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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night and Jun 11. 2023

나에게 열등감을 준 친구의 기억

5-6월 Snoot 수업 세번째 주제

A의 말은 늘 거짓인지 진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늘 사람의 심중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는데 처음 그 레이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A였다.


A는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자기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알게 된지 1년쯤 됐을 때였을까, 우리는 방 안에 젓가락처럼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는 늘 자신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그렇게 느닷없이 했다. 어떤 이야기든 거침이 없었고 상대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지 여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A는 고등학생 때 사귄 여자친구가 첫사랑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운동부였던 A는 학교 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친구들과 웃엇을 벗고 바디페인팅을 한 채로 학교 앞 길거리에서 전단을 뿌리다가 같은 동네 여대 4학년 학생과 만났다. 그들이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으며 운동부 고등학생들의 탈의한 상체를 살펴보던 그 여자가 자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 여자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A와 만나면서도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모텔에서 만났다. 여자는 대실비를 지불하고 만남이 끝나면 A에게 치킨이라도 먹으라며 용돈을 주고 먼저 방을 나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것이 보편적인 여자친구의 정의가 맞나 싶었지만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혼자 그 방에 남겨졌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설명하는 A의 감정이, 내 눈에 기이하도록 진실돼 보였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던 내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저것이 대한민국 고등학생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도무지 의아했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 살짝 혀 끝을 대고 맛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A는 누군가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눕는걸 싫어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도 이 사람만큼 진실할 순 없을거라 생각했다.


A는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매 순간 진심이어서 모든 것이 거짓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동시에 그가 겪은 에피소드들은 도대체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것들이었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뭐하러 이런 이야길 지어낼까? 이야기를 파는 작가도 아니고, 사람들 사이 화제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닌, 그냥 나에게만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에. A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사람이 나란 생각에 우쭐했다. 당시 진로 고민에 찌든 백수였던 나는 '있어 보이는' 직업을 갖고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A의 사회적 성취들이 대단해 보였고 그런 사람의 황당한 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내 자신은 또 얼마나 특별한 인간인가 싶었다.


A는 내가 처음 조우하는 여러 세상의 얼굴이었다. A가 겪어온 것들을 나도 갖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 그의 감정들이 내게도 있었으면 했다. A 옆의 나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무채색의 인간 같았다. A를 지켜보는 나는 늘 그를 향한 애정보다 그와 대비되는 무색무취의 나에 대한 신경질로 더 가득했다.


함께 몇 계절을 보낸 후 나는 A를 온전히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만 아는 비밀이라 생각했던 이야기들도 얼마나 많이들 알고 있는지, 자기에 비해 내가 얼마나 안온하게 자란 것인지 태연하게 강조하던 A를 떠올리면, 그 땐 모든 걸 듣는 대로 믿을 만큼 순진했구나 싶다. 지금도 종종 나를 초라해 보이게 하는 사람을 열망하는 나의 기질을 들여다본다. 내 손이 닿지 않고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만이 나의 동력인가, 의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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