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강국 코리아의 영어환경
텔레비전이 초등기초교육의 상당부분을 해결해주던 시절이 바로 얼마전이다. 뽀뽀뽀를 비롯 딩동댕 TV 유치원과 같은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30-40대가 많을 것이다. 학교에 가기전에 혹은 유치원에 가기전에 매일 아침 꼬박꼬박 방영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아이들은 한글을 배우기도 하고, 숫자를 배우기도 하고 친구와 사귀는법, 부모님과 잘 지내는법을 배우기도 했었다. 물론 아직도 케이블 채널이나 교육방송을 통해 그런 방송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만큼 쉽게 시청할 수 있는 대표적 프로그램은 없는 것 같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선방송 채널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아이에게 적절한 방송을 찾는건, 아무리 간편한 리모콘이 있어도 부모들에겐 늘 아득한 과정이다. 특히 인터넷이 전면적으로 보급되면서 매스 미디어의 첨병이라고 하는 텔레비전의 위상은 위축되었고, 텔레비전으로 한글을 익히던 아이들은 이제 인터넷 앞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ABC를 배운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텔레비전에는 오직 4개의 채널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MBC, KBS1, KBS2, 그리고 AFKN. 채널 2번에서 방영되던 미군방송에는 꽤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비록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린 나이었던 탓에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듣는 것이 그닥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서 미국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한국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외화를 보기도 했었다. 특히 세사미 스트리트는 고정적으로 방영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무료했던 나의 중학교 생활의 싸이클과 중첩되면서 나는 그게 어떤 프로그램인지도 모르고 꽤 자주 시청했었다. 그랬던 탓에, Big Bird 나 Cookie Monster, Elmo와 같은 캐릭터들이 한국에 많이 알려졌을 때, 나는 그 희미한 어린시절 다리와 뚜껑이 달린 티비에서 보던 세사미 스트리트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 알다시피, 이제 텔레비전은 거의 모두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케이블 티비로 전환되었다. 이전처럼 무료로 제공되던 프로그램들도 이제는 모두가 돈을 내고 봐야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히스토리, 비비씨, 씨앤앤 등의 대표적인 영어프로그램들도 결제만 한다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영어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프리즌 브레이크, 가십 걸, 섹스 앤더 시티, 텍스터, 위기의 주부들, 이벤트 등등과 같은 셀 수 없이 많은 영어권 드라마들은 원하기만 하면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쉽게 볼 수 있다. 흥미와 재미 위주의 프로그램들이긴 하지만 영어권의 많은 프로그램들이 인터넷이라는 채널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즐길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영어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인터넷 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드라마 잉글리쉬, 무비 잉글리쉬, 팝송 잉글리쉬 등의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고 있다. 이것은 IT 강국이라는 별칭이 어색하지 않은 한국의 놀라운 인터넷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것만으로 본다면, 한국의 인터넷 인프라는 정말 영어교육의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인터넷으로도 채널이 열리지 않는 많은 웹사이트들이 있다.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 영국의 BBC, 아이들의 교육방송인 영국의 Cbeebies, 인터넷 Sesame Street 등의 사이트는 그 다양한 컨텐츠를 한국에 제공하는데 많은 제한을 두고 있다. 사실상 실질적으로 유용한 컨텐츠들은 저작권의 문제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만약 이러한 컨텐츠들이 자유롭게 열리게 된다면 누구든지 인터넷 환경만으로 그러한 프로그램의 교육적 효용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번 PBS 사이트에 들어가서 당신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티비쇼를 클릭해 보라. 셜록도 좋고, 다운튼 애비도 좋다. 그럼 분명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뜰 것이다.
“We're sorry, but this video is not available in your region due to right restrictions.”
한국은 한해 영어 사교육에 쏟아 붓는 비용이 추산하는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8조에서 10조 사이의 규모이다. 약 20조정도로 추산되는 전체 사교육비의 절반 가까이 된다. 그 정도의 비용이 사회적으로 지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영어수준은 북한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며 특히 말하기 수준에서는 우간다, 소말리아, 르완다와 같은 국가들보다도 낮다. 흔히 말하는 고비용 저효율은 바로 이런 경우 아닐까.
흔히, 영어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영어에 대한 노출을 최대화 하는 것을 중요하게 거론하는데, 실제 북유럽의 방송환경은 전체 방송의 50-60퍼센트가 영어권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영하고 있다. 그런 만큼 생활속에서 접하는 영어의 노출 빈도가 많은데, 그러한 환경은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등의 높은 영어수준과 여하간의 상관관계는 분명 있을 것이다. 한국은 영어에 대한 환경을 조성한다기 보다, 영어를 가르치고 공부만 하려고 한다. 이미 구한말 시기부터 영어는 사회적 출세의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러한 경향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고 또 더욱 심해졌다. 이광수의 소설에도 영어선생이 등장해 영어가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가장 큰 두가지 문제는 뭔가? 바로 “한국” 에서 공부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쟁력이다 뭐다 하면서 전국민적인 영어교육을 역설했던 정부에서도 영어교육의 문제는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았고, 한국은 영어교육의 문제를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만 여긴다. 정부와 기업은 근거도 없으면서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구호만 개인들에게 학습시키려고 한다. 당연히 비용은 학부모들 개개인의 몫이다.
인터넷의 환경과 영어사교육에 들이는 비용의 함수 관계를 생각해볼 때, 보다 합리적인 대안은 사교육의 비용을 아주 약간만 인터넷 저작권 이용료로 돌리는 것이다. 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볼거리, 읽을거리, 들을 거리들을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접하게 된다면 영어적 환경을 구축하는게 훨씬 더 쉬워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쉽게 접하는 광고와 다양한 드라마, 르포, 뉴스, 다큐멘타리, 영화, 코메디등을 영어로 접하면서 조금이나마 영어를 문화적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대하지 않는다.
한국 영어교육의 문제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는게 아니라, 바로 무엇이 문제인지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0조에 육박하는 영어사교육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입장으로서는 바람직한 사회적 차원의 영어교육을 달갑게 맞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인터넷과 티비에서 지금보다 더 다양한 영어권 방송 프로그램을 훨씬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영어사교육기업의 입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영어권 프로그램들은 제한된 루트를 통해서만 제공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런 배경이 있으니 IT강국 코리아에서는 그 흔한 세사미스트리트도 PBS 의 드라마도 BBC의 iPlayer도 볼 수 없는게 당연하다. 채널은 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막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이건 나만의 추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