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나무 Feb 08. 2024

보고 또 보는 마음

(자매마음: 읽고 또 읽는 마음)

읽은 책을 기록해 두는 어플이 있다. 햇수로 4년째 쓰는 중인데 내가 어떤 책을 읽어왔나 리스트를 쭉 훑어보다 보니 매년 5~8권 정도는 읽었던 책을 또 읽었던 것을 알게 됐다. 읽었던 책을 또 읽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다시 읽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 읽고 있는 소설도 두 번째 읽는 인데 외계인과 지구인의 사랑을 다룬 아주 말랑말랑한 이야기(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다. 3년 전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렇게 오글거리는 대화라니. 이런 이야기는 내 취향 아닌데' 하며 엄청 재밌게 읽었다. 11년 사귄 남자친구는 우주로 여행을 떠나고, 남자친구 몸을 가진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는 지구인. 현실성 없는 설정이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순수하고 직설적인 외계인의 사랑법이 귀여웠다.


오랜만에 그 말랑말랑한 느낌이 그리워 다시 읽고 있는데 역시나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런데 너무 재밌다. 이 정도면 그냥 내 취향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보다. 한 번 읽고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재미있다였지만, 두 번 읽으니 내 취향 중 이런 것도 있다고 인정하게 돼버렸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건 설렌다. 이미 인쇄되어 나온 책이 스토리가 바뀔 리가 없는 게 당연한데도 왠지 뒷 내용을 모르는 책을 읽을 때처럼 더 궁금하고 페이지를 얼른 넘기고 싶다. 책의 어디쯤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아니까 거기까지 가는 동안 더 재밌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된다. 그렇다고 앞부분을 읽지 않고 넘기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처음보다 더 꼼꼼히 한 발짝씩, 한 페이지씩 읽는다.


이런 심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또 볼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는 편 아니지만 보고 또 보는 몇 편이 있다.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과 우리나라 영화 <리틀 포레스트>,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 그것이다. 두 편의 영화는 잔잔하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전부터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했다. 별일 없는 영화. 문득 심심하거나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이런저런 일들로 머리나 마음이 복잡할 때 두 영화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료함도 덜어진다.


<카모메 식당>은 헬싱키에서 일본식 오니기리를 파는 작은 식당이 주 배경이다. 처음손님이 없었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손님으로 북적이는 식당이 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리틀 포레스트>는 배우 김태리 계절별로 다양한 음식을 요리하고 먹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요리 중 특히나 아카시아꽃 튀김을 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끓는 기름 안으로 아카시아꽃을 넣으면 파도소리를 닮은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꽃이 피듯 보글보글 하얗게 부풀어오는 튀김이 너무나 예쁘다.


영화가 시작되면 내 마음이 꽂힌 장면이 어디쯤 나올지 알지만 절대 앞 구간을 넘기지 않는다. 그 장면에 닿을 때까지 이미 여러 번 봤을 이야기를 다시 음미한다. 드디어 그 장면에 도달했을 때 역시나 다시 봐서 좋다는 생각을 어김없이 하고 만다.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지만 시트콤은 예외다. 시트콤은 시트콤답게 웃긴 게 최고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15년 전 대학생 시절 휴학을 하고 상경해 신촌의 어느 고시텔에서 잠깐 살았을 때 방영됐었다. 혼자 좁은 방에서 배꼽 잡고 깔깔거리며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놀라운 건 지금도 보면서 깔깔거린다는 거다. 어떤 내용일지 다 알면서도 어김없이 웃음이 터지고 만다. 15년이 지나도 웃긴 게 신기해서 웃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15년의 세월 체감해서 라기도 한다. 식당 전화번호를 몰라서 114에 전화해서 물어보는 장면이 그렇다. 시 보지 않았다면 굳이 멈출 장면이 아었다. 다시 봤기 때문에 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무언가를 보는 건 뒷내용을 모르고 볼 때와는 확실히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아니까 기대하고 기대한 대로 그 장면이 나왔을 때 언제나처럼 좋다. 몇 번 본 장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때 기분은 책을 다시 읽으면서 좋아하는 문장으로 다가가기 위해 한 페이지씩 읽으며 마침내 그 문장을 다시 만났을 때의 기분과 정확히 같다. 또, 엄청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그 음식이 나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키며 냄새를 맡고 한 입 먹었을 때, 알고 있는 향과 맛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현된 걸 깨달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보고 또 봐도 좋고 읽고 또 읽어도 좋은 몇 가지를 적다 보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만으로 기분을 좋게 해 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1년에 1개씩만 발견해도 수익률 큰 주식 종목 하나를 발굴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년 보물 모으듯 하나씩 모아가고 싶다. 형태는 다르지만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그 보물들은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나를 웃기고, 때로는 위로해 주며 삶의 원동력이 되어 게 분명하다. 보고 또 보고 싶을 나의 n번째 보물콘텐츠는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만나게 될까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석을 좋아하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