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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tter S Jan 10. 2021

‘당근’이세요?

어둑한 지하 주차장 사이를 헤집고 누군가를 찾는다. 저 사람? 아니다. 그러면 저 사람인가?

조심스레 눈을 맞추며 “저, 혹시 당ㄱ…”

“네, 맞아요!”

내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외치는 다급한 목소리.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서 좀 늦었어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왠지 그런 것 같았어요. 물건은 여기 있어요.”

나는 두어번 입고 작아져 버린 우리 아이의 옷이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라며 한 손에는 아기를 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 주섬주섬 지폐를 건네는 아기엄마.

“아휴, 아기 안고 얼마나 걸어온 거에요. 다시 갈 수 있겠어요?”

“괜찮아요. 맨날 하는 건데요, 뭘.”

“힘들테니 얼른 조심히 가세요.”

“네~”

득템한 아기엄마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신나 보여서 다행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안쓰는 육아용품을 간간이 중고마켓에 내놓았었다. 몇 번 못 입고 작아진 옷가지나, 사이즈 미스로 때를 놓친 새 신발이나, 상품평에 혹해서 샀으나 우리 아이에게는 도통 먹히지를 않는 신박한 육아템 등. 그런데 반대로 중고제품을 구매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생판 남이 쓰던 물건은 꺼림칙하다는 이중적인 마음에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 기저귀가 똑 떨어졌고 근처 마트에는 대체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차였다. 혹시나 하고 당근마켓을 검색해보니 옆 동네에 찾는 제품이 나와 있었다. 우리집 양반이 한달음에 달려가 거래 성공. 물건이 뭔지도 모르고 각 집에서 차출된 남편들이 만나 박스만 주고 받은 겸연쩍은 상황이었단다. 어쨌건 개봉도 하지 않은 새제품을 시중가보다 훨씬 싸게 샀으니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이렇게 나의 매너온도는 36.5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당근마켓을 이용하게 된 계기는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 때문이다. 아이와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같이 놀아주는 레퍼토리도 한계에 다다랐다. 새로운 놀잇거리가 필요했다.

“위기는 기회다.”

어릴적부터 우리 아빠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오던 말씀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이야기인데 살아보니 잔소리로만 여기던 것 중에 인생의 진리가 꽤나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무튼 아빠의 오래된 가르침을 이어받아,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손수 놀잇감을 만들어줄 정도의 정성도 솜씨도 부족한 나는 자연스레 당근마켓에 눈을 돌렸다.


*엄마는 과자 상자와 색종이로 침대며 세탁기며 온갖 가구들을 만들어 장난감 집을 꾸며줬고, 털실로 하나하나 떠서 인형 옷과 하다못해 속옷까지 만들어줬다. 그렇게 사랑을 쏟으며 나를 길렀음에도 대충 키워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검지를 툭툭 튕겨가며 유아동 목록을 내려 보던 중 마침 같은 아파트의 누군가가 내놓은 유명한 전집을 발견했다. 나는 곧장 책 상태를 물어본 뒤 카트를 끌고 그 집으로 내달렸다.

사실 우리 아이는 책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다른집 아기들이 그렇게나 잘 본다는 인기 전집을 진작에 들였지만, 요매난 분량에 이따만한 금액이 무색하도록 병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 마음에, 늘어가는 개월수에 맞춰 전집 하나 더 들이고 싶었지만 또다시 전시용이 될까 봐 수십만원 짜리를 덜컥 구매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중고로 헐값에 가져왔으니 아이가 안봐도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책을 본다기 보다는 갖고 논다는 개념에 더 가까운 이 맘 때 아이가 아무리 접고 찢고 낙서를 해도 마음 편히 내버려 둘 수 있었다.

뽕 빼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재미 삼아 청룡영화제 대상감 만한 연기력으로 읽어주니 아이의 반응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서서히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흥미를 보이더니, 이제는 “책 읽어줄까?” 소리만 하면 얼른 와서 궁둥이부터 들이민다. 어딘가에서 그 쓸모를 다 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물건이 우리집에 와서 다시 빛을 발하는 기쁨은 꽤나 컸다.



물론 눈살 찌푸려지는 거래 경험도 더러는 있다. 깨끗하다는 설명과는 달리 찢어지고 음식물이 찐득하게 눌러붙은 책을 닦아내느라 애를 먹은 적도 있고, 판매자의 빈정 상하는 매너에 씩씩대며 돌아오다 그 집 주차장 벽에 차를 박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수리견적이 나온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찬바람 쌩쌩 부는 날에 아이 안고 부피 큰 장난감을 사러 온다길래 직접 배달해줬더니 뚱한 표정으로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보상이라도 하듯 훈훈한 일이 더 많았다. 백 권에 육박하는 상태 좋은 전집을 단돈 만원에 물려받은 일이 그 중 하나.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들과 끙끙대며 책을 이고 지고 나온 판매자는 호탕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거래 후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는 지름길까지 손수 안내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수줍지만 예의 바른 아이의 인사소리가 나직이 지하를 울리며.

집에 와서 책을 펼쳐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두고 두고 고마운 마음에 며칠 뒤 다시 채팅창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한테  한권씩 읽어주는 중인데 내용이 너무 좋네요. 좋은  저렴히 물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쿠,  보신다니 기쁩니다. 중고거래는 TV에서 보고 처음 해봅니다. 저희는 애들이 커버려서 오래 꽂혀 있기만 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가치를 발휘할  있으니 보람되네요. 구입  만족이 안된다면 거래하고도 뒤통수가 따가울  같아 가격을 높일 수가 없었어요. 건강하고 현명하게 아이  키우세요~”




이렇게 우리집은 수시로 중고 전집을 구매해 읽으며 이 기나긴 터널을 견디는 중이다. 실제로 코로나로 인해 중고마켓 이용률이 늘어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집에 있다보니 안쓰는 물건들이 자꾸 눈에 밟혀서 정리해 팔게 된단다. 게다가 저렴한 가격이 주는 만족감, 나누고 비우는 즐거움, 요즘 들어 특히나 더 그리운 사람 간의 정을 모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어찌 됐든 덕분에 우리 꼬맹이는 놀이 삼아 책을 보는, 책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하나를 잃으니(실은 수십 가지를 잃은 것 같지만) 하나를 얻었다.

역시 위기는 기회인가 보다.




사진 출처 - 영화 <피터래빗>

이전 05화 나도 남편에게 ‘애기’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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