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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Nov 17. 2024

후회한다는 것

오랜만에 워드를 켰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글을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매번 글을 쓸 때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건 글을 쓸 때마다 오랜만에 글을 쓰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싶어질 때가 때때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글을 썼던 건, 아마도 취업 준비를 할 때였을 것이다. 마음속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를 때 글을 썼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전두엽의 계획에 따라서 차근차근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글을 쓰고 싶지 않을 때는, 마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명징하게 그려지고, 계획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쉴 때는 단지 그 순간을 즐겁게 살아감에 만족스러울 때였다.


오랜만에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고 있다. 우울증이 심할 때 읽었던 책이다. 그 때는, 책의 첫머리에 있었던, “신이 너희에게 발로 뱀을 밟을 권능을 주었노니, 그 무엇도 너희를 해할 수 없으리라.” 라는 문장을 보고서 전율을 느꼈을 때였다. 그 때는, 한창 모든 것들로부터 괴로울 때였다. 내가 갈망하던 커다란 야망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책임지지 못할 것들을 책임지겠다고 애쓰다가 무너졌을 때. 내가 했던 말들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래서 너무너무 쪽팔리고 무너졌을 때.


결국 그 모든 일들은 내가 택한 일이므로, 뱀을 밟는 권능이 나에게 있으므로, 내가 밟고자 하면 밟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그건 정말로 내가 밟고자 하면 밟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로는 몰랐어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알았을 것이다. 내가 이걸 그만둔다고 해도, 현실에서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단지 문제는 나의 자존심이었을 뿐.


그 글을 다시 읽는 지금은, 한심스럽다. 그 땐 베로니카에게 이입했는데. 지금은 베로니카가 한심스럽다. 고작 그런걸로. 죽음을 결심한다고. 세상엔 더 엄청난 것들이 있는데. 더 엄청난 즐거움도 성취감도 있지만, 더 엄청나게 위험한 것들도 있는데. 그런 것들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고작해야, 자신으로 살아가는게 지겹다는 이유로.


베로니카가 잊고 있었던 자신의 꿈인 피아니스트, 피아노를 치는 꿈을 깨달았을 때. 왜인지 모르겠지만 A 교수님이 떠올랐다. <책물고기>의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들어라>라는 단편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과제에서, 내 글을 읽고서 너무나 감동받아 한 수업을 할애해서 내 글을 읽도록 발표를 시켰던 그 분이. 모두가 이 글을 읽기를 바라셨을 만큼 너무나 감동받으셨던 그 분의 목소리가, 칭찬이. “이 글은, 평소에 정말 깊이 있는 사고를 해온 사람 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말해줬던 그분이. 내 글에 대해서, 사실은 최초로 명확하게 인정해주었던, 글을 쓰는 사람. 왜 이 기억이 떠올랐을까. 그 분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수업을 들은 뒤로 벌써 7년. 이제 저는, 이런 사람으로 자랐어요, 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잘 자랐어요, 그리고,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자랐다고.


죽기 전에 무언가를 해본다면 글을 쓰고 인정받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해왔다. 다만 취직을 하고 나서는 업무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 커서, 글을 쓰고 싶다는 니즈가 거의 없었다. 아마도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건, 그게 내가 그나마 가장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이고,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업무능력으로 인정받는게 기뻐지고 난 지금에는, 굳이 글로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져서,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은가보다고. 생각해보면 소설을 썼던 시기에는,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할 수 없었던 고등학생 때여서. 나는 그저, 글을 쓰는 게 노는 일이었기에, 여가시간을 글 쓰는 것으로 노는 사람이었고, 핸드폰으로 수많은 유튜브와 웹툰과 인스타를 할 수 있는 지금은, 더 이상 글을 쓰면서 놀 필요가 없어진 사람이 되었기에, 글을 쓰고 싶지 않은가보다고 생각했다.


일기야 지금도 많이 쓴다. 매일같이. 다만 그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이 아니다. 독자는 오로지 나. 내 안의 수많은 목소리들을 듣기 위한 일. 전두엽은 당장 지금이라도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하지만, 불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싶어서 애쓰지만, 그러면 그 불안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나를 겁박하기만 하기에, 불안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시켜주기 위한 장치. 그래도 오늘 있었던 좋은 일들을 떠올리면서, 아주 나쁜 하루는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장치.


예전에는 그렇게 썼던 일기 같은 글들도 모두 남들에게 보여주었다. 지금보다 더 순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불편해하더라도 속으로만 불편해하고, 겉으로야 “꼴값이네.”라고 말하지 않을 걸 알기에 할 수 있었던 일. 이름을 걸고, 얼굴을 걸고 글을 쓰는 일은 지금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내가 쓰는 글에, 감정에, 마음에 책임을 지는 일이기에.


책임을 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나의 일을 단지 커피를 만드는 일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레시피에 따라 초콜릿 스무디를 만들고, 샷을 내려서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일. 샷의 추출 온도가 어떻든, 전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적시에 아메리카노가 나갔느냐 하는 일일 뿐. 그러나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를 것으로 예상이 된다.


후회가 된다. 왜 그랬을까. 지나간 일들에 대해 후회를 하지 않는 게 내 특기라고 여겼다. 그건 오만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일들만 겪었기 때문이었다. 후회할만큼 책임질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후회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후회가 될만큼, 과거의 일이 현재의 일에 타격을 입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되뇐다. 후회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슬프다. 지나간 것들은 돌이킬 수가 없어서. 이건 밟으려고 한들 밟을 수 있는 일일까. 잘 모르겠다.


내가 꿈꿨던 어른이라는 존재는, 자기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것을 넘어서… 타인의, 가족의, 누군가의 삶까지 부양하는 존재였다. 그건 멋있는게 아니라… 끔찍한 것이다. 끔찍하게 비통하고, 고통스럽고, 괴롭고, 괴악한 것이다. 개 같은 세상. 욕지거리를 중얼거려도 어쨌든 해는 뜨고, 내일이 오고, 가슴 속에 눌러담은 채 받아들이는 삶. 그 결과를 지나쳐내는 삶.


어쩌면 살면서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을 테다. 아쉽게도 내 능력이, 내가 보여지는 것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크게 느껴진 탓에. 애초에 내가 부족해보였다면 그런 일도 맡겨지지 않았겠지. 그런 기회도 오지 않았겠지. 그러니 이런 일도 겪지 않았겠지. 내가 능력이 너무 출중해보인 탓으로 하자.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아야지.


하나는 분명하다. 베로니카에게 이입했던 당시의 나는, 나를 나약하다 여기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세상에 얼마나 힘든게 많은데, 고작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는게 힘들다고 하는게 나약하다는 이들을 미워했다. 그랬던 나는 3년이 지나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하게 됐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그때 힘들었던 것들도 지나간다는 뜻이겠지. 지나왔기에 할 수 있는 말이 되었다는 거겠지. 지금의 이 고통도, 아픔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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