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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body Nov 05. 2020

여행이 사라진 날

문 없는 집에서 창밖 보기

살면서 여행을 아주 많이 다닌 편은 아니다. 일상과 책임을 한편에 밀어 두고 무조건 떠날 만큼 여행에 미친 적은 없고, 혼자서 무작정 떠날 용기도 없었다. 생활에 큰 구멍이 나지 않는 범위에서 쪼잔하게 계획을 짜가며 어쩌다 가고, 그렇게 가서 보고 먹고 느낀 것들을 소중하게 되새김질하며 추억 서랍에 정리해 놓으면서 나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떠들고 다녔다.


계획을 짜면서부터 에너지가 용솟음치고 돌아오는 길에서까지 조증 상태로 들떠 있었던 순간들을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생활이 여행을 허용하지 않아 몇 년씩 해외여행을 못 간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얼마 후 언제쯤 어디에 가야겠다는, 시간을 내고 마음을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당장 못 떠나는 이유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숨 막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전에는 내가 다른 일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은 문이 없는 집안에 갇힌 기분이다. 먼 옛날 같지만, 아니 정말 먼 옛날이지만, 여행자유화 이전에는 다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외여행 없는 삶을 잘들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우물 밖이 어떤지 알아버렸고, 완전히 다른 장소가 주는 자극에 익숙해져 버려 문밖을 갈구하게 되었다. 영화 <마이 마더>에서 주인공이 평생 살아온 편안한 집과 전지전능한 로봇 엄마에게서 벗어나 미지의 외부 세계를 꿈꾸었던 것처럼 나는 편안한 내 침대와 모국어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조금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공간으로 가고 싶어 한다. 일상과 완전히 다른 장소, 익숙한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터전에 발을 내딛고 싶다.


요즘은 미지의 세계라는 곳이 잘 없긴 하다. 공유되는 지식과 정보가 엄청나서 이제 웬만한 곳은 인터넷이 다 보여주고 설명해준다. 사진과 영상으로 보고 알 수 있는데도 그렇게 보니 가고 싶은 곳이 오히려 더 많아졌다. 술이나 빵의 존재를 몰랐다면 새롭고 맛있는 와인과 빵을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와인 매장에 가면 집에 보관하고 있는 와인과 다른 수백, 수천 가지 와인이 있을 테고, 맛본 적 없는 스타일도 있을 것이다. 와인 산지에 가면 우리나라 매장에도 없는 신기하고 맛있고 재미난 와인이 있을 테고, 왜 그런 와인을 만드는 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럽과 미국 포도밭에서는 이제 수확을 마무리하고 와인 양조가 한창이겠지. 물론 늦수확하는 품종이나 지역도 좀 있겠지만...... 발효의 향기를 맡고 싶다.


머나먼 포도밭에서 자라 알지 못하는 와인메이커의 손을 거쳐 술이 된 와인이나 마셔야겠다. 문이 다시 생기는 날 그 문을 활짝 열고 나갈 날을 꿈꾸어야겠다. 조지 버나드 쇼가 그러지 않았나? 술은 삶이라는 수술을 견디기 위한 마취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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