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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호 Nov 22. 2022

빨간 아버지의 하얀 해방

아버지의 해방 일지 - 정지아

 한 지붕 아래에서 짧게는 십 수년, 길게는 몇십 년을 함께 사는 것이 부모 자식이다. 그래서인지 자식들은 부모님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큰 착각은 지금 내 부모님의 모습이 그들의 본모습이라는 점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내가 변한 것을 느끼는데, 나의 부모라고 다를까. 이 책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부모의 뒷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주인공인 ‘아리’는 빨갱이 부모 사이에서 난 외동딸이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 고상욱 씨는 민중을 지키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빨치산이 되었다. 그로 인해 아버지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아버지의 죄는 집안 가족들이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놓일 때마다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가 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아버지는 잘 짓지도 못하는 농사를 책에서 배워가며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그 와중에도 어려움에 처한 민중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아는 사람들 몇 명이 아버지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가기도 하고 보증을 부탁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속이 뒤집어지든 말든, 아버지는 사기를 당할 때마다 “오죽흐먼 나헌티꺼정 그랬겄어” 라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아버지가 당했던 그 수많은 사기가 사회주의 혁명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민중들을 돕는 데에 발 벗고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의 기본은 유물론이라고 믿었는데, 인간은 먼지에서 시작해서 먼지로 돌아간다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엔가는 자신이 죽으면 무덤 같은 것은 만들지 말고 싹 태워서 아무 데나 뿌려버리라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무덤 같은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돌연 돌아가셨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유물론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평생을 정색하며 살아왔던 아버지게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사인이었다. 빨갱이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도망쳐 서울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주인공 ‘아리’에게도 아버지의 부고가 닿았다.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아리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듣게 된다. 나의 기억 속 아버지와 사람들의 기억 속 아버지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소설 속에 전개되는 이야기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지만, 인물들의 대사를 모두 사투리 그대로 살렸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사투리를 사용함으로써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등장인물들이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현장감이 들었는데, ‘고상욱’씨의 장례식장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문객들이 쏟아내는 ‘고상욱’ 씨를 같이 알아가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다녔던 길목마다 하얗게 태운 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리고 다니는 장면이었다. 집안 어른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뼛가루를 여기저기 뿌리겠다고 한 것이다. 아버지의 온기가 그곳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를 바라며 뼛가루를 뿌리는 장면은 그 어떤 장례식 행렬보다 의미 있고 아름다웠다. ‘무덤’이라는 공간은 우리에게 죽은 이를 기억하게 하는 장소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잊고 지냈던, 잊어야만 하는 죽은 이를 이곳에서만큼은 마음껏 기억하고 그리워해도 된다는 허락 같은 공간이다. 결국 ‘무덤’이라는 장소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구분하는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아리는 아버지의 뼛가루를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니며 그 경계를 당돌하게 허물어버렸다. 아버지는 사람이 죽으면 그저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가고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먼저 떠난 사람들의 자취가 오래도록 어우러져 온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이 ‘아버지의 해방 일지’인 이유도 평생 빨치산이라는 올가미에 옥죄여 살던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야 하얀 뼛가루가 되어 이 세상을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 혹은 ‘부모님의 헌신적인 희생’ 등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그런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고,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헌신하는 부모의 모습과 철없이 사고나 치고 다니면서 부모님께 상처만 주는 못난 자식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마치 ‘부모님 마음을 1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아, 지금이라도 후회의 눈물 한 방울을 흘려서 너에게도 양심이 있단 것을 증명해보거라’라고 말하듯, 작정하고 독자들의 눈물을 뽑으려는 소설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들은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읽긴 하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 속에서도 쉽게 잊혀진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약간 다르다. 철없는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아버지의 헌신적인 희생 혹은 무한한 사랑 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 자식에게 보내는 한 편의 긴 자기소개서 같은 느낌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고아리의 아빠 고상욱’ 이 아니라 ‘인간 고상욱’의 자기소개서.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 책이 화제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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