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소확행
가장 최근 들어 언제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려보라. 요즘 같은 시국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사치로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요즘 같은 시국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행복이지 않을까? 나의 경우를 보면, 얼마 전에 와이프가 커피머신을 새로 샀다. 안 그래도 폭발적으로 늘어난 온라인 쇼핑으로 인해 물밀듯이 밀려오는 박스와 플라스틱 포장용기들로 분리수거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이건 왜 샀냐고 핀잔을 줬지만, 늘 그렇듯 내무부장관님께서 결재하셨을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란 걸 깨달았다. 커피머신에 들어가는 캡슐은 플라스틱이 아니라 알루미늄이기 때문에 재활용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와이프를 (심지어 임신 중이시다) 이길 수 없겠다는 마음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뜩이나 쓰레기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에게 또 하나의 짐을 얹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지만 어이없게도 이 녀석이 나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커피를 내릴 때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은 최근 들어 나에게 행복함을 안겨주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다. 사실 난 커피맛이라고는 1도 모르는 커피 문외한이다. 하지만 커피를 내리는 향만큼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아침 산책이다.
나는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원래는 회사의 출근시간이 8:30분이었기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 10분 지하철을 타야 했었다. 그러면 보통 20분쯤 일찍 회사에 도착한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회사의 출근시간이 9시로 변경되면서 더 늦게 출근을 해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7시 10분 지하철을 탄다. 까딱 잘못해서 이 차를 놓쳐도 회사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경기도민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이렇게 7-8년을 살아오다 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렇다 보니 보통 주말에도 7시 전후로는 눈을 뜬다. 보통은 이때 눈을 뜨더라도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평일에 누릴 수 없었던 아침잠을 주말에라도 누려보겠다는 심산에서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서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걷기의 효능에 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최근에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집 밖을 나서기가 쉽지 않았는데, 마침 새벽이라 사람들도 없을 것 같으니 한번 걸어보자 싶어서 무작정 산책을 나섰다. 요즘은 일출 시간이 7시 50분 정도이기 때문에 어두컴컴한 길가에는 예상대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걷다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저 귀에 들려오는 노랫소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사실 늘 다니는 길을 산책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풍경이랄 것도 없고, 문을 연 가게나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보니 구경할 만한 것들이 마땅히 없다. 그렇게 음악에만 오롯하게 집중하며 30분쯤 걷다 보면 문득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두서없이 떠오른 이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온다. 이렇게 차례차례 떠오르는 생각들에 집중하며 걷다 보면 슬금슬금 해가 떠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해가 떠오를 때의 하늘 색깔은 정말 예술이다. 연한 주황빛으로 물든 구름과, 미쳐 흩어지지 못한 밤기운이 남은 푸른빛 섞인 하늘은 황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해가 떠오르는 쪽을 향해 걷다 보면 마치 아침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롭게 떠오르는 햇살로 내 몸 구석구석에 침잠해 있던 어둠을 털어내며 오늘 하루의 시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은 그 자체로 충만한 행복감을 준다. 잠시 마스크를 내려 차갑고 달콤한 아침 공기를 마시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가 폐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은 시원함을 넘어서 짜릿하기까지 하다. 보통 한 시간 정도를 걷는데 이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 행복한 마음이 조금 더 이어진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블루"라는 새로운 질병을 얻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길거리에서 웃는 사람들을 도통 본 기억이 없다. 모두들 마스크 뒤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퇴근 후에 마음이 맞는 동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 한 잔 마신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친구들을 마음 편하게 만날 수도 없게 되었고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병균 취급하는 것에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사람들은 점점 웃음을 잃었고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처럼 소확행이 간절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작고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너무나도 절실한 요즘이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에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이 환한 웃음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