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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 여경 Oct 11. 2021

꿈 없는 인생이 더 행복할 수 있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살아야 할 이유는 많아요


불복종은 자유의 참된 토대야. 복종하는 사람들은 노예나 다름없다고.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







“그래서 너는 꿈이 뭔데? 한심한 놈.”



드라마를 보면,

방황하는 아들 혹은 딸에게

아버지가 습관적으로 던지는 질문이 있다.


꿈. 이 단어만 들어도 가슴 떨리고 두근대던 날들이 있다.

그쯤 나는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한 채

매일 새벽에서야 귀가하던 스무 살의 대학생이었다.


스무 살.

누군가 스무 살을 뭐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나이라 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겐 누군가에게 그저 큰돈을 주고

팔아버리고 싶었던 시간. 막막함. 갑갑하고

괴로운 그날들. 앞날이 막막해 보이는 불안들.

자유라는 이름에 가려진 안개 같은 미래 따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형태는 달라도 이 시기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의 레퍼토리는 이렇다.

대학 입학까지 미친 듯이 수능만 바라보며 공부했는데 대학 오자마자 이게 내가 바라던 자유의 삶인가 행복인가 의문이 들고

그렇다고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때 동아리 선배들이 밤마다 신입인 나를 불러줄 때

마치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마냥 술자리에서 신나게 분위기를 맞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술이 나를 잡아먹었다.

주객전도랄까,

나는 선배들이 부르지 않아도

친구들을 불러 밤에 술을 마시러 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위험한 순간들도 생겼다.

눈을 떠보니 공중 화장실 칸에서 자고 있다던지 낯선 곳에 누워있던 날들, 혹은 차마 공개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들.


술 자체가 좋았던 건 아닌 거 같고

그냥 남들이 말하는 바른 삶에 반항해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아침 강의에 늦는 일들이 내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넌 대체 꿈이 뭐냐”

그런 나를 아빠는 늘 못마땅해했다.

대학 졸업도 전에 여러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며

당당하게 젊음을 보냈던 우리 아빠는,

(나는 어린 시절 지겹게 이 무용담을 들어야 했다)

쉬는 날이면 수학과 물리학 문제를 풀며 늘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있던 아빠는

늘 스스로에게 자신감에 넘치는 분이었다.

당연히 피를 이어받은 당신의 자식들도 그래야 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우리 남매를 키우며 집안일을 홀로 도맡아 하는 엄마에게는 무심했고

나가서 일을 하며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엄마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자식들과 함께 보내 줘야 할 시간을

일주일에 한 번 멋진 레스토랑에 데려가

비싼 소고기를 썰게 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던 중 내가 청소년기일 때

돌연 자기 꿈을 이루고자 사업을 하겠다며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이후에 서서히 사업이 기울어지고

사기까지 당하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초라해지는 자신을 대신해 내가 더 성공해주길 바랬다.


어린 시절 아빠는 미국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흥분된 목소리로 내가 후에 미국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나열했다.

나중에 내가 세계 무대에서 일하길 바란다고

압박을 주었고 자신은 너무 늦었다며 못다 이룬 꿈을

내가 이뤄주길 바랬다.


나는 학교에 있는 시간이, 집에 있는 시간보다 행복했다.

집에 가기 직전 나의 하굣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두렵고 초조함을

동반한 지옥의 터널 한복판이었다.

하교하자마자 영어 원서를 읽으라며 강요하고 해석하지 못하면

온갖 모진 말과 자존심 깎아내리는 말로 어린 나를 자극하셨다.

풀 수 없는 고등학교 이과 수학 문제를 내밀고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불호령을 내리던 아빠가 나는 무서웠다.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그래. 인생을 오래 산 어른이 하는 말이야.

내가 잘 되길 바래서 그러는 거야. 이때 조금만 고생하면 나는 어른이 돼서 행복해질 거야.

나는 어떻게든 아빠의 마음에

흡족한 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성실하긴 했으나 그리 똑똑하진 못했던 아빠 딸은

고3 때 수능 공부 대신 저녁마다 근처 대학가에 토익학원을 다니며

대학생 언니들과 공부를 했지만,

막상 수능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정당한 변명이 있었다.

수능을 앞뒀을 때는 아빠의 사업이 더 어려워져

아빠는 더 이상 내게 외국 살이를 지원해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사실에 많은 자괴감을 느끼고 계셨기에 나도 굳이 외국에 더 이상 가서 공부해야 할

정당성이 사라진 거다.




잘되었지 뭐.

나는 어차피 그럴 능력도 없는 인간인데.



하지만 생각보다

아빠가 내게 심어준 꿈은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근처 대학에 원서 마감 하루 이틀 전쯤 되어서야

부랴부랴 담임에게 내가 아직 원서접수를 안 한 걸 들은 엄마는,

내게 집의 상황도 어려워졌으니

지방 교대를 가는 게 어떻냐고 담임선생님과 번갈아 전화하며 설득을 거듭했다.

“싫어 난 대학 안 가.”

나는 완강했고 등록금 마련도 쉽지 않아

근처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된다.

당시 나는 내가 입학할 학과 이름도 정확히 몰랐다.




아무 희망도

아무 의지도

아무 생각도 없이 대학생이 된 나에게

술에 취하는 일은 현실도피의 좋은 수단이 되었다.




과거에 당당했던 아버지

나의 우상이었던 아버지는 초라해졌고

더 이상 내게 뭔가를 강요하지 않았으니 분명 기뻐야 하는데,

내가 뭘 위해 살았는지

나는 이제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졌다.




어느 날 새벽 네 시.

당시 내 방 창문은 밖에서 몰래 넘어 들어오기에 적당히 컸고

나는 그렇게 술을 먹으러 몰래 다니다가 그날도 창문을 잘 넘었는데

방 침대에 앉아 기다리던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젠장.


아빠는 나를 거실로 부르더니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앞으로 니 계획을 적어봐. 납득이 되면 인정해주마.”





뭐 대략 이런 말씀이었다.

계획?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난 외치고 싶었다.

더 이상 당신의 인정이 필요 없다고.

나는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사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놈의 계획이요.


내가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는지

혀 밑에 잘 감춰두었는지 오래되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성인이 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맞았다.

그날 이후 아빠는 내게 별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에 대한 기대를 버렸기를 간절히 바라며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딸에 대한 기대를

놓아주지 않기를 바랐다.


..


..


어른들의 어떤 조언도

tv에 나오는 자기 계발서 강사들의 강연도

다 헛소리이자 비웃음으로 흘러 보내던 어느 날.

약간의 변화가 생긴 사건이 있었다.



두 가지 전공을 가지고 있던 나는

중간고사에서

한 과목은 꼴등 점수를,

한 과목은 1등 점수를 맞았다.

심지어 100명이 넘는 그 반 학생들 중

유일한 100점이었다.

그런데 그 시기를 기점으로

나는 내 삶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뭐야 100점이 반에서 한 명인데…. 그게 쟤라고?

나랑 시험 전날 밤에도 술 마셨는데?"


“동명이인 아니야? 다른 과목들은 다 망쳤던데.”


내가 백 점을 맞은 시험의 교수는

성적을 짜게 주어 굳이 의무 전공이 아니면 피해야 하는 분으로 악명 높았고

객관식이 아닌 오픈북 테스트, 서술형 시험이라 선배들도 혀를 찼다.

(술자리에 자주 가면 이런 정보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정해진 분량도 없고 그냥 원하는 만큼 적고 나가면 되는 시험.


워낙 내가 캠퍼스에서 새벽에 술 먹고 다니는 게 소문이 났던 지라

당시 애들 사이에서는 알고 보니 저 애가 천재라더라 혹은

교수와 원래 알던 사이라더라 등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내 친구들도 믿지 않겠지만

심지어 나조차도 믿기지 않지만

그 전날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학교 캠퍼스에서 술을 잔뜩 먹고 단대 건물로

새벽 네 시쯤 들어와 보니

무슨 이유인지 동아리 방이 잠겨있었다.

할 수 없이 잠을 잘만한 문 열린 곳을 찾아다니는데

단대 독서실에 환한 빛이 보였고

놀랍게도 그 시간까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내일 시험인 걸 몰랐던 건 아니다.

그냥 어차피 수업을 제대로 못 들었는데

시험지에 뭘 쓸 수 있나 싶었다.

그냥 내 이런 삶이 싫었고

나는 망가지고 싶었고 나를 비웃었고

나를 동정하는 걸 즐겼다.


그런 찰나 책상 앞에 앉아 그 시간까지

뭔가 열심히 하는 또래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났다.

일교시 시험. 남은 시간은 대략 네 시간 정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내 사물함에서 전공책을 꺼내

나는 자리에 앉았다. 오픈북이었기에 도저히 어디가 나올지 몰라 그냥,

내가 그 시간에 볼 수 있는 한 챕터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종교가 없었지만 잠깐 눈을 감고

기도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나를 포기하지 않기를.

나를 포기하지 않기를.

나를…….

포기하지 않아 주기를.




이 글을 읽는 분은 예상하셨을지 모르지만

정말 드라마나 영화처럼,

딱 한 문제가 출제되는 그 시험은 거기서 나왔다.

오히려 오픈북이라 넓은 범위를 공부한 친구들과 달리, 나는 직전에 그 부분만 봤기에 문제를 보자마자 무엇에 대한 내용인지 단번에 찾을 수 있었고

그나마 빠르게 그 주제에 대한 간단한 요약과 내 생각들을 써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 반에서 유일한

백 점의 이유가 될 순 없었다.

똑똑한 애들이야 메타인지가 뛰어나

자신이 맞은 정답의 이유를 안다고 하지만

나는 도무지 이유를 몰랐다.

교수님을 찾아가 묻고 싶었지만

지각을 밥 먹듯 하는 나를 기억하실 리도 없고

괜히 불똥이 튈까 봐 차마 찾아가지 못했다.

뭐 당연히 그때의 운은 계속 통하지 않아

그 당시 중간고사의 나머지 과목들은

모두 최악의 점수를 받았다.

이후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교수님께서

‘이번에 잘 썼던데 답안지? 고생했어.’

이런 말을 해주실 거라 기대했지만

그분은 내 이름이나 얼굴조차 모르셨다.

정말 성적에 오류가 났다 해도 납득할 정도였다.


4학년이 되어서야 당시 망친 성적들을 만회하느라

계절학기들로 정신없이 재이수를 하며

공부 좀 할걸 후회했지만

그때의 일로 묘하게 내 마음에 균열이 생겼다.





희망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내가 나를 버렸을 때에도

때로는 기회 혹은 우연이란 이름으로

나 자신을 한 번 더 믿어주라는 메시지 같은 게

살면서 한두 번쯤 다가오는 게 아닐까.


그날 단대 독서실에서 공부했던 잠깐 동안,

내가 술에 취해있었기 때문인 지는 몰라도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밝은 아침햇살이 그렇게 아름답고

눈이 시려 눈물이 나더라.




‘아무거나 해볼까 뭐든?’

거울 속 나는 술 때문에 최악의 몸무게를 찍고 있었고 피부도 별로였지만

그래도 그냥 새로 시작된 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볼까.

아빠가 원하는 대로 말고

꼭 거창한 목표 없이도

그냥 한 번 살아볼까 내 인생?


나는 일단 술을 끊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서서 술자리를 찾아다니던 내가

갑자기 모임들이나 술자리를 끊는다는 게

쉽진 않았지만 방학이 끼어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반항적으로 여러 번 탈색했던 머리색을 진한 검은색으로 죽이고

진지하게 나에 대해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굳이 거창한 꿈이나 목표 따위 없어도 되니 그냥, 하루하루 눈뜨고 지내볼까? 이대로?





그로부터 십 년이 넘게 흘렀다.

이 날 이후로 방황 없이

괜찮은 어른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퇴사도 자주 했고

어느 날은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채

아프리카로도 떠나버렸고

가끔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목표를 가졌다가 실패했다가 좌절해보기도 하고

남들은 다 잘 이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들에 질투를 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방황의 칼날 위를 걷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술은 입에 잘 대지 않고

삶의 이유가 흔들릴 땐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일을 살아 볼 용기를 내본다.

어린 날 아빠가 나를 사랑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그의 애정 방식을 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인정하는 효녀 따윈 되지 않기로 했다.

비록 현실이 더 중요해져서

더 이상 멋진 꿈이라 할만한 특별한 도전을 끊임없이 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들여 쓴 책들이나 브런치 글을 읽으며 감동하고

그 감동으로 하루를 풍성히 채워본다.


나에겐 여전히 내일 눈을 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일 눈 뜨기 위한 거창한 꿈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내게 버거운 꿈과 목표에 갇혀 있느라

나를 괴롭히고 마음으로 여러 번 죽이고 한심하다며 나무라지 않는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 형성된 기본 성향이 단번에 바뀔 수는 없는 거니까. 이게 진실이다.)




누가 내게 “당신은 꿈이 뭐예요? 아직 삼십대면 젊은데 꿈도 없어요?”라고 묻는다면

그 꿈 따위 개나 줘버리라고 대답하겠다.

그 꿈 없이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을 찾을 거라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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