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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 여경 Sep 25. 2021

밀레니얼 퇴사자의 변

꿈을 포기한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가치가 생긴 겁니다

“회사를 누가 좋아서 다니냐

먹고살라고 다니는 거지.”



이 말에 절대 타협하고 싶지 않았던 시기가 있다.

내가 애정 하지 않는 회사라면 어떻게 아침마다 눈을 뜨고 그곳에 갈 힘이 날까.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는 일조차 버거운데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과 사람들 그 무엇도 마음에 안 든 채

그저 월급 때문에 다닌다면 너무 괴롭잖아.



..


..



최근 기사를 봤다. '밀레니얼 퇴사자'.

공무원이나 대기업을 어렵게 들어가 놓고 쉽게 그만두는 사람들,

커다란 메인타이틀과 함께 홀가분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한 이들의 인터뷰도 흘러나왔다.


기사 말미에는 '그럼에도 그들이 퇴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우려를 표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최종적으로 사직서를 던지기까지 마음의 고뇌와 과정은 당사자 외엔 알 수 없다.

자신을 뽑아준 회사에 대한 고마움이 그들이라고 없었을까.

정말 그들은 회사를 나올 때 이기적으로만 생각한 걸까.


어쩌다 상처를 준 직장상사의 꼰대스러운 말 한마디,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밀레니얼 특유의 심경의 변화로

정말 그들은, 그렇게 쉽게 남들이 가고 싶다는 곳을 때려치운 것인가.

1분의 짧은 인터뷰와 매체에 등장하는 일부의 사연으로는 알 수 없는

일들도 많을 거다.



'의원면직'

이 네 글자는 간단해 보이지만

나 역시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말을 한 뒤 세 달 가까이 계속 출근을 하며

인사과와 상사들에게 끊임없이 불려 다녔다.

그들은 어르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보기도 하고 너를 이해한다고 나도 그랬다고

공감의 메시지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선배들의 만류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설득해주는 그들이 고맙기도 하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냥 직장생활을 하며 보낸 세 달과 달리, 사직서를 제출한 뒤의 세 달은 꽤 긴 시간이다.

'걱정 마. 사직서 내고도 다시 취소하는 사람들 많아. 아직 최종적으로 수리 안 했으니

신중하게 생각해 봐. 부모님도 생각해야지.'


그래 부모님. 나는 장녀였기에 그 말이, 더 날카롭게 와서 꽂히기도 했다.



“안녕 윌슨?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괜찮은 걸까?”




나 역시 밀레니얼 세대다.

내가 썼던  제목은 ‘사표내고 도망친 스물아홉  공무원'이지만 나는 스물아홉에 퇴사를   아니라 스물아홉에 책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제목 때문인지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니 실제로는 그보다 더 어릴 때 퇴사한 셈이다.


내가 퇴사를 할 때도 함께 퇴사를 고민하던 또래 공무원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매체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민을 하는 이들 중에 실제로 사직서를 내는 선택을 하는 이들의 비중은 그땐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 나간다고 우리나라에서 할 거 있냐? 창업이라도 하게?"

"이게 그나마 제일 나은 직업이라잖아. 버텨야지.

 버텨서 6급 달면 그땐 진짜 내가 어떻게 일하나 봐. 나도 그땐 좀 편해지겠지."



그때 나는 '맞아 어쩌면 너희들이 현명한 걸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나가면 정말 지옥인지, 그 지옥의 맛은 어떤지 직접 겪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하는 나란 인간.

지독하게 더러운 경험주의자의 숙명.


하지만 나와 보니 알게 된 건,

같은 '지옥'이라고 해도 지옥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사람의 성향이 다 다르듯

자신이 처한 지옥을 어떻게 느끼느냐도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불지옥이 얼음 지옥보다 견디기 나은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세상에는 천국도 지옥도 절대, 그 어느 한 가지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애초에 천국과 지옥도 없지만

우리 인생 자체도 기쁨과 슬픔 그 많은 감정들이 오락가락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천국과 지옥의 실체는 객관적이지 않았다.



나는 지방 공무원의 조직 문화나 민원인들의 대책 없는 불만과 감정을 받아내는 일이

너무 힘들었기에, 오히려 그곳이 내겐 지옥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이후 나와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도 중소기업에서 일할 때도

공무원을 관둔 걸 후회하지 않았던 거다.



오랫동안 비정규직인 삶을 더 선호하던 나 자신을 그냥 난 비정상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냥 비정상인 걸 인정하고 살자 비정상이면 어때? 내가 그렇게 생겨먹었는 걸,

이라고 생각하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르니

어느새 나는 '비정상'이 아니라 그냥 '요즘 세대를

대변하는 수많은 젊은 애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노선을 탄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내가 밤새 고민하며 힘들어할 때

그들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더 잘 살아보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는 게,

퍽 위안이 되더라.  





하지만 조급한 퇴사에도 분명 맹점은 있다.


퇴사했다가 다시 비슷한 집단으로 돌아와 보니

그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인다.


내가 '좋은 직장'이라는 단어에 대해,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20대의 나는 그래도 남들보다 특별하게 살게 될 거라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너무 컸다는 사실.

하지만 그 기대와 희망마저 없었다면 내겐 20대가 굉장히 재미없이 흘러갔을 것이므로

나는 그 덕분에 고생은 맛봤지만 '그때의 나'에게 참 고맙고 그 시절의 나를 참 귀하게 여긴다.

다시 돌아가도 나는 아마 똑같은 삶을 살았을 거다.


..


..



그날의 나는 내가 회사에 뭔가 기여하고 있다는 충족감을 느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지금 내가 일하는 직장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 자리가 없어져도 그 일을 다른 사람이 누가와도 할 수 있게끔 시스템이 짜여 있고

또 당연히 그렇게 일처리를 해야 한다. 내가 너무 튀게 일을 하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게 굉장히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 사실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지 모른다.

내가 갑작스럽게 아파도, 집에 일이 생겨 휴가를 써야 할 때도,

같은 매뉴얼로 나 대신 일해줄 수 있는 직장동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하지만 예전에는 내가 공정 부품 같아서 견딜 수 없이 슬펐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하는 직장에서 그렇게 사는 나를 사랑할 수가 없었다.



월급은 어차피 당연하게 매달 들어왔다. 나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이에 대한 고마움 따위는 별로 없었다. 당연하지 '내가 일하니까' 들어오는 거잖아. 나 그래도 일 꽤 하잖아. 그런데 왜 내가 나의 창의성은 발휘하지 못하고 이렇게 반복적인 것만 해야 하지? 왜 내가 민원인들한테 이런 폭력적인 언사를 들으면서까지 정년을 위해 참아야 하지?

부끄럽게도 이런 생각 또한 있었다.



하지만 내가 퇴사 후 프리랜서를 하며 느낀 건

매번 창의력을 발휘하고 매번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홍보해야 하면서 겪는

또 다른 괴로움이다.


강연 준비를 하고 대중이 좋아하는 키워드가 뭔지 매번 유행을 살피고,

나를 어떻게 알리고 홍보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은,

월급을 받으며 내가 맡은 일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까를 고민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기본적으로 sns에 내 셀카를 올리거나 나에 대해 자랑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소심한 관종이라..... 대놓고 하는 건 싫어한다)

그냥 재미가 아니라 '일'을 위해서 해야 할 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일은 즐기면서 해야지, 라는 말이 오히려 스트레스였다.



남들 앞에서 말하고 의견을 내는 일이 그렇게 즐거웠는데

강연료를 받고 나서 강연 무대에 서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줘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괴로웠다.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누군가가 원하는 글을 쓰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다.




'아 직장인들이 동경하는 프리랜서나 플랫폼 종사자들도 각자 나름의 고충이 있겠구나.'




한때는 그저 이들을 집에서 자유롭게 일하는,

천운을 얻은 사람들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조금이나마 그 세계의 현실을 알게 되고

그 세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삶을 맞닥뜨렸을 때,

그들과 네트워크를 쌓고 친분을 갖고 났을 때,


아 이 사람들은 '단순히 운만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직장생활에서 겪는 고통 이상의 힘듦도 감내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구나. 이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드러난 직접적인 취업준비의 원인은 남편의 폐업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수많은 꼬리들이 얽혀 나의 마음을 이미 그전부터 뒤흔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루 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행복했던 날들.




새로 취업을 하고 나서

직장을 벗어나 다른 길로 걸어가며 성공했다는 사람들,

좋아하는 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수많은 매체 속 인터뷰 기사들이 쏟아질 때,  

'그럼 다시 비슷한 직장으로 돌아간 나는 실패자인가?'라는 마음이 끊임없이 올라와 미친 듯이 괴로웠던 시기가 있다.


남편이나 친구들의 그 어떤 위로도,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 않았냐는 부모님의 조언도 듣기 싫을 때가 있었다. 시댁 어른들은 대놓고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못내, 내가 다시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에 안도감을 느끼시는 듯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안정감을 갖는 것에 그나마 마음을 달랬지만 내 안에 숱하게 올라오는 패배감과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 1년이 넘게 걸렸고, 그제야 나는 다시 홀가분한 마음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요즘의 나는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속 하나라는 사실에

퍽 위안을 느낄 때가 있다. 특히 배 속에 나의 아이가 생긴 걸 처음 알았던 날 더욱 그랬다.

예전엔 누구나 때 되면 다 하는 게 결혼과 임신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평범하게 살지 않을 것이므로 그런 것을 거부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 게 인간의 행복이라니, 참 멋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실은 무엇 하나 평범한 게 아니었음을 몸소 겪고 나니, 나는 평범한 삶이라 불리는 인생조차 대가와 희생이 따름을 알고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노력하고 있다.



나는 참 무지했고 여전히 무지하다.

인생은 이분법적으로 흘러가지 않더라는 걸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보았으면서,

깨달았다고 해서 온전한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늘 잊곤 한다.  

글 쓰는 일로 돈 버는 걸 멈추면, 나는 패배 자니까 다시는 글을 쓸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포기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컸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노트북 속에 들어있는 원고들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일을 굳이 전업으로 하지 않으니 금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진정 좋아하는 일을 나의 주관대로 시도해보는 새로운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누군가가 원하는 글을 쓰려는 노력보다

내가 쓰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어졌다.


언제 또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 상태가 썩 마음에 든다.

코로나로 인해 슬픈 점도 많지만,

재택근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가끔은 프리랜서 일을 할 때보다

더 프리 하게 집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아마 나의 만족도가 높아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시대가 이렇게 바뀔 줄 1년 전에는 몰랐으니까.

코로나 때문에 다시 취업할 땐 슬펐지만

코로나 때문에 일하는 방식이 바뀐 것이 기뻐졌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변덕스럽게 계속해서 새로운 인생 경험을 함에 따라

가치관이나 마음이 달라질 거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이전의 글들을 쓴 내가 부끄러워서,

그 순간의 감정과 마음을 남기는 일에 주저하지는 않을 거다.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바뀔 수 있는 거고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그럼에도 뻔뻔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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