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아침. 전날과 같이 8시에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준비를 해서 10시쯤 호텔을 나선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 후 오후 일정을 할 터이니 중간에 옷이나 신발을 바꿔도 된다고 말해두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러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말은 씨가 되고 열매를 맺었다. 옷과 신발뿐 아니라 가방까지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말았으니...
여전한 곳. 새로운 곳
아랍 분위기가 풍기는 아랍 스트리트로 향한다. 가장 유명한 술탄모스크와 아랍 스트리트, 그리고 14년 전엔 없었던(유명하지 않았던) 하지레인까지 본 후 점심을 먹는 게 오전 일정이다. 후끈후끈 날씨가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할 때쯤 술탄모스크에 도착했다. 예전에 왔을 땐 내부엔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번엔 관광객 5 게이트로 내부로 입장해 본다. 입장했지만 별건 없다. 어차피 볼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고 우리는 이슬람신자가 아니니까 잘 모른다. 쓱 보고 나와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사실, 다 이 사진 찍으려고 여기 오는 거거든요? 그리고 양쪽에 늘어선 상점들도 샤샤샥 구경하며 내려간다. 처음 실컷 완벽한 일정을 다 짰는데 이 상점들이 월요일 휴무라고 하는데 바람에 모든 일정을 다시 짜느라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물건 사려고 가는 게 아니라도 이 분위기 보려고 가는 건데 상점이 문 닫으면 곤란하잖아요? 물건 사러 가는 곳 아니라고 하지만 물건을 샀다. 하핫. 엄마가 에코백 가방을 집어 들었다. 2개에 10 SGD(1개 5천 원 정도) 이만하면 싸지요. 사고 나서 이후로 같은 가방을 계속 차이나타운, 부기스에서도 봤다. 다행히 가격은 같았다. 비싸게 샀으면 앓아누웠을 텐데.
맛집 갔는데 맛은 기억 안 나요.
지나가며 오렌지주스 자판기를 발견한다. 오홋. 여기는 2 SGD다. 이따 밥 먹고 먹자. 엄마와 약속? 한다. 그저 사진 찍는 게 전부인 하지레인을 찾아가 본다. 아직 오전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이 많아지면 사진 찍다가 탈진한다고 했다. 우리는 사진에 진심이지 않아서(보여줄 데도 없음) 인증샷으로 몇 장 박고 하지레인 일정을 끝낸다.
요런 그래피티로 유명한 하지레인
그렇게 걷다가 점심 식사 장소로 찜해둔 새우국수집을 발견. 점심 먹기는 아직 이르니까 한 바퀴 더 돌고 오기로 했다. 날씨는 더웠다 흐렸다 하는데 땀은 계속 난다. 더운 거 같은데 안 더운 것 같기도 하고 견딜만하다.
조금만 늦으면 웨이팅이 있다고 해서 이제 새우국수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오직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고 하니 진짜 맛집 같은 느낌이다.(편견이 가득한 자) 이미 정해두고 온 새우국수 종류 2개와 라임주스 1개를 시켰다.(이따가 오렌지 주스 또 먹어야 해서) 음식이 나오자마자 사진을 한 장 찍고 국물을 한입 들이켜려고 그릇을 들던 엄마는 그 상태로 삐끗하며 국수를 앞으로 쏟았다.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종업원들도 놀랐는지 티슈(3 SGD 유료로 판매하던) 두 묶음을 우리에게 건넸다. 급한 대로 얼른 닦아내고 국물이 쏟아진 엄마의 허벅지를 살핀다. 천만다행으로 국물이 아주 뜨겁지는 않았다. 텀블러에 담아왔던 얼음을 꺼내 응급처치를 했고 직원들은 국물을 리필해 주었다. 그래서 새우국수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 외관상 큰 화상은 없어 보였다.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이며 온통 국물을 뒤집어썼다. 내가 쉬다 나가자고 했지 이러려고 다시 숙소에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서둘러 점심을 먹고 오렌지 주스를 한잔씩 마시고(그래도 못 잃어... 오렌지 주스) 숙소로 돌아간다. 엄마는 옷과 가방과 신발을 빨았고 내가 가져온 연고를 바른다. 다행히 괜찮아 보인다. 여행 갈 때마다 응급 약만 한 보따리 가져가는 나는 다음에는 화상전용 연고도 챙기리라 다짐한다. (절대 짐을 줄일 수 없는 J의 숙명)
먹긴 먹었음. 새우탕면 맛이라고 듣고 갔는데 그 말 맞음.
유니버셜도 안 가고 루지도 안타지만 센토사 섬은 가야죠.
인공섬인 센토사 관광이 오후의 일정이다. 하지만 엄마랑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루지를 탈 것도 아니고(14년 전엔 탔지만 이제 나도 나이들...) 그저 섬을 한 바퀴 구경하고 저녁에 하는 '윙스 오브 타임'이라는 쇼를 보는 게 목표였다.
But...
출발 20일 전쯤... 센토사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다. 바닷가 수영이 금지되었지만 수영할 건 아니었고, 초반엔 기름 냄새도 났다고 했지만 우리가 갈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저녁 먹고 공연만 보면 되는 거였는데 무슨 연관성인지 모르겠지만 공연도 당분간 중단되었다고 했다.
왜요... 왜죠... 딱 맞는 동선을 찾아서 저녁 식당도 예약해 놨고, 프리미엄 티켓 50% 할인받기 위해서 내 폰에도 엄마 폰에도 센토사 앱까지 다 깔아놨는데요....
미련이 남아서 도착하자마자 매표소에 가봤지만 역시나 당분간 공연을 중단한다는 안내만 야속하게 붙어 있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 완벽하게 포기하고 비치 구경을 하려는데... 센토사 섬 내의 모든 트램은 무료인데... 탈 수가 없다. 간격이 너무 길고 이미 늘 만석으로 오기 때문에 기다린다고 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불확실함에 기다림을 배팅할 수 없는 우리는 걷는다. 덥지만 걷는다. 왜 하필 나는 또 숙소에 선글라스를 놓고 왔던가. 아시아 최남단이라는 곳을 보기 위해 팔라완 비치까지 걷는다.(하지만 트램을 기다리는 것보다 걷는 게 빠름) 전망대에 올라서서 바다를 한번 보고 물을 마시고 사진을 찍는다. 괜히 14년 전 같은 곳을 찍었던 사진을 찾아본다. 뭔가 이게 더 벅차다. 나는 늙었지만 너는 그대로야. 엉엉. 고마워.(뭐가?) 그대로 있어줘서.(나는 늙었지만)
좌 : 2010년/ 우 : 2024년
자, 이제 오후 일정이 끝났으니 저녁을 먹으러 간다. 6시에 예약했지만 걸어가도 5시면 도착할 거 같다. 역시나 트램을 포기하고 걷는다. 엄마가 잘 걷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평소엔 매일매일 아픈 엄마인데 여행지만 오면 꽤나 건강해 뵌다. 역시 사람은 정신력이다. 마음이 즐거우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응?)
아시아의 최남단 팔라완 비치/조형물이 유명한 실로소 비치
"여행은 돈 쓰러 오는 거죠"는 돈 없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싱가포르의 살인적 물가를 체험할 수 있는 식당 중 한 곳으로 왔다. 뭔데. 너 되게 특별한 식당이야? 아니다. 그냥 이탈리안 식당이다. 바다를 보며(그러기엔 해변가가 너무 먼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그냥 분위기 값이다. 윙스오브 타임이 중단된다는 걸 알기 전에 미리 예약한 식당인데... 사실 그게 아니었으면 꼭 올 필요도 없던 곳이었다. 그래도 예약한 김에 그냥 가기로 했다. 쇼 타임에 맞춰서 6시에 예약했건만 5시에 도착했다. 노을+야경 식당인데 햇빛이 쨍쨍하다. 뷰가 좋은 곳으로 자리 잡아 달라고 말했었는데 만약 가장 끝 자리로 안내해 줬다면 싸웠을 것 같다. 그 자리는 직사광선이었다. 점심이 부실했던 관계로(그나마도 놀라서 코로 흡입한) 이왕 비싼 집, 많이 시키기로 한다.(백 원 이백 원 아껴서 십만 원씩 쓰는 바보 사람 나예요.) 파스타와, 리조토, 카페 누군가가 추천했던 오징어 튀김을 시켰다
안 많아요. 안 많습니다
잘 시켰다. 역시 비싼 집은 양이 적다. 이건 전 세계 공통인 것 같다. 비싼 거 시켰는데 남기면 어쩌지 했는데 나는 역시 쓸데없는 걱정 하기론 어디 가도 질 자신이 없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면 센토사 앱을 깔아왔기에 20% 할인을 받았다. 안 비싼 데 가서 먹으면 더 절약하는 건데 비싼 곳 가서 20% 할인에 행복해하는 나는 역시나 부자 되긴 글렀다.
괜찮아. 잘 먹었으면 된 거지. 토닥토닥(마무리는 정신승리)
기어코 마지막에 타고 만 트램
한강 유람선 타 본건 20년도 넘었지만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저녁+윙스오브 타임이 마지막 일정이었다. 더운 나라 특성상 밤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매일 야경계획이 하나씩 들어가는데 이날 밤 계획이 하나 빠진 관계로 내일의 일정을 오늘로 끌어오기로 했다. 바로 싱가포르 리버크루즈 타기
크루즈라고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무동력 배를 왕복 40분 탑승하여 싱가포르 전체의 야경을 보는 동선이다. 14년 전엔 편도로만 탔었는데(야경+교통수단 1타 2피) 야경이 너무 예뻐서 편도 탑승이 못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승. 하차 지점이 바로 우리 클락키 쪽에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코스였다.(물론 이것까지 생각해 선택한 숙소였지만) 예약은 오픈티켓으로 사전 구매해 왔고 현장에서 티켓으로 교환하면 된다.
"그럼 내일 탈거 오늘 탈까?"
"그래. 뭐라도 하나 더 하면 좋지." 협상? 이 완료되었고 흩뿌리는 비가 불안했지만 티켓 교환처를 찾아간다.
QR 교환하는 곳, 현장 발권 하는 곳, 단체 줄, 개인여행객 줄 아주 산만하다. 내 근처에 있던 한국인 아저씨께서 더워서 그랬는지 줄 서 있는 부인(추정)에게 "거기 줄 맞아? 거기 줄 맞냐고?" 짜증으로 채근하길래 또 못 참고 나는"단체줄이랑, 개인 줄이 달라요" 알려드렸다. 티켓으로 교환해서 나가는데 내 말을 복붙 하는 아저씨의 큰 목소리를 들었다.
14년 전과 코스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하긴.. 흐른 시간이 얼만데 여기도 뜨는 곳, 지는 곳이 있겠지. 마리나베이샌즈에 다다랐을 무렵, 어디선가 폭죽 소리가 나더니 불꽃놀이가 보인다. 오잉?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도 그런 글들을 종종 본 것 같다.
'지금 리버보트 탔는데 불꽃놀이 해요. 무슨 날인가요?'
정답은 없었다. 호텔에서 할 때도 있다고 하고, 주말에 할 때도 있다고 하고... 그냥 얻어걸리는 것 같았다.
근처에서 대형 콘서트가 있었는데 그거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알 방법은 없다. 그냥 야경+불꽃놀이 사진과 영상을 열심히 찍었다. 윙스오브 타임 쇼를 못 봐서 일정보다 하루 당겨서 오늘 리버보트를 탔는데 대신에 불꽃놀이에 당첨되었구나.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일희일비)
기특하다. 나 자신! 내일도 잘해보자.
마지막 일정을 끝내고 클락키 한 복판에 페어프라이스 가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곤 납작 복숭아(평소에 딱히 복숭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님. 납작 복숭아 한정 맹신도)와 간식 몇 가지를 사서 슬렁슬렁 숙소로 복귀한다.
오늘까지 아주 중요한 큰 일정들을 무리 없이 마무리한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내일부턴 좀 더 여유롭게 다녀도 될 것 같다. 많이 더워서 일정을 다 소화 못할까 봐 걱정을 했었다.(실제로 그런 후기도 많이 봤음)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크게 더운 날은 없었다. 싱가포르 더위는 올해 한국한테 진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