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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Nov 20. 2021

고퀄리티 명품의 삶

트위터에 '있는게 없어'라는 분이 얘기해주신 게 있다. 인간과 도구의 차이는 실존이 먼저냐 목적이 먼저냐는 것이다. 도구는 목적을 위해 탄생하고, 인간은 냅다 실존부터 해버린다. 동감한다. 그분의 결론은 아마 목적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살아가면서 찾아가면 된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목적을 빠르게 찾고 싶었다. 그래서 장래희망이 많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꿈을 찾으라고 노래하던 시기에 태어난 탓에, 나만의 꿈을 찾아서 100퍼센트 매진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렇다보니 다른 길로 새는 것이 잘 안되었다. 내가 선택한 단 하나의 목적 외에는 곁가지일 뿐이니까. 마치 목적에 필요하지도 않은 곁다리 기능들이 잔뜩 붙어있는 도구같다고 여겼다. 그런 것들은 모두 없애고 사용자에게 필요한 핵심만 남기는 게 좋은 도구다. 그 다음은 고급스러움을 추가해주는 디테일. 말하자면 나는 기능적으로 고퀄리티 명품의 삶을 살고 싶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 언제나 비장했다. 빠른 시기의 성공은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늦게 성공한 남들이  노력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워커홀릭이었다. 나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던 지난 10여년, 이것은 시대정신에 가까웠을 것이다. 나는 자기계발서 덕후였고, 거기서 하던 모든 이야기는 결국 그런 얘기였다. 목적을 찾아, 그것을 향해 최선을 다하고, 100퍼센트 기능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차를 살 생각도, 집에 대해 꿈을 꿀 생각도 없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것이 최상위 행복이므로, 그리고 그건 보통 먹고살기 지난한 시기를 오래 지나야하며 언제 성공할지 모르므로. 그런 곁다리들은 관심가질 필요도 가져서도 안된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내가 모르던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너를 만나면서 자꾸 시야가 트인다. 몰랐던 것, 외면했던 것들을 보게 된다. 선글라스가 깨지면서 틈새로 빛이 새어들어오듯이, 자꾸 뭐가 새로 보인다. 그게 신기하고 재미있다. 운전도 재미있었고, 존재하지도 않는 우리의 아이를 나는 벌써부터 사랑하고 있다. 먹지도 않던 쭈꾸미, 보말, 죽, 족발을 즐겨먹게 되었다. 애플생태계의 맛도(언젠간 맥북을 사게될지도 모른다), 3in1 케이블과 보조배터리의 편리함도 알게되었다. 그림도, 네가 도와줘서 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곁다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마음쓰기가 무섭다. 조금 덜 비장하게 살기가 두렵다. 뒤에서 누가 무섭게 쫓아온다.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그냥 쫓아오는 건데도 무섭다. 그건 나다. 


멈춰! 왜 쫓아오는거야! 야, 나도 쫓기고 있거든! 나를 쫓아오는 나를 쫓아오는 나를 쫓아오는 나 뒤에 또 나다. 언제 이렇게 많아졌지?


오늘은 그림을 그렸다. 빨리 그리고 싶어서 두근거렸다. 과제를 완성하니 뿌듯하다. 항상 곧게 선을 그리는 것이 어려워 연필로 대충 스케치하던 버릇이 있다. 그런데 아이패드로 그리니까 필압을 감지해서 금방 예쁜 선이 나온다. 나를 쫓아오던 아이들도 그림을 그릴 때 만큼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었다. 여기도 명암 넣어보자! 이건 이 색깔로 하면 어때? 목적을 잊어버린 아이들은 금방 뿌듯해하고 즐거워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건 목적이고 뭐고 그냥 즐거운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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