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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body Nov 05. 2020

아빠의 향기

상남자의 향, 올드 스파이스

올드 스파이스 애프터셰이브 오라자널



아빠는 70년대의 미국에 반하셨던 것 같다. 알고 보면 무지하게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시기이긴 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셨던 아빠는 그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나 지미 헨드릭스에는 관심 없으셨지만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좀 남기는 머리스타일을 하셨다.


당시 미국에서 무척 인기 있었던 애프터셰이브 로션이 올드 스파이스였고, 심지어 엘비스 프레슬리도 사용했다고 한다. 70년대 미국에는 아쿠아 디 파르마 같은 전통적인 유럽 향수를 쓰는 남자들이 별로 없었고, 남자들이 화장품이나 향수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올드 스파이스는 캐딜락, 코카콜라, 오레오 같은 미국 상품처럼 정체성이 확실했다. 90년대 말보로 담배 광고처럼 상남자의 느낌을 주는 화장품이었다.


아빠는 범선 그림이 있고 아이보리색 유리병에 든 그 제품을 오랫동안 매일 사용하셨다. 아침마다 면도 후 알코올이 듬뿍 든 그 마초 화장품을 얼굴과 목에 척척 바르고 나오셔서 나와 동생을 안고 뺨에 뽀뽀를 해주셨다. 뭔가 독하지만 좋은 그 냄새는 멋진 아빠의 냄새였다. 지금은 한물 간 싸구려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아직 생산은 되고 있다. 2016년에 P&G에서 제조사 Shulton Company를 인수해 약간 다른 성분으로 만들고, 향조도 약간 달라졌다. 마니아들은 오리지널 향을 그리워하며 구 버전을 찾기도 한다.




출처: https://bespokeunit.com/wp-content/uploads/2017/08/fragrance_formula_review_old_spice_aftershave.pdf


이 사이트에서는 오리지널 올드 스파이스의 향조를 블러드 오렌지, 아니스, 너트멕으로 구성된 첫 향, 그리고  전형적인 남자 스킨 향인 카네이션과 재스민, 계피 향, 또, 시더, 바닐라, 앰버와 송진 잔향으로 평가한다. 앰버도 있었지만 머스크와 소나무의 잔향이 아주 일품이었다. 잔향도 오래가는 편이라 저녁에도 아빠에게 그 냄새가 나서 언제나 아빠 냄새 = 올드 스파이스였다. 나중에는 미제집에도 팔았던 것 같긴 한데 한동안은 미국 출장을 가실 때마다 재고를 확보하시면서 시그너처 향을 유지하셨다.


너트멕 향은 애플파이나 그라탕 등 요리에서 은근하게 달콤한 향을 뿜지만 향수의 향조일 때는 구어망드보다는 오리엔탈 스파이시로 분류될 때가 많다. 지금은 단종된 조 말론의 너트멕 앤 진저에서도 자연스러운 스파이시함을 구현했다. 아니스도 후식이나 과자에 사용되는 감초 향과 비슷한 향이 나는 향신료이지만 약간 꽃냄새 같으면서 예쁘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이국적인 향이다. 따뜻하고 약간 무거운 두 가지 향을 끌어올려 주는 것이 달콤쌉쌀한 블러드 오렌지다.


물론 젊고 강했던 아빠의 추억에 묻어서 각인되어 있는 향이라 나쁘게 기억하기는 어렵겠지만 객관적으로도 간결하게 잘 만든 향이라고 생각한다. 향신료가 강하지만 느끼하지 않고 묵직하면서도 산뜻하게 발산되는, 균형미를 갖춘 향이다. 요즘 버전은 병 디자인과 향이 악간 다르다고 한다.


P&G 인수 후 병 디자인
www.fragrantica.com

요즘 버전은 시향해 본 적이 없지만 프래그랜티카 사이트에서 보여주는 향으로 추측해보면 좀 더 깔끔하고 현대적인 향일 것 같다. 내가 쓸 일은 없어서 살 이유도 없지만 그 향을 맡으면 아빠 생각이 날 것 같아 지금은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중에 언젠가는 구 버전을 구해 아빠 팔에 매달리며 놀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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