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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교육쟁이 Jan 19. 2020

강사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는 여자 청소년

이것은 반성문입니다

출강 의뢰가 잡힌다. 그러면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어느 지역인지, 인원은 몇 명인지 살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질문. 


“성별은 어떻게 돼요?” 


여고가 됐든, 남녀 분반이 됐든, 여자 청소년이라고 하면 일단 마음이 편해진다. 또,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빻은 얘기 들을 리는 없겠군.”


성교육을 하며 남자 청소년에 대한 편견이 생겼듯, 여자 청소년에 대한 편견도 생긴 걸까. 어느 순간, 왜 여자 청소년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지, 그것이 가진 의미가 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만난 여자 청소년은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이야기하고 싶은 거리는 많은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서 들썩들썩 거린다고 할까. 아무래도 ‘성’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계속 질문과 참여를 유도하는 성교육을 처음 접하다 보니, 쑥스러움과 민망함이 몰려오는 듯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질문은 점차 구체적으로 변한다. 물론 여자 청소년 역시 성기 위주의 질문이 많고, 혐오 발언도 하지만, 무엇이 책임감인지, 어떻게 해야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는지, 우리 사회의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왜 문제인지 지적한다1). 어떤 스킬을 장착해야 여자가 만족하는지, 음경은 도대체 왜 까맣고 휘었는지, 여자도 사정을 하는지, ‘다 필요 없고 그냥 지금 섹스하고 싶다’ 위주의 남자 청소년 질문과는 다르다. 


성평등 교육을 하며 만난 여자 청소년은 또 조금 달랐다.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할 순 없지만 질문하지 않아도 많이 얘기를 한다. 참여자들끼리도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입시 스트레스에 쉬지 않고 문제집을 풀더라도 질문을 하기도, 답하기도 하며, 발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성을 주제로 하지만 신체와 성관계 위주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일까. ‘여자’라는 정체성이 가진 소수자성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학습하고, 이를 언어로 풀고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에 꽤 친화적이다. 스스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여자 청소년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가부장제와 젠더 권력에 대한 이해가 높다.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치게 된다. 


“그렇죠. 네. 네. 좋은 의견 내줘서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고마움을 표현하고 자연스럽게 호응한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이들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구나. 


이를 깨달은 순간 두 개의 감정이 순차적으로 들었다. 하나는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집단을 선호하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성평등 의식의 확산이 목표라면서 사실은 가장 필요한 집단(남자 청소년)을 의식적으로 배제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떨쳐지지 않았다. 교육의 목표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성평등 의식에 기여하는 거라면, 성별 고정관념과 성기 중심의 성인식, 반 페미니즘 정서가 상대적으로 높은 남자 청소년에게 적절한 성교육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남자 청소년 성교육에 집중했다. 일부러 남자반을 선택하고, 교육 내용과 방법에 여러 실험적인 요소를 섞었다. 한편에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 청소년은 이미 훌륭하니까. 잘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여자 청소년이 키워졌을까. 


그 다음에 밀려온 감정은 여자 애들은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으로 여성 혐오를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다소 조심스럽지만, 진지하고, 성실하며, 감수성도 높으며, 강사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고 있는 여자 청소년’이라는 이미지를 씌워 방치했다는 반성이 밀려왔다. 내가 했던 건 ‘못난 아들 조금 더 신경써야지’하는 마음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우리 장녀는 어딜 내놔도 걱정이 없다며, 하나있는 아들놈이 걱정이라고 한 엄마의 말도 떠올랐다. 많은 여자 청소년이 교실 내 성차별이 아직도 남아 있고, 우리 학교도 스쿨미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성교육 활동가라는 자 역시 ‘여자애들은 똑똑하고 혼자 알아서 잘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고립돼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강사라는 워딩을 사람들이 편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쓰고 있지만, 스스로는 나를 ‘성교육 활동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교육을 통해 보다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왜 여자 청소년이 말하는 권력을 가진 이에게 착하다는 인식을 주는지’, ‘그러면서도 똑똑하고 성실하기도 한지’, ‘왜 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여전히 수줍은지’, ‘왜 보다 구체적인 질문과 걱정을 하고 있는지’ 그걸 들여다봐야 한다. 나는 그걸 2년이 지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1)쪽지 질문 발췌

“생리를 시작하면 왜 여자가 되었다고 할까요? 나는 원래부터 여자에요.”

“왜 야동은 19금인가요? 19금의 기준이 뭔가요?”

“배란일을 피해서 성관계 하는 게 조금이라도 임신을 막을 수 있나요?”

“생리대는 왜 유료죠?”

“어떻게 하면 성병을 예방하죠?”

“동성애가 나쁜 게 아닌데 찬반이 아닌 그저 차이일 뿐인데 반대하는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결혼 안 하고 싶어요. 그 말을 했다가 아빠한테 혼났어요.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떤가요?”

“왜 학교에서나 성교육을 할 때 자세히 알려주지 않고, 계속 똑같은 얘기를 할까요?”

“만약 내가 월경 주기를 조절하기 위해 피임약을 먹는데, 딱 한 달 채웠더니 며칠 뒤에 바닷가로 여행이 잡힌 거예요. 그럼 계속 피임약을 먹어도 되는 건가요? 한 달을 넘겨 챙겨 먹으면 몸에 이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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