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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Mar 12. 2024

두 번째 페르소나, 나를 지키기 위한 최정예 부대


첫 번째 페르소나는 ‘팬시’라는 이름의 우울한 뮤지션이었다.


이 정체성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깊은 감정의 골짜기를 롤러코스터처럼 넘나들며 신비한 모험을 하게 해 주었지만 매우 불건강했다. 스스로 부여한 정체성에 매몰되어 힘든 나날을 보냈다. 나는 ‘팬시’를 지나치게 사랑해 버렸다. 숏폼보다 중독적이었다. 내가 만든 첫 번째 가면을 쓰고 엄청난 나르시시즘에 빠져 매일 멍하니 수면만 바라봤다. 빠져나오려고 해 봤지만 그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 빼기 '팬시' = 0



- 같은 두려운 느낌이 일렁였다. 상황은 오랜 기간 반복됐다. 그저 메타인지가 부족했던 건지도 모른다. 일종의 애정결핍인지도 모르고. 원인파악이 안 되니 해결방법도 요원했다. 하지만 ‘팬시’는 365일 입고 있기에는 너무 우울한 가면이었다. 시대착오적인 예술가병 말기의 캐릭터 같았다. 아이언맨 수트처럼 간편하게 입고 벗는 게 가능하다면야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나는 팬시수트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우울이 일상으로 새어 나와 바이러스처럼 번졌다.



살기 위해, 팬시 죽이기가 시작됐다.

나와 팬시의 일대일 전투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를 죽이고 그냥 나로 살기에, ‘나’는 너무 초라했다. ‘나’는 실패한 일개 음악강사였고, ‘팬시’의 세계는 다채로웠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멱살을 잡고 흔들면 거기 몸을 맡긴 채, 비틀비틀 녹아내렸다. 만취한 느낌과 비슷했다. 그렇게 마약 같은 팬시를 버리지도 죽이지도 못한 채, 방치했다. 음악을 만들지 않는 팬시는 점점 더 우울해졌고 나를 괴롭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도피의 나날이 흘렀다. 일련의 정체성 투쟁은 나를 점점 예민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10년 넘게 한 일을 대책 없이 그만두면서 나는 살기 위해 두 번째 페르소나를 만들었다. 가면을 바꾸어 쓰는 전략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페르소나인 ‘은도’가 탄생했다.

맘껏 궤변을 늘어놓을 자유를 누릴 ‘작가’로 설정했다.



‘팬시’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기로 다짐했다. 팬시는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었다. 결국은 죄다 스스로 만든 억제였겠지만, 새로운 가면 ‘은도’는 그 '억제들'에서 해방시켜 주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내 안의 도라이를 깨우고 싶었다.



치기 어렸던 어린 시절을 돌아봤다. 싸가지 없고, 비판적이었으며,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은은하게 돌아있었지. 전생 같았다. 어른이 되었다고 여기며 속으로 삼켜버리던 개소리를 지껄일 자유를 나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내 머릿속에 가득한 불만들과 비판의식과 징징거림과 철없음을 배출할 채널을 마련하기로 했다.



좋아

은은하게 도른자, '은도'

작명부터 유치하고, 쪽팔리다.

완벽한 서사다.



그렇게 탄생한 은도를 일단 브런치 작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레슨이 싫었는지, 얼마나 애들이 싫었는지, 내가 얼마나 인생에 실패했는지, 얼마나 대책 없는 백수인지, 얼마나 계획충이고 얼마나 빨리 짜게 식는지, 얼마나 거대한 초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정신병자인지, 나는 그저 의식의 흐름으로 지껄이리라.



그래서, 내가 해방되었느냐?

당연히 어림도 없었다.

아직도 초자아와의 전투는 진행형이다. 치열한 장기전이 지속되고 있다. 글은 기대만큼 솔직하지 못했고, 퇴고를 거치면 더욱 힘을 잃었으며, 그마저도 얼마간은 수세에 몰려, 글쓰기를 지속하지 못했다. 내 안에 도대체 내가 몇 개 인지 모르겠다. 초자아 놈도 나의 일부겠지. 그놈이 또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이 따위 글을 쓰는 건 아무 의미도 없고, 부끄러운 짓이라고 가로막았다. 무차별 공격이 두두두두 날아왔고, 나는 너덜너덜 구멍이 나 쓰러졌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은도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팬시였다.



갑자기 나타난 팬시는 초자아의 파상공세를 벽처럼 막아섰다. 매트릭스의 네오 같았다. 팬시는 불현듯 나타나 두 달간 미친 듯이 믹싱공부를 하더니, 수년 전에 써놓고 버려둔 음악을 점심라면 삶듯 발표해 버렸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은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어이 일어나- 글을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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