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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Jan 15. 2024

어른인 척 하는 시간

연일 강추위가 몰아쳤다. 햇살이 그리워 지난 8월에 쓴 일기를 뒤적이던 중, 거친 글씨로 휘갈겨 쓴 여름날의 기록을 찾아냈다.


둘째가 모기 물린 데가 가렵다며 새벽 5시에 발딱 일어나 앉았다. 잠에 취해 건성으로 모기 패치를 붙여 주었더니 삐뚤게 붙였다며 야단이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려 방을 휘 둘러보니 조금 열린 창에선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아침에는 비가 좀 듣는 듯하더니 이내 그치고 숨 막힐듯한 습기가 몰려왔다. 바싹 말랐던 빨래가 물먹어 냄새가 날까 걱정돼 베란다에 널린 옷들을 급히 걷었다.


인간도 동물의 한 갈래라는 것을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 날씨 변화에 몸과 마음이 따라갈 때, 인간도 결국 대자연의 일부란 것을 새삼 깨닫곤 한다. 몸과 마음이 묵직하다. 습기가 나를 먹은 건지 내가 습기를 먹은 건지 퉁퉁 부은 몸으로 겨우 밥을 차렸다.


둘째를 등원시키러 손을 잡고 나오는데 마주 잡은 손바닥이 촉촉하다. 땀 많은 둘째가 날씨를 타는 거다. 손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물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인데, 아기 땀 냄새는 진짜 향그럽다. 어른 땀같이 퀴퀴하고 찝찝하지 않다. 이마랑 인중에 송송 맺힌 땀 냄새를 소중하게 맡으면서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까지 걸어왔다.


걷는데 관절 마디마디가 쑤신다. 걸음걸이가 삐걱삐걱거린다. 비뚤어진 골반이, 뒤로 쑥 빠진 무릎이 찌릿찌릿 신호를 보낸다. 오늘 비 올 것 같애, 너 오늘 허리 많이 아플 예정이다 같은 신호를.

다 내팽개치고 집에 누워 넷플릭스 파티(젊은이들이 이걸 줄여서 넷파라고 하는 걸 오늘 알게 되었다)나 하면 좋겠지만 안될 말이다. 몸이 이 지경일 때는 한의원 가듯이 요가원에 가야 한다. 가서 몸을 조져놔야 오후에 좀 덜 삐걱대며 걸을 수 있다.


한 시간 반 동안 전굴, 소 자세, 고양이 자세, 하누만 자세 등 골반 여는 동작을 반복했다. 제일 무서워하는 우스트라아사나(허벅지 미는 동작)도 세 번이나 했다. 머리 서기, 어깨 서기도 십 분이나 했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니 성가시게 쿡쿡 찔러오던 골반통이 좀 줄었다.


이제 첫째 데리러 갈 시간.

여름 방학은 진득진득하니 늘어진다.

학교는 일주일 정도만 오전 2시간 방학 특강을 하고 3주를 내리 쉰다. 아침에 요가원 갈 수 있는 날도 이번 주뿐이다. 3주를 이 가동성 떨어지는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아직 아무 계획이 없다. 둘이서 도서관 투어나 다니든지 무료 물놀이장을 쫓아다니든지 해야겠지.

나야 밤에 일하니 그나마 방학을 견디고 있지만 일하는 엄마들은 이 방학을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괜히 남의 집 걱정을 하다가 에이, 내 코가 석자다 싶다. 나는 동네 아줌마 친구가 없어서 이 방학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교성 좋은 내 지인은 여러 친구 집에 놀러 다니면서 점심도 같이 만들어먹고 물놀이도 같이 간다던데. 그럼 하루가 금방 가버린다던데. 부럽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감당할 에너지가 없을 게 뻔하기에 어차피 황이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만, 그래서 아이에게도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지만, 아이도 나도 그게 된다. 오로지 둘이서만 도서관에 다니고, 카페에 가고, 집에서 뒹굴방굴 시간. 둘이라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둘이라서 허전하기도 우리 관계.


방학엔 내가 제대로 애를 키우고 있는 건지 더 많이 의심하게 되어서, 그게 참 어렵다. 아이에게는 나 뿐이니까. 나라는 엄마 뿐이니까. 내가 사는 방식으로만 아이를 키우게 되니까. 내 인생도 똑바로 못 살고 있는데 어린 인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어버려서 아주 곤란하다. 만화책이나 보면서 낄낄대고, 잠 자는데 목숨 걸고, 가끔 고등어 한 마리 구워주면서 뿌듯해하는 엄마. 아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도 여름 무더위를 뚫고 자식들이 태권도장에 가 준 이 한 시간이 참 귀하다. 허리는 뭉근히 아파오고 엉덩이는 저릿저릿하지만 글 한 자라도 쓰고 나니 정신만은 가볍다.


둘째 녀석. 오늘 5시에 일어났으니 저녁밥 먹이자마자 눕히면 30분 안에 잠들어주겠지?


잠든 아기 볼냄새 맡으면서 나도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다. 뜨뜻하게 데운 팥주머니 허리에 대고 내일은 날씨가 궂지않길 바라본다.


지금은 겨울방학 중이다. 역시나 비슷한 고민-내가 제대로 엄마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가운데 하루가 저물었다. 허리는 여전히 아프다. 하루종일 엄마인 척, 제대로 된 어른인 척 하는 것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도 해냈다. 별 탈 없이 무사히 밤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정신없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시간.

애들 재우고 새벽까지 '넷파'를 벌일 예정이다. 그러려면 애들을 빨리 눕혀야 한다. 마음이 괜스레 바다.


설거지를 하다 문득 눈길을 던진 바깥에 웅덩이가 얼어 반짝인다.

겨울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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