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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호 Feb 26. 2020

반쪽짜리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요즘처럼 기계와 인간의 싸움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때도 드물다. 기계 (더 정확하게는 인공지능)는 점점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이미 인간의 영역을 꽤 많이 대체했다. 공장에서는 인간 노동자를 찾아보기 드물어졌고 웬만한 가게를 가도 이제는 홀 서빙하는 사람 대신 키오스크가 대신 주문을 받고 있다. 아마존은 이미 드론으로 물건을 배송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착실하게 실행하고 있고, 테슬라의 무인 자동차들은 점점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 서비스업종, 운수업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한다. 말 그대로 기계가 인간의 밥줄을 위협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세기 초반, 섬유산업에 종사하던 영국의 노동자들이 방적기의 등장으로 대거 실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방적기가 인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싸고, 생산성도 뛰어날뿐더러 품질마저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업을 하루아침에 기계에게 빼앗긴 인간은 이 모든 것이 방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눈에 보이는 기계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역사는 이 사건에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시의 노동자들이 정말로 때려 부수고 싶었던 것은 방적기가 아니라 인간 노동력의 가치, 인간 자체의 가치를 폄훼하고 경제논리로만 인간을 바라보는 자본가들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간 노동자들은 또 한 번 기계에게 공격받고 있다. 기계는 200여 년 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날카로운 칼날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기계의 노동력이 월등히 뛰어나게 발전했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력이 너무나도 하찮아졌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들은 이전보다 월등히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게 되었고 사회는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소비가 미덕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사회의 발전으로 인해 경제가 발전했고 인간들은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수많은 실업자들이 존재한다. 이전에는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나 이번에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틈이 보이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삶은 더욱 윤택하고 편리해질 것만 같았는데... 우리의 앞날이 깜깜 해지는 대목이다.


 무려 100여 년 전에 이런 인간의 운명을 예언한 책이 있다. 1932년에 쓰인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1위이며 얼마 전에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도 다룬 책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과학과 사회가 고도로 발전한 2,600년대 런던. 사람들은 더 이상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지 않고 부화장에서 부화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장 뛰어난 알파부터 가장 열등한 엡실론까지의 계급을 부여받는다. 알파 계급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알파+ 로 태어난 버나드 마르크스는 부화실에서 직원의 실수로 인해 선천적으로 키가 작게 태어났다. 알파+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 때문에 차별과 무시 속에 살던 버나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모순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데이트를 하게 된 레니나라는 베타 계급의 여성과 함께 타지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들의 목적지는 런던을 벗어난 외곽지역, 이른바 "야만인 보호구역"이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상사가 젊었을 때 "린다"라는 여성과 함께 그곳을 방문을 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린다는 실종되고 자신만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야만인 보호구역에 도착한 버나드와 레니나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키가 크고 잘생긴 "존"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알고 보니, 존은 실종된 줄 알았던 린다의 아들이었다. 버나드와 레니나는 존과 린다를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오고, 존은 문명세계를 차근차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만난 문명세계는 온통 모순 투성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으며 신을 믿지 않고 아가페와 플라토닉이 배제된 에로스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노동의 대가로 지불받는 "소마"라는 약품은 환각제에 불과하다. 존의 눈에 비친 문명사회는 온 사회가 최선을 다해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회로 비친다. 결국, 문명사회에 깊은 환멸을 느낀 존은 그곳을 떠나 혼자 살게 되지만 문명사회로부터 받은 충격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다.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도덕과 사랑을 통한 이타심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는 존이 있고, 버나드와 그의 친구인 헬름홀츠도 일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 부류는 과학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토대로 한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도덕과 사랑, 이타심보다 우선하며 무한한 젊음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존과 버나드, 헬름홀츠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설 말미에 나오는 총통과 존의 대화는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주인공들이 가진 관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대화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분별한 자본주의와 과학의 발전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헉슬리가 예견한 미래사회의 모습은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유사한 점이 많다. 현재의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자본주의가 팽배한 세계에 살고 있다. 문명세계의 모습은 오늘날의 선진국들을, 야만인 보호구역의 모습은 극빈국가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사느라 각종 질병을 앓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유지하고, 존재 자체가 불분명한 신에게 각종 제사와 종교의식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시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온 존은 문명세계의 정점에 서 있는 총통에게 2가지 이유로 문명세계를 비난한다.


이타심

 소설 속에서 존은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자랐지만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온 어머니 덕분에 영어를 구사하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읽은 유일한 책이 셰익스피어 전집이었는데, 이는 작품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문명세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세계의 지도자들은 낡았지만 아름다운 셰익스피어를 통해 사람들이  낡은 것과 아름다운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소비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셰익스피어를 금지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이타심"에 있다고 본다. 문학작품의 본질은 독자로 하여금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끔 만드는 이타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주인공이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등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줄줄 외울 정도로 읽었던 존은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고 거북하다. 그들은 오로지 본인만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고 타인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존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할 줄 아는 이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존의 눈에 비친 문명인들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의 감정에 동감하며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좀비들과 다를 바 없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인간성의 상실로 그려진다.


유한성

 야만인 보호구역에 살던 존과 린다가 런던으로 왔을 때, 야만인만 사는 줄 알았던 곳에서 존과 같이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있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충격을 준 것은 린다였다. 린다는 늙고 살이 쪘으며 병이 들어 있었다. 문명세계의 사람들은 평생 30대 정도의 모습으로 살다가 죽기 때문에 "노화"를 목격한 경험이 없다. 또한, 비만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질병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고도로 발달한 의학기술 덕분에 질병을 앓지 않는다. 문명인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인간의 육체와 삶이 유한하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늙음과 비만, 질병은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공포였을 것이다. 인간들은 노화와 질병을 정복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 돈을 들였을 것이고 마침내 그것들을 극복해 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도 인류가 오랜 시간을 들여 가까스로 극복한 공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으니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야만인과 총통이 문명세계에 대해 언쟁을 벌일 때 야만인은 총통에게 불행해질 권리, 나이가 들어 추해질 권리, 질병에 걸릴 권리, 앞날의 불안함에 떨 권리를 요구하는데 이 요구들의 본질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이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쓰고,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슴 찢어지는 이별을 하고, 이별을 달래 줄 노래를 부르고,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추는 등 인간의 삶을 이루는 모든 감정은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이 죽을 때까지 늙지 않고 아프지도 않으며 가족을 꾸리지 않고 자유로운 연애만을 추구한다고 해도 인간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불행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의 삶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공존한다. 그의 삶 속에는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이 있고 "불행"이 있다. 하지만 문명인들은 삶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불행"을 지워버린 듯 한 모습이다. "불행"이 없으니 "행복"도 사라졌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의 자리에 "쾌락"을 억지로 끼워 넣었고, 그들의 삶에는 "행복"을 가장한 "쾌락"만이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문명인들은 "행복"과 "불행"을 모두 잃은 셈이다. 모자랄 것 없는 문명인들의 삶은 그래서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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