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더 베어>
글을 쓰든 운동을 하든 일을 하든, 내가 잘하는 게 내가 재밌어하는 거인 사람인데. 내가 쓰면서도 내 글이 재미가 없다? 그건 감이 다 뒤졌단 뜻이죠. 억지로 하는 거고. 재밌자고 하는 건데 왜 이러고 있는 건가 싶고. 오랫동안 쓰지 않던 칼처럼 무딘 말들로 가득한 문장들을 지워내며 자괴감에 빠지고. 재미없다는 말(실제로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ㅎ)에 발작 버튼이 눌리고... 최근 감다뒤 상태가 된 나를 어떻게든 감다살 상태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몰입할 때 가장 재미있는데 요즘은 그 단계까지 가는 허들이 너무 높은 느낌이에요. 하나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일상이 산만해서 그런 거 같기도 합니다…
너무 정리 정돈을 열심히 하느라 날 것의 재미를 놓쳐버렸다ㅏㅏㅏ
누군가 제게 해 준 이 말에 가슴을 푹 찔려버렸달까요; ㅎ 중요한 건 정리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건데 그걸 놓치고 있었다 이 말입니다…!!!
사실 포장만 열심히 하려는 건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이 부실하다는 말인데, 저는 왜 이리도 치장에 집중하는지요. 그걸 고민할 게 아니라 알맹이를 보완해야 하는 건데. 핀트를 완전히 잘못 맞추고 체력과 정신력과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제가 이제서야 보입니다...
도파민 중독자로 살아도 모자랄 판에 자극을 멀리한답시고 마라탕도 0.5 단계로 먹은 지난날의 나와 작별하며… 내 추구미 마라탕 msg 팍팍
감다살 하러 요즘 난리인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를 봤습니다. 같이 글 수업을 들으시는 작가님이 맡은 콘텐츠라 방영 전부터 기대하고 있긴 했다만, 예상보다 반응이 뜨겁습니다. 역시 감다살 콘텐츠는(백종원 안대 쓰게 한 것부터) 달라달라... 다들 요리 진짜 잘 만들고, 서바이벌이라는 형식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너무 흥미로워요. 자기 요리에 진심인 흑백 셰프들부터 시작해서, 대중 입맛을 대표하는 백종원과 절대 미각 안성재. 요리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전문성이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셰프들 자료 조사, 섭외, 세트 구축, 각 단계별 미션 등 기획 단계에서부터 엄청나게 공들인 건 당연하고. 보면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점은 편집할 때 니쥬를 진짜 잘 쌓는다는 거였습니다...bb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 참가자가 붙을지 말지 궁금해서 미치겠고 심장 쫄려 죽겠다'인데 그걸 너무 잘 보여줍니다. 참가자 한 명이 나오고, 그 참가자의 닉네임을 바탕으로 빠른 시간 안에 캐릭터성과 서사를 쌓아 올리고, 참가자들 다 떨어지는 거 연속으로 보여줘서 불안 분위기 조성하고, 서사 쌓아 올린 참가자의 음식을 심사위원이 먹고 평가하는 데에서 끊고... (2화 중식여신 같은…) 이렇게 분위기를 만들고 몰아가는 능력을 좀 배우고 싶을 정도로 의도가 확실하게 편집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성재 셰프님의 심사평에 참가자뿐만 아니라 저도 같이 때려 맞고 있습니다. ^_^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사평이 예술입니다.
"아, 뭘 해야 돼, 뭘 해야 돼" 하면은 약간 이도 저도 아닌 잡탕이 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어서 그냥 '믹스쳐 오브 플레이버'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아요.
…순살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깊으면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로 꿰어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소한 질문에도 무너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모래성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실 어떻게 해야 무너지지 않는 글을 쓸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것저것 가져오지 않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뒤에 가져오면 될까요? 방법은 잘 모르겠고 열심히 여러 번 만들다 보면 알게 될까요? 여러 개의 가지가 자연스럽게 뻗어 나올 수 있도록 중심을 더욱 단단히 해야겠습니다. 담금질을 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안성재 셰프님을 보면 딱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는데요. 바로 <더 베어>의 카르멘이라는 사람입니다.
<더 베어>는 연출이 정말 미친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캐릭터도 더 미쳤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카르멘을 이렇게까지 좋아할 계획은 없었는데요. 보다 보니 정이 들어서 시즌 3까지 무리 없이 봤습니다. 카르멘도 <흑백요리사>에 나오는 셰프들처럼 능력이 뛰어난 파인 다이닝 셰프입니다. 각종 강박이 있고 자신의 일에 엄청나게 엄격한 캐릭터임에도 가끔씩 무심히 드러나는 팀원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귀엽고, 완벽을 향한 집착이 참 매력 있는 캐릭터입니다.
주방이라는 공간은 1분 1초가 빠르게 흘러가는 곳입니다. 이 콘텐츠 감상 글을 쓰면서 깨달은 건데, 저는 셰프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나 봅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식욕과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 영상이 주는 만족감도 있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창의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
요리와 대본 작업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1. 재료 선택 = 소재 선택
어떤 재료를 내가 잘 다룰 수 있는지, 이 재료를 어떻게 써야 맛있을지, 다른 사람들도 이걸 좋아하는지 결정해서 골라야 합니다.
어떤 소재가 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요즘 시대와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내가 이걸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려해야 합니다.
2. 메뉴 결정 = 발상과 장르 결정
여기서는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남들이 다 하는 뻔한 메뉴로는 차별화를 줄 수 없습니다. 스타일을 섞거나, 이 재료로 이 음식을?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려면 다양한 식재료들의 맛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끝까지 보도록 할 수 있는 훅을 설정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르도 설정해야 합니다. 장르를 섞다가 이도 저도 아닌 잡탕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조리 = 구성, 쓰기
재료를 썰고, 다듬고, 씻고, 찌고, 데치고, 굽고, 말리고, 우리고... 다 합니다.
씬리스트를 만들고, 구성을 하고, 대사를 쓰고, 지문을 씁니다. 쓰고 또 쓰고 또 고쳐서 씁니다.
모든 단계가 중요하겠지만, 1번과 2번은 어느 정도의 감에 의존하는 작업이라면 3번은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만드는 일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요리를 잘하는 셰프들은 칼질을 정교하게 할 줄 알고, 고기를 적당한 온도에 익힐 줄 압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캐릭터의 말투를 정교하게 쓸 줄 알고, 이미지를 적절하게 연결할 줄 알아야겠죠. 연습만이 살길입니다. 디테일을 잡고 싶습니다... 칼질 하나에도 각이 잡혀 있던 셰프들처럼, 대사 하나에도 그 캐릭터가 보이도록 쓰고 싶습니다...
머리에 이런 게 들어있다고 해도
기술이 없으면 이렇게 나오니까요 ;
말이 3마리 있다는 점에서 전달하려는 바는 전달한 것 같습니다; ㅎ
어느 단계에 이르면 기술보다는 열려 있는 게 더 중요한 듯해요.
세상이나 나 자신 타인에 대해서요.
내가 먹어 본 진짜 대단한 요리들은 엄청 어려운 요리이거나
셰프의 요리 기술이 뛰어난 요리가 아니라
영감받은 게 보이는 요리들이었어요.
<더 베어>에서 카르멘과 함께 일했던 셰프가 한 말입니다.
일단 저는 아직 '어느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 말이 참 좋았습니다. 만드는 일에는 기술이 필요함과 동시에 어떠한 태도도 요구됩니다. 열려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편견과 선입견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처박아두지 않고 때 빼고 광낼 수 있는 사람이요. 가을은 그러기 좋은 계절입니다. 청명한 가을을 신명 나게 보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