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ot 9-10월
한여름에 태어나 그런지, 내 몸은 두터운 습기를 당분처럼 빨아들인다. 슈거하이가 온 사람처럼 여름 내내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 창문가에 문득 찬바람이 깃들면 어깨가 결리고, 기분도 근육통 따라 침잠한다. 사실 한국의 가을이란, 내내 에어프라이어 같이 뜨거운 바람이 불다 불현듯 싸락눈 휘날리는 계절 아닌가. 작년 9월, 추석 연휴 전날 나는 친구들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 갔다. 6월에 취소됐던 엔시티드림의 첫번째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내 인생에서 H.O.T. 이후 두 번째로 좋아하게 된 아이돌인데 90년대 말의 콘서트는 하얀 우비 차림에 하얀색 풍선을 들고 몰려가 다른 색 풍선을 든 언니들과 기싸움, 몸싸움도 불사해야 했기에, 초등학생인 내가 낄 자리는 아니었다. 2022년의 아이돌 콘서트에서는 쌈박질은 커녕 앉은 자리에서 머리 위로 팔을 올려서도 안 됐다.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없었다. 주변에 앉은 다른 팬들의 시야와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정숙한 몸가짐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고유의 색깔만큼은 남아 있었는데, 풍선을 대체한 플라스틱 응원봉들이 형광 연두색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3만명이 입장한 이 공연장 속 응원봉들에 건전지가 몇 만개 들어갔을까 상상했다.
나란히 앉은 친구들과 벅차 오르는 마음에 공연 중간중간 더듬거리며 손을 마주 잡았다. 얌전히 환희를 표현하는 방법은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서로의 손을 꽉 쥐는 것밖에 없었다. 상기된 체온에 티셔츠 안으로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경기장 입구에는 누군가 사랑하는 아이돌의 얼굴을 넣어 만든 부채 몇 백개를 박스째 쌓아 두었다. 같은 팬이란 이유만으로 호의를 베풀어준 신원불상의 소녀에게 감사한 맘으로 힘껏 부채질을 했다.
공연 중간 암전 후 가수가 옷을 갈아입고 무대 장치도 교체하는 시간, 보통 관객들에게 반주를 틀어주고 ‘떼창’을 시킨다. 전광판에는 <헬로퓨쳐> 가사 자막 위로 노래를 부르는 관객들이 송출되고 있었다. 새까만 공연장 속에서 빛나는 연두색 응원봉 물결은, 마치 아마존 밀림 반딧불이 투어 보트를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연두색 반딧불이들의 <헬로퓨쳐> 합창이 울려 퍼지는 잠실주경기장 하늘에, AAA 건전지 세개를 넣은 응원봉만큼 밝게 빛나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주경기장을 나온 우리는 인파의 농도가 옅어질 때까지 삼성역 방향으로 걸었다. 탄천에서 불어오는 가을 밤바람이 땀에 절은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밤, 우리는 통이 틀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나는 말려가는 혀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렇게, 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몇 만명이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이런 사랑을 받고도! 사고나 치는 애들은 인간 말종이야!” 거하게 취한 우린 설령 엔시티드림이 인간 말종이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생겨도 평생 친구로 지내자며 새벽 5시에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사계절이 한 바퀴 돌아 딱 1년이 지났다. 여전히, 핸드폰 앨범 속 그 날의 영상을 보면 둥근 달 아래 뻘뻘 땀을 흘리던 공연장의 온도가 느껴진다. 당분간 나의 가을은 계속 한여름 같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