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빠져나올 것을 생각하면서 들어가지요.”
세계은행(World Bank)에 근무하는 개발 전문가를 만난 것은 파키스탄 라호르(Lahore)의 어느 호텔 로비에서였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하며, 단순히 수원국인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원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듣다보니 캄보디아에서 추진했던 앙코르와트 우회도로 건설사업이 생각났다. 세계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앙코르와트 주변에 각종 건설사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차량이 인접 도로를 사용하였다. 낙후한 지방도로는 덤프트럭의 둔탁한 진동을 앙코르와트 고대 건축물에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캄보디아측이 요청해 지원한 것이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우회도로 건설사업’이었다. 차제에 우회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데 양측은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포장방식에 이견이 있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관광사업 전담기관인 압사라 청(Apsara Authority)은 현지 홍토인 라테라이트(laterite)로 포장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앙코르와트의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벽돌은 라테라이트 성분을 가진 홍토였다. 이를 사용하여 도로를 조성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앙코르와트의 건축물처럼 내구성이 큰 구조물로 바뀔 것이라며, 현지에서 증명된 방식으로 공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나라 도로 전문가들은 아스팔트 포장방식을 주장했고, 사업비가 과다하다면 반포장방식인 아스콘 포장을 해야한다는 대안으로 제시했다.
결국 수요자인 캄보디아 측의 주장대로 도로공사를 진행하면서 라테라이트 성분을 사용했지만, 외관상으로는 영락없는 비포장도로였다. 맑은 날씨에는 황사 같은 뿌연 흙먼지가 날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진흙처럼 엉겨 붙어 차량진입을 제한해야 했다. 열대지방의 장마철이 되니 사업은 지연되었고,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이 공식방문하는 계기에 그들은 앙코르와트 현장방문을 준비하였다. 당시 반기문 외무장관은 흙먼지가 날리는 도로 현장을 둘러보며 캄보디아 측 인사의 요청대로 도로 포장을 언약했다. 뻔히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격이었다. 그 결과 어떻게 부정부패로 이어졌고 어떤 불이익이 시민들에게 돌아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지만, 합리적 의심은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아스팔트 포장방식으로 진행하였으면 시간과 예산을 절약했을 터인데, 이처럼 장시간이 걸리는 방식을 고집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다소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기존 2차선을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주변에 살던 거주민들과 땅이 문제였다. 2년여에 걸쳐 흙먼지를 날리는 도로공사로 인해 하루살이로 살아가야 하는 인근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곡물을 키우던 논과 밭을 누군가에게 팔아넘겨야 했다. 나중에 도로 현장을 찾았더니 오직 한 가게만이 공사 중인 도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오토바이 정비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에게 몇 가지 물어 보았다.
“도로 포장공사 때문에 먼지가 많아 불편하지 않나요?”
“...” 얼굴에 미소만 가득한 채 빙긋이 웃기만 했다.
“땅값이 많이 올랐나요?”
“하하하” 사장님은 크게 웃으며, “그렇습니다. 이제 도로가 포장되면 오토바이 손님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압사라(Apsara)의 담당 과장이 현지식 호텔을 몇 개 가진 부자라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캄보디아 측의 누군가가 우회도로가 개발될 것이라는 정보를 이용해서 인근 지역을 투기 목적으로 사들였다는 얘기도 들렸다. 아스팔트 포장공사가 진행되면서 그간 올랐던 지가가 폭등했고 그 개발이익을 누군가가 독점했다,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원조를 통해 추진되는 개발사업의 이익이 특정 공무원이 사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공익화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개발이익을 공유하는 제도가 이미 구축되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공무원이나 지역 정치인에게 개발이익을 몰아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회 갈등을 조장한다.
아프리카 가나(Ghana) 정부로부터 모자보건 병원을 건축하는 사업을 제안받아, 한국 전문가를 모시고 현장을 방문했다. 가나 보건부는 그 지역에 의료단지를 조성하려는 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강의 구역이 정해져 있는 듯 우리를 안내한 현장은 접근로가 이미 조성되었다. 그런데 건축이 완료된 후 전기를 끌고 올 배전선과 변전 시설이 없었다. 또한 수백 명이 생활하고 근무할 건축물의 배수 인프라가 없었다. 우리 측은 이미 이러한 인프라가 있을 것을 전제하여 협의를 진행해왔다. 건축 전문가도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일해온 탓에 주변 인프라가 당연히 조성된 것을 전제로 내부 건축 구조와 공간 배치 등에 관해서만 고민했다. 유사한 상황이 알제리(Algérie)의 신도시 아파트 건설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터였다. 중국 측이 차관형식으로 신도시 구역에 건립한 아파트는 전기 스위치를 올려도 전등이 밝혀지지 않고, 주방의 수도꼭지를 열어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제리 정부가 사전에 인프라를 조성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중국 업체가 인프라 조성은 ‘나 몰라’라 한 것이리라.
양측의 분담사항을 정하는 협의를 하면서 인입부까지의 전기선과 전기설비를 구축할 것과 입주민 수를 고려하여 적정한 규모의 하수도 시설을 구축한다는 내용을 문건에 명시했다. 병원이 완공되어 개원식을 할 때 막상 병실에 전등이 켜지지 않고, 화장실의 배수가 되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그런 경우 대개는 공여국이 해결하게 된다. 이것을 수혜국인 개도국은 너무나도 잘 안다. 제국주의시절 식민지를 경영하며 자신의 나라를 수탈해갔으니, 당연히 도와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내리고 있다. 그래서 공식 문건에 기록된 협의 내용과 달리 결국 수원국의 부담이 공여국으로 전가되는 일이 적지않다.
원조사업을 집행할 때 가장 긴요한 것중 하나는 차량이다. 개도국 현장에서 원조를 집행하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 업체이거나 한국인 전문가이기에 차량은 실무집행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원조는 사업의 내용을 양측이 분담하는 형태로 추진된다. 수원국이 토지를 제공하거나, 노동력, 시설의 이용 등을 제공하고, 공여국은 돈을 제공하거나 물건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모로코(Morocco)는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지만, 사하라 사막 위편에 있고 지중해와 대서양을 품고 있는 곳이다. 이슬람 문화의 모로코는 가톨릭 문화의 스페인과는 묘하게 서로를 공유하면서도 서로가 다르다.
모로코는 왕국이어서인지 토지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 체계가 정비되어 있지 못했고, 이것이 외국인이 투자를 피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지도상에 명확히 구역을 특정하고 해당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문서로 보장해주는 지적도 수립사업은 외국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외국인 투자로 건물을 세워 그 소유권을 보장하고 부동산 임대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중요한 인프라 구축사업이었다.
3일이 넘는 협의 일정에도 불구하고 출국 당일에서야 가까스로 협의 문건에 서명하였던 이유는 차량 때문이었다. 모로코 측은 사업 수행자가 사용하게 될 차량을 임차할 것을 요구했고, 우리는 한국에서 차량을 수입하여 사용하다가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차량 임대가격이 높아 일 년간 임차할 경우 차량 구매가격과 비슷했다. 사업기간은 최소 3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국산차의 현지정비 여부를 알아보니 문제가 없었고, 차량 수입절차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토록 부청장이 고집했던 이유는 청장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친인척이 차량임대업을 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때 상황을 간과하고 차량 임차로 합의했다면, 사업을 수행한 우리나라 업체는 적지않은 손해를 봤을 것이다.
가나(Ghana)는 서부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도 그나마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경험했고, 치안이 안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선진적인 영농법과 수리기술 등을 이전받고 싶어 했다. 국내 농업 전문기관도 현지에 전문가를 파견하여 활발히 활동하고자 했다. 서로 이해가 맞아 원활히 진행되는 듯 했는데, 막상 행정차량이 확보되지 않아 책임자가 고생한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면세대상이 ‘농업용 차량(agricutural vehicle)’으로 합의서에 명시된 까닭에 일반 차량은 관세를 물어야 통관할 수 있다고 했다. 행정차량에 부과되는 세금이 적지 않았다. 그저 차량(vehicle)이라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그런 결과가 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얼마 후 그곳에서 함께 일하다가 귀국한 전문가가 말라리아로 사망한 일까지 생겼다. 나이가 지긋한 까닭이기도 했겠지만, 현지에 적응해서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 이처럼 결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진심으로 그분의 명복을 빈다. 한국사람들이 미처 모르는 “빨리빨리”와 함께 하는 동반자가 “대충대충”이고 “까이꺼(까짓꺼)”다. 그런데 대충대충 시간을 때우지 않고 치열하게 일해도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이 해외 원조사업이다. 함정이 많은 것이 원조사업이고, 그 덫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내가 살아있음에 그저 감사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