔가가 나왔나? 홍정욱 딸 같은 나르코스가 있는 걸까 상상하며 음악을 들었다. 


한시간 후, 또 한 시간이 더 지연 된다는 문자가 왔다. 불길했다. 델타 항공은 승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불편을 참고 기다려 달라는 방송을 했다. 다시, 두 시간 정도가 더 지연 됐다. 이렇게 되면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연결편 탑승에도 문제가 생기는데 어떻게 되는거야?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옆 의자에 앉아있던 한인 가족의 이름이 불렸다. 카운터에서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전달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우리 비행기 못 탄대.” “뭐?” “지난번이랑 똑같은 문제래.(안 들림) … 그럼 집에 가 있어도 되냐 하니까 된대.”


무슨 일인지 너무 궁금했는데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미국인 기장이 영어로 안내 방송을 시작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비행기에서 계속 타는 냄새가 나고, 캐빈 전체에서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라 기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듯 한데 어느 부분이 과열 됐는지 원인을 못 찾았습니다. 기온이 너무 높아서 생긴 문제 같습니다. 델타 항공은 승객분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어쩔 없이 비행을 취소...” 여기서부터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져 뭐라는지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살면서 비행편이 취소 돼 본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상 고온으로 인한 기체 결함이라… 취소 방송이 나오자마자 승객들이 벌떼처럼 카운터로 몰려갔다. 불같은 성격의 히스패닉 승객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직원들이 뭐라뭐라 안내를 하는 말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롯데면세점 직원이 비행이 취소되어 면세품을 회수해야 한다고 했다. 친절하게도 게이트 앞까지 찾아온 롯데 직원에게 이미 포장을 다 뜯은 헤드폰을 내밀며 “환불은요?”라고 묻자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재출국 일정이 잡히면 그 때 물건을 다시 찾아갈 순 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의 피해야 어찌됐건 자기네 손해부터 최우선으로 처리하는 대기업에게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근데 비행편이 취소된 건 제 과실도 아니고 저는 결국 물건 수령도 못한 상황인데 환불은 어떻게든 처리를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따발총처럼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모두가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잘 들리지도 않았고, 롯데 직원은 잘 알아 듣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무적으로 공감한다는 의미의 미간 찌푸림과 어쨌든 자기 잘못은 아니잖냐는 의미의 고개 끄덕임으로 응대한 뒤 다른 면세품을 회수하러 빠르게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 서 있던 백인 남자들이 “이태원 다녀올까?”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이 꽃밭이라 좋겠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나 감고 나올걸. 설거지나 하고 나올걸. 집에 돌아가서 청소나 할까. 비행기를 놓쳐보거나 환승에서 문제를 겪어본 경험자 친구들이 빨리 카운터에 가서 어필을(무엇을?) 하라고 해서 일단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는데, 기가 다 빨린 표정의 한국인 직원이 앞으로 나아 오는 나를 보자마자 “호텔과 이틀치 식사가 준비 돼 있으니 이 안내를 따라주세요”라며 에이포 용지 한장을 내밀었다. 인천 하얏트까지 델타 항공에서 셔틀 버스를 운행해 주고 머무는 동안의 식사를 모두 책임져 준단다. 목적지까지의 비행편은 환승을 포함해 델타에서 모두 알아서 재예약을 한다고도 쓰여 있었다. 비행기에 실렸다가 다시 토해진 짐을 찾으며 나는 집에 가려던 마음을 바꿔 호텔로 가기로 했다. 안 간다고 호텔비를 돈으로 주는 것도 아닌데, 나도 보상을 누려야 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공짜 호캉스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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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얏트 호텔 East 건물 뷔페 식당 앞에서 델타 승객이라고 말하며 방 번호를 대면 공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오니 한국인 호텔리어는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 뒤 "델타?"라고 물으며 복장 검사 하는 학생주임 선생처럼 쭈욱 인간 띠를 훑었다. 저녁 시간이 되니 식당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한 두명씩 온 사람들에게 직원이 합석을 권유했다. 같은 식당에서 이미 한차례 점심밥을 먹고 푸지게 낮잠을 자다 나온 나는 아무 불만 없이 안내에 따랐고 동남아에서 온 것 같은 여성과 둘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됐다. 여기서 출발이냐 혹은 환승이냐는 질문으로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여성은 미네소타(아니면 미시간인가? 벌써 기억이 흐릿하다)에서 일을 하는 싱글맘인데 미국에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고향인 필리핀에 있는 가족에게 맡겼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인천에서 환승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이런저런 의미없는 신변잡기 이야기도 하고 한국 음식,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태양의 후예>가 최애 드라마라고 했다. 통성명을 했는지 안 했는지, 했더라도 제대로 들었는지도 모를 정신이라 우리는 적당한 타이밍에 "내일 비행기에서 볼 수 있으면 보자"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저녁밥을 소화시킬 겸 옆의 파라다이스 시티로 산책을 갔다. 파라다이스 시티의 정원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다. 완전히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영종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앞뒤가 안 맞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가본 적 없는 라스베가스가 이런 분위기인가 상상하며 파라다이스 시티 내부를 거닐었다. 트리 사진을 올린 인스타 스토리를 본 친구가 디엠으로 파라다이스 시티 로비에 있는 라운지 바가 엄청 핫하다던데, 거기에 가보라고 했다. 나는 휑뎅그레 놓여진 데미언 허스트의 조각 위로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삑삑대는 운동화 소리가 울려퍼지는 로비 영상을 찍어 보냈다. '여기 맞아?' 친구에게 재깍 답장이 왔다. '미안, 그 얘기 들은거 2017년인가 18년인가 그래.' '코로나 전이잖아.'


파라다이스 시티의 내부는 기이할 정도로 넓었다. 진격의 거인마냥 거대한 코즈Kaws의 조각상이 내려다 보는 실내 광장은, 인터넷 사진으로 본 핀란드의 공원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얼마나 많은 입장객이 어떤 동선을 구성할거라 생각하며 이렇게 공간 안배를 했을까. 아니, 매우 냉소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진짜 궁금한건 아니었다. 수사학적 표현일 뿐이다. 게이트 앞에서 본 승객들을 파라다이스 시티 안에서 계속 마주쳤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호텔에서 공항으로 향하는 델타의 셔틀이 출발한다는 공지가 왔다. 방에 돌아와 며칠 전처럼 느껴지는 오늘 아침의 난리법석을 떠올리며 나는 핸드폰 알람을 5분 간격으로 세 개를 맞추고 새하얀 베개 위에 머리를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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