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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 여경 Oct 31. 2021

모텔은 신중하게 골라야지

필기시험 전날 편: 긴장감에 잠 못 이루던 그날




"코로나는 뭐 금방 지나가겠지. 그거 때문에 신입 뽑는 수를 줄인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수화기 너머로 동생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순진한 소리 한다는 .




"기업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됐다 싶겠지. 당장 가게들만 봐도 이제 알바 안 쓰고 거의 키오스크 쓰잖아.

좋은 명분이 생겼는데 기업들이 가만있겠어?

 '우리당연히 청년 채용하고 싶죠! 그런데 시국이 그렇잖아요. 저희도 어려워요.'

 이렇게 말하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그건 그렇지."


" 그래도 우리 팀장님 아들은 말이야 

 이번에 대학 졸업했는데…, "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대략 삼십 분 넘게,

지금 20대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동생과의 대화를 통해 '역시, 공기업은 나에겐 무리군'이라는 근거 있는 판단을 하게 됐다.

나에게 공무원 시험은, 죽어라 시간 들여 공부하고 암기하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의 시험 같았다.


하지만 공기업은 왠지 자격증이나 경력. 면접 스킬  돈을 많이 들여서 준비해야 하고, 특히 면접은 정확한 합격 기준을 몰라 사람 미치게 하는 시험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최종 합격까지  관문씩 통과할지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피를 말리겠는가.  

내 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분야에 굳이 새롭게 도전을 해야 한다니.



설사  좋게 최종 면접까지 간다 해도,

면접에서 "공무원은 왜 관뒀어요?"라고 물으면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면접에서 첫 번째 던져진 개인 질문이 바로 그거였다).



****




시간은 흘러  좋게 서류 합격 소식을 들었다. 하나 듣고 좋아할 겨를도 없이, 금세 필기시험 날짜가 다가왔다. 이른 아침 시험이라 당일에 올라가자니 여러 변수가 생길  같아 전날 근처 숙소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낯선 지역이었기에 사진을 통해 깨끗해 보이고 리뷰가 괜찮은 곳으로 선정했다. 요즘은 호텔이라 간판을 걸지만 모텔인 곳이 많기에, 대략 가격대를 보고 여기도 모텔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한가하게 비싼 돈 주고 찐 호텔을 잡아서 룰루랄라 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불만 없이 들어갔다. 숙소 키를 받고 들어선 방은 그랬다. 주황 불빛에 쾌쾌한 약간의 담배향. 말 그대로 모텔이었다.


낯선 곳에 여행을 왔을 때와 다음  중요한 시험을 두고 서울에 왔을 때의 기분은 천지차이. 나의 계획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바탕 하고 암기 요약자료를   읽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  다음날 시험장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험 전날 나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다. 바로 옆방 커플이었다.      



세상에나. 요즘에 이렇게까지 방음이 안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옆방 벽이 바로 욕실이었는지

처음에는 커플이 방에 들어와 “우와 욕실 넓다”라며 호들갑을 떠는소리가 들렸다. 젊은 커플의 목소리였다. 기념일인 건지 둘이 이벤트를 하는 건지 우당탕 뛰어다니며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우와 저 방과 내 방의 온도차가 이렇게 심할 수 있구나.


요약자료를 읽는  생략하기로 하고 일찍 침대에 누워 마음 정리를 하고 있던 나는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잠시  그들의 대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기에, 그냥 잠깐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 그랬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삼십 분쯤 흘렀을까.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새롭게 이어지더니 옆방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명확한 소리가 아니라 웅웅 거리며 울리는 소리까지 함께 울려 퍼져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베개로 귀를 막았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가 뭐라고 답변하는 듯했지만 낮은 목소리라 그런지, 내게 말소리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급기야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가 얼마나 서러운지 나는 순간 여자가 맞은 건가, 대신 신고해줘야 되나 라는 쓸데없는 오지랖까지 발동할 뻔했다.





아가씨야말로 나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나 내일 진짜 중요한 시험이란 말이에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잠잠해지길 기다리던 나는 할 수 없이 카운터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설명했다.

“사장님. 제가 내일 시험을 보는데 옆방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요. 혹시 방을 옮겨주실 수 있나요?”

사장님은 남는 방이 없다며 옆방에 너무 시끄럽게 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겠다는 말만 남기셨다. 하지만 소음은 계속 지속되었고, 긴장감에 더해 스트레스로 예민해져 눈이 말똥말똥해진 나는 수험생 커뮤니티에 들어가, 시험 전날의 기분을 남긴 사람들의 글을 보며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일이 시험인데 잠이 오지 않아요.]

[큰일 났어요. 잠이 안 와요. 컨디션 안 좋아서 떨어지면 어떡하죠.]     

[너무 불안해요 내일 떨어질 거 같아요]

..

..

시험 전날은 굳이 소음 때문이 아니라도, 긴장으로 인해 잠을 쉽게 이루기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게시글 댓글들은 잠들지 못한  긴장감에 뒤척이는 사람들의 푸념으로 가득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기도 하고 쓴웃음을 짓기도 하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시가 되어있었다. 어느새  커플 방은  싸우고 화해를 했는지 웃음소리까지 들렸다. 새벽  시가 되어서야 화해를 하다니.



‘어휴 그래. 싸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차라리 낫지.’



나는 이미 포기를  상태였다. 컨디션 조절하겠다고 일찍 잠자리에  시간이  시인  감안하면  오랜 시간 침대에서, 그들의 싸움과 화해 스토리를 옆방에서 본의 아니게 직관하며 뜬눈으로 뒤척인 셈이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잠이 오지 않는다기에 “  마리,   마리세어보기도 하고 너튜브에서 수면 음악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필기시험을 앞두고 낯선 곳에 누워있으니 지난 필기준비 시간들이 머릿속에 하나  떠올랐다.       



..

..     



"뭐야 수포자인 나에게 이런 시련이......"

시험을 보기로 정하자마자,

부랴부랴 공기업 ncs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강의를 끊어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몰라도 확실히 수리와 자료해석 부분에서는 강의를 듣고 나서 푸는 노하우를 알게 되니 문제 풀이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      


예전에는 독학을 굉장히 위대하게 여겼다. 강의를 듣지 않고 독학으로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독하다는 생각도 들고, 역시 저게 진짜 공부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귀한 자원이자 낭비할  없는 자원이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 나는 돈을 아끼는 것보다  시간을 아껴주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번 필기시험도 마찬가지였다.  년이 넘게  분야의 학생들을 만나 가르치고 축적되어 쌓은 문제풀이 노하우들은, 내가 백날  날을 홀로 머리를 싸매고 문제를 많이 풀어본들 얻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대신 오전에 강의를 들으면 오후에는 반드시  노하우들을  것들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훈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강의를 들은 것만으로 내가 공부를 했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지 정확히 짚고 넘어가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시험  일주일 동안은 매일 실전 시험처럼 오전에 모의고사를 풀었다. 오전에 모의고사를 보고 오후에 오답정리를 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갔다.      



..

..     



지난 수험생활을 떠올리다 보니

 모든 노력을 발휘해야하는 중요한 날이 내일인데.. 내가 너무 옆방 커플현재  불운한(?) 상황에 매몰되어 나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지금 내 상황에 집중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 비록  최상의 계획대로 전날 잠을  자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험장에 가면 좋겠지만 인생은 무조건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 사실 이렇게 필기시험 기회를 얻게  줄도 몰랐던   인생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있을까?’




잠시 불을 켜고 아까 생략했던 암기 내용 요약집을 가방에서 꺼내 다시 한번 주욱 살펴봤다. 신분증과 필기도구 등 다시 한번 내일 시험장에 들고 가야 할 준비물을 살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 온 나를 칭찬해주자고 생각했다.



그래 후회 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저 전날의 컨디션에 그동안의 노력을 모두 맡기진 않을 것이다.



마음이 편해졌다. 비록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망할지도 모르겠다’라는 불안이 끊임없이 올라왔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잘할 수 있다’는 다짐과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안아주다 보니,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아침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변수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첫 출근 날 아침 갑자기 빗길에 튄 흙탕물에 정장이 젖어버린다든지,

면접을 봐야 하는데 부적같이 늘 지니고 다니던 물건을 집에 놓고 왔다든지

우리 삶에는 수많은 예측 못할 일이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계획대로 되었어야 하는  당연한데라는 생각을 버리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당연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오히려  오늘의 하루가 완벽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생각보다, 지금 주어진 여건에서   있는 일들을 고민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아마 내가 전날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이번 시험은 망했다며 스트레스만 받고 있었다면, 긴장감과 불안감에 남은 시간들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수험생활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회사에 입사하면 그날로 행복할 것 같지만, 의외로 수험생활이 더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날들도 많았다. 그러니 ‘지금’에 집중하자.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모텔 옆방의 커플이 몇 시에 잠이 들지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의 마음과 행동만큼은 내가 정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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