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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Sep 26. 2019

존재의 슬픔

왜 나는 나대로 행복할 수 없는가

브런치를 열었는데 글을 쓰고 싶어서 새벽에 갑자기 일어난 경험, 시간이 부족한 당신에게 일하면서 글쓰기라는 포스트가 떴다. 지금 사실 새벽인데 글 쓰고 싶어 일어난 건 아니고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갈증 때문에 깨버렸는데 잠이 안 와 생각해왔는데 시간이 없어 못 적은 것들을 적어보려 한다. 다 핑계지만 시나브로 마케터라는 매거진을 열었는데 요즘 12시까지 야근에 시달리고 있어 글을 못쓴 지 오래다. 그래서 아무 얘기나 적을 페이지를 만들었다.


오늘의 주제는 '존재의 슬픔'이다. 이 단어는 SNS 덕분인지 몰라도 갈수록 심해지는 외모지상주의를 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다. 왜 인간은 보이는 삶에 그토록 열심히어야 하는가? SNS 속을 떠다니다가, 혹은 그냥 길을 거닐다가 보면 요즘 애들은 어떻게 다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겼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참 고마운(?) 현상임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아니, 뭔가 슬펐다. 왜 껍데기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왜 타인의 평가에 이리도 집착하는가? 이건 나 자신 스스로는 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인 건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나는 나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없어 타인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건가? 질문들을 해본다.

아름답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야.라는 띵언을 남긴 하울의 움직이는 성. 결국 여주의 머리색을 은발로 바꿔버리며 외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센과 치히로는 재밌게 봤는데, 불편했다.


나 역시 타인의 인정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인정받고 싶다. 이 욕구가 해소가 안되니 계속 갈구하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나간다. 삶에 거품이 낀다. 이 글을 적는 순간에도 날것으로 적지 못하고 좀 더 있어 보이는 단어를 선택하려는 나를 발견한다.


글을 보면 알겠지만,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쓰는 현실을 비판하는 글은 아니다. 그것보단 더 넓은 이야기, 타인의 인정을 먹고사는 삶에 질문을 던진다. 남에게 선의를 베푸는 순간에도 이건 내면의 순수한 발현인지 혹은 좋은 인간으로 평가받고 싶은 인정 욕구에 기인한 건지 구분하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회사 선배는 왜 그딴 걸 신경 쓰냐는 투로 말을 한다. 그걸 구분하는 인간이 어디 있냐며? 대부분 두 가지 동기를 다 갖고 있고 순수하기만을 원하는 건 신이 되고자 하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며 쓸데없는 고민이라 조언해준다. 반박 불가 빼박 캔트다. 내가 괜히 이 이슈에 민감한 걸 지도 모른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데 말이다.


나는 내가 좀 더 수준 높은 인간이길 바라왔다. 그래서인지 남의 인정을 갈구하는 나 자신 혹은 타인에게 환멸감을 느낀다. 근데 이것마저도 그 동기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일거다. 저 아등바등 사는 인간들하고 다른 내가 되겠다라며. 쿨한 척. 아마, 몸값을 높여 이직할 수 있다면 바로 이직할 거다. 니들과는 레벨이 다르다고 보여주려고. 결국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인 거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할 만큼 나는 성숙하지 못하다.

3, 4번 사이 어딘가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나는 남들과 좀처럼 친해지지 못한다. 회사에서는 외향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건 내가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나로 바꿔 연출한 것이다. 38살이나 먹었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그래서 어른 인척 하는, 어른스러움이 요구되는 지금이 꽤나 부담스럽고 버겁다.


어렸을 적부터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속으로 병신 새끼라고 욕하고 있진 않을까? 트라우마? 솔직히 이게 원인인진 모르겠다. 굳이 원인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1학년? 정도까지 내가 매우 좋아했던 사람에게 지나친 장난을 했고 결국은 들어버렸다. 병신 같은 새끼가 좀 놀아줬더니 미쳐가지고... 사실 너무 어렸을 때라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하는 느낌은 그랬다. 그 말을 곱씹으며 며칠을 남몰래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었지만 엄마한테도 얘기하지 못했다. 그 후로 두려웠던 것 같다.


에반게리온에서 지구를 종말 시키러 온 마지막 사도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처음으로 만난 나를 알아주는 친구. 그 친구가 사도라는. 배신이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결국 친구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연히 주인공은 병실에서 의식이 없는 아스카의 알몸을 보고 자위를 해버린다. 남의 인정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쓰레기에 가까운 현실. 도무지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거다. 결국 에바게리온은 주인공에게 칼자루를 주며 타인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중에 선택하게 하고 결론 없이 끝을 내린다.


불완전한 인간. 그래서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걸까? 혹은 신께서는 심판대만으로는 인간의 교만함을 막을 수 없어 불완전성이라는 존재의 슬픔을 내리신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오르막을 터벅터벅 걸어가며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학시절 여러 사람 속에서도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던 나, 서른이 넘어서도 방황했던 나, 아버지의 마지막 두 달을 옆에서 지켜봤던 나. 삶은 무엇일까? 왜 존재는 슬픈가? 타인의 인정 욕구를 벗어난 완전한 자유는 얻을 수 없는 것인가?


술이 다 깼으니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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