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지오 Jan 27. 2021

동정, 연민, 공감

수평적인 동정의 가능성을 위해

얼마 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방역에 대해 정리한 독일 신문 기사를 읽었다. 요점은 아시아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의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두 번째로(흥미롭게도) 아시아의 행정수반들이 대체로 학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유럽의 경우 반대로 대부분 직업적 정치인들이었다. 즉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아시아는 과학적 신뢰를 기반으로 해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PISA보고서로 증명되는 아시아의 높은 학업성취도도 제시돼 있었다. (Die Welt, 2021.1.22 6면 "Wer sich mit Corona infiziert, wird öffentlich verurteilt"


흥미로운 기사였는데 나의 생각을 오랫동안 잡아 끄는 것은 한 단어다. 기사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Wer sich in Deutschland mit dem Coronavirus infiziert, dem ist in Normalfall das Mitgefühl seiner Mitbürger sicher. In ostasiatischen Landern wie Japan, Südkorea oder Singapur ist das aners.'


이를 거칠게 힌국어로 써보자면,  '누군가 독일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일반적으로 시민들은 이 확진자에게 Mitgefühl을 가질 것이다.  일본, 한국, 싱가포르와 같은 동아시아에서는 다르다.'


출처: 네이버 독일어 사전


Mit은 영어의 with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Gefühl 은 feeling이다. 즉 함께 느끼는 느낌인데 누군가의 불운이나 불행에 느끼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감'과는 다르다. 사전에 Mitgefühl을 찾아보면 '동정'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하지만 동정이라는 단어를 쓰기 어색한 것은 아마도 이 단어가 숱하게 폄하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다음과 같은 용례를 제외하고는 동정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날 동정하지 마!"

"동정 따윈 필요 없어"

"지금 동정하는 거야?"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동정받는 것을 저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동정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불균형이기 때문인 것 같다. 왠지 나보다 (처지가) 못한 사람에게 동정을 받으면 '네가 감히 날 동정해?'라고 말해야 할 것 같고 나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이 날 동정할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울부짖는 것이다. 동정이 이토론 조심스러운 것이라면 연민이라는 단어도 생각해봄직 하다. 하지만 내 느낌에 연민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라는 점에서 Mitgefühl과는 다르다. Mitgefühl 에는 단순히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 이상으로 타인을 향한 연대감이 포함되어있는 단어인 것 같다. 


이런 감정을 한국어로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누군가가 불쌍해서가 아닌, 누군가를 안타깝게 여길 여유가 있어서도 아닌, 그의 불행이 나를 슬프게 하기 때문이 아닌, 타인의 불행을 그저 기꺼이 함께 느끼기에 느끼는 감정에 우리는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실패한 유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