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 거스키 전을 다녀와서

사진은 왜 예술인가

by Divitia J


Before the 1990s, Gursky did not digitally manipulate his images. In the years since, Gursky has been frank about his reliance on computers to edit and enhance his pictures, creating an art of spaces larger than the subjects photographed. (위키피디아 인용)


안드레아스 거스키가 남긴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솔직하게 말해 컴퓨터에 의존한 편집으로 ‘picture’를 향상시켰으며, 사진으로 찍힌(photographed) 대상을 예술의 공간 안에서 더 크게 재창조했다”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단어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단순한 ‘사진(photograph)’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사진 그 이상의 무엇, 즉 재현이 아닌 ‘창조’라고 분명하게 언명한 것이다. 그가 ‘솔직하다(frank)’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컴퓨터에 의존했다는 기술적 사실을 강조한 것인지, 아니면 창조된 작품이라는 본질을 강조한 것인지는 문장 하나만으로 단정 짓기 어렵지만 말이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 안드레아스 거스키전을 관람한 후 작가에 대해 더 찾아보았다. 사진, 추상, 유형적 사진, 신의 눈으로 본 풍경, 사진을 추상화로 승화시킨 작가 등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다양했다. 어떤 글에서는 사진에서 서사가 제거되었다고 했다가, 말미에 이르러서는 서사가 장엄하다고 맺기도 했다. 현대 예술에서 손꼽히는 사진작가에 대한 설명치고는 꽤 혼란스러웠다.

사진과 회화, 사진과 추상화의 관련성, 그리고 사진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나열된 무의미한 수사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유형적 사진’이라는 말은 난해했다. 나의 이해력이 부족한 탓인지, 거스키의 작품 이외의 사진은 유형을 담지 않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심오한 뜻이 담겨 있겠지만, 명료하게 정의되지 않은 명사는 그저 현학적인 수사일 뿐이다.

현대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개 두 가지다. 침묵하거나(어렵다고 얼버무리거나), 근사한 언어로 포장하거나. 현대 예술은 과거 예술과의 단절에서 시작되었고, 모든 현대인이 현대적 의식을 갖춘 것은 아니기에 현대 예술은 늘 몰이해에 시달린다.

사진은 현실을 모방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비로소 예술이 된다. 가끔 유럽이나 미국의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겪는 일이 있다. 심사관은 눈을 껌벅이며 내 실물과 여권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신원 확인에 애를 먹곤 한다. 만약 사진이 현실을 완벽하게 모방한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사진은 인간이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습적인 방식이자 습관에 불과하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이 위대한 이유는 단지 추상화에 가깝기 때문만이 아니다. 소설가가 펜을 쓰고 화가가 붓을 쓰듯, 그는 사진기라는 도구를 통해 심오한 예술 작품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거스키의 작품을 마주하면 사람들은 압도당한다. 우선 엄청난 크기와 스케일에 놀라고, 익숙한 풍경이 주는 낯설음에 다시 한번 놀란다. 주식 거래소, 슈퍼마켓, 라인강 등은 분명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거스키의 사진 속에서 재탄생한 이 장소들은 더 이상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그곳이 아니다. 그곳은 꿈을 꾸듯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해 있다. 사람들이 그의 사진에서 추상화의 흔적을 느꼈다면 그것은 정확한 감상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단순히 화려한 형용사와 부사로 치장하고 싶지 않다. 그는 관객에게 차가움을 요구한다. 이는 작품에 대한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삶의 단면과 직접 대면하게 하는 ‘정면성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현대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은 모든 문화 구조물은 그 원인에 의해 설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연에 의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동의를 요청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계의 종합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준수시켜야 할 하나의 단면으로서이다. 이러한 종류의 세계관이 예술 양식에 있어서 ‘정면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frontality)’를 부른다.” (조중걸, 『현대예술: 형이상학적 해명』)

이러한 정면성의 원리가 희곡에 도입된 것을 ‘소격효과’라고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은 완결되어 폐쇄된 작품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는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며, 드라마는 세계를 향해 열린다. 관객은 감정이입 대신 날 것 그대로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이 현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다. 인간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어쩌면 기쁨보다는 슬픔과 고통을 더 많이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기획자가 거스키의 작품에서 비극성이 느껴진다고 말한 근거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거스키 작품에 대한 감상도 이와 같다. 컴퓨터로 이어 붙인 거대한 공간 속에 삶의 흔적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라벤더 농장을 찍은 사진 속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점으로 보인다. 사실 그곳이 라벤더 농장인지 구분하기도 힘들고, 꽃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찾으려 해도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다. 정면성의 원리가 도입된 거스키의 작품은 감정이입을 관람객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작품에 몰입해 고단한 삶을 잠시 잊으려 했건만, 그 광대한 풍경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는 고작 작은 점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역설적이게도 덕분에 걱정과 근심, 슬픔 또한 작아진다. 거스키 작품의 위대함은 이러한 진정한 현대 예술을 구현했다는 점에 있다.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며 그의 사진이 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지 이유를 짐작해 본다. 거스키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인화하는 방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원하는 형상이 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 기다려 여러 장면을 촬영하고, 이들을 거대한 규모로 조합한다.

이는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파와 닮았다. 회화는 본래 입체를 담을 수 없어 원근법과 명암으로 3차원을 흉내 낸다. 피카소의 큐비즘은 이를 해체하여 다시 조합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입체해체파’라 부르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뒤샹의 초기작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나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조각난 신체들이 이어 붙여진 방식처럼 말이다.


거스키의 작품 역시 사진의 특성인 분절성을 가지며, 이를 모아 붙였다는 점에서 입체파와 유사하다. 또한 그의 작품에 담긴 위트는 입체파의 재치 못지않다. 평양의 국가 행사를 담은 사진은 ‘평양’이라는 제목이 없었다면 그저 꽃 모양의 아름다운 매스게임으로 보였을 테니 말이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전을 보러 간 날은 무덥다 못해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하지만 전시장 입구에서 작가의 이름을 보는 순간 시원한 선물을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기획과 전시는 훌륭했다.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하여 환상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 환상을 깨뜨리는 날카로움을 느꼈다. 그는 사진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승화시켰으며, 현대 예술이 지향하는 바를 명료하게 담아냈다. 참으로 행복한 미술관 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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