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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 Jan 09. 2024

삶에는 위험이 따른다.

그렇다고 여행을 멈출 수는 없다.

며칠 전 괌을 여행 중이던 50대 한국인 관광객이 강도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 남성은 은퇴를 기념해 아내와 여행을 왔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건비치에서 츠바키호텔로 걸어가던 초저녁이었다.      

재작년 퇴직 전 안식년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부부도 괌으로 보름간 긴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가 종식되기 전이었고 귀국 후 열흘간의 자가격리를 무릅쓰고 간 여행이다. 

지금과 같은 1월이었고 관광객이 피습당했던 시간과 같은 무렵에 바로 그 도로를 걸어 호텔로 돌아왔던 기억이 생생한 우리 부부는 기사를 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건비치의 석양은 너무나 낭만적이었고 츠바키호텔의 뷔페는 신라호텔 뷔페보다 훌륭했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넉넉해져서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피살당한 남편과 아내도 그런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하루 전 아니 10분 전만 해도 그런 불행은 눈치도 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불행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나도 괌에서 죽을 뻔했다. 흔히들 쓰는 '죽는 줄 알았다'. '배고파 죽겠다'. 등의 표현은  힘든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식어지만 진짜 죽음을 맞이할 만한 순간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괌의 바다는 잔잔하고 어디든 물고기가 노닌다. 스노클링을 하러 먼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다. 스노클링 투어를 신청하는 대신에 슈퍼마켓에서 스노클링 장비를 구입했다. 하루종일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날을 잡아 물고기들이 많이 모이는 스노클링 포인트를 찾아 돌아다녔다. 처음엔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리티디안해변으로 향했다. 바다거북을 볼 수 있고 물빛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물살이 세고 바닷속에 뾰족한 돌들이 많아 이내 차를 돌려 나왔다.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이나라잔이라는 천연풀장이다. 돌틈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며 연못을 이룬 곳이다.  바다마다 보이는 물고기의 크기도 종류도 달라서 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세 번째 찾아간 에메랄드 벨리의 물고기가 가장 아름다웠다. 협곡을 따라 호수처럼 갇힌 깊고 푸른 바다가  한 눈에도 깊어 보였지만 눈앞에서 움직이는 알록달록 어여쁜 고기들이 화질 좋은 TV를 보는 듯 선명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속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다음으로 4번째 스노클링을 하러 피시아이 방향으로 가려던 차에 에메랄드 밸리 바로 옆 해변에서 원주민들이 스노클링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보니 얕은 물에 어린애들도 많이 있고 안전해 보였다.           


죽음의 위기가 찾아온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스노클링을 할 때 얕은 바다에서 하기 때문에 굳이 구명조끼가 필요치 않다는 어떤 여행 블로거 말에  스노클링 도구만 사고 구명조끼는 사지 않았다. 짐을 더 이상 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박고 물아래를 보니 다른 해변보다 훨씬 큼직한 고기들이 몸 주위를 돌고 있다. 고등어만 한 크기에 온몸이 하얗고 투명한 물고기들이었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스노클링을 즐기는데 몸이 가만히 떠있질 못하고 파도 한 번에 옆으로 1미터씩  움직였다. 물고기들 옆으로 가기 위해  기를 쓰고 헤엄을 치는데도 물살이 훨씬 강해서 자꾸 떠밀려갔다. 수평선 쪽으로 밀려가면 겁이 났겠지만 해안을 따라 옆쪽으로 흘러가서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다. 남편은 차 키를 놔두러 가서 옆에 없었는데 갑자기 큰 물살이 나를 덮치더니 순식간에 몸이 떠밀려 바닥에 발이 닫지 않게 되었다. 겁이 덜컥 났다. 더  큰 문제는 몸이 밀려가는 쪽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훨씬 더 깊고 검은 바다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거였다.  아무리 팔과 다리를 저어도 몸이 얕은 바다 쪽으로 가질 않았다. 더 큰일이 나기 전에 위험을 알려야 했다. 입에 낀 마우스를 빼고 “악” 소리를 지르는데 몸이 푹 가라앉으며 짠물이 입안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컥컥거리며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솟아오르길 몇 차례.... 물에 빠졌을 때  세 번 떠오르면 죽는다던데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데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 오늘 내가 죽는 날이구나 하는 비통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죽는 순간에는 파노라마처럼 지나온 인생이 생각난다던데 그러지도 않았다. 아마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몸이 한번 더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소리를 한번 더 크게 질렀다. “아악” 멀리 둑 위에서 누군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금세 내 옆으로 와서 허리를 감싸 안고 헤엄을 쳤다. 물에 빠진 것도, 그들이 구해준 것도 순식간이었다.  차모로 원주민 같은 덩치 큰 남자 둘이었다.  나를 둑 위에 올려놓고 괜찮냐고 물으며 환히 웃는데 앞니가 빠져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순수해 보이던지... 애니메이션 영화 ‘모아나’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영웅 마우이를 닮았다. 30-40대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훨씬 더 어릴지 모르겠다. 그들은 이쪽 바다는 깊다고 왼쪽의 얕은 바다에서 수영하라고 말하며 상냥하게 웃었다. 떨리는 다리로 걸음을 떼면서 수도 없이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사무치게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지만 목숨 값으로 무얼 주어야 한단 말인가? 시집을 가야 하나? 간다고 해도 그들이 딱히 원하지 않을 거 같아 그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달라고 나의 신께 빌고 또 빌었다. 목숨값을 빚졌다.           

얼이 빠져서 호텔로 오는데 남편이 낙조를 보여준다며 건비치로 향했다.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고 정신은 하나도 없어서 화장실에 갔다가 휴대폰을 놔두고 오고 차에 있는 머리 고무줄을 가지러 주차장에 갔는데 뭘 찾으러 왔나 잊어버리곤 다시 왔다 갔다 하고 우왕좌왕이었다 호텔 가서 쉬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몇 시간 전에 죽었다면 보지 못했을 노을을 보고 싶기도 했다           

노을 지는 바다는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못 보고 죽었다면 너무나 안타까웠을 정도로.....     

살아있음 그 자체가 감사했다. 이불 밖은 위험하고 여행지에서는 어떤 위험이든 노출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해안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새로운 바다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앙드레지드의 말이다.     

떠날 수밖에 없다면 좀 더 안전하게 다니리라 각오를 다졌다. 아무튼 삶 자체가 축복임을 깨달았던 하루였다.          


길 위에서 가끔 천사를 만난다. 10여 년 전 캐나다에서 록키여행을 마치고 렌터카를 몰고 공항으로 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버렸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전화한다면 여기 위치를 뭐라고 해야 하나. 정비소는 근처에 있을까 걱정만 많고 할 수 있는 건 없고 비행시간은 다가오는데 울고 싶었다.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젊은 농부가 우리를 보더니 지금 자기가 일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10분 내로 다시 오겠다고 했다. 정말 곧바로 다시 오더니 스페어타이어를 꺼내서 잭으로 차를 들어 올리고는 뭐가 잘 안 되는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차밑으로 기어들어가  타이어를 금방 갈아주었다.  신이 보내신 천사가 따로 없었다. 고맙다고 돈을 내미는데 손사래를 치며 갈 길 가버렸다. 그의 뒤를 향해 얼마나 축복의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지만 내가 낯선 이에게 베푸는 친절이 돌고 돌아 그에게 가닿으면 그도 언젠가 낭패를 볼 때  꼭 도와주는 이가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천사를 만나고 나면 친절하게 남을 도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괌에서 비극을 당한 부부는 천사 대신 악마를 만났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신에게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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