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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May 08. 2024

여 자르고 여 자르고

나에게 마감주기, 유통사 심사라니요




3년 전에 만들고 완성하지 못했던 곡을 3일 만에 완성했다.




#1 포비아

봄에 발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었지만 두 번의 봄을 그냥 보냈다. 알러지 대환장 파티 + 봄 타기 + 미발매 죄책감, 3단 콤보로 괴로워하며 그렇게 흘러가는 봄… 벚꽃도 진달래도 모두 지고, 여전히 난 유통사에 전화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파워 J의 2024년 플래너 월간 계획란에는 5개월째 같은 목표가 적혀있다.



  ‘유통사에 전화하기’



나에게는 5월 31일까지가 봄이다.

(6월 1일부터는 여름...)

그러니 봄에 발매를 하려면 정말 늦어도 한 달 전인 5월 초에는 날을 잡아야 한다. 사실 너무 미뤄서 이미 자리가 없을 확률도 높다.



평온한 금요일 아침,

나는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며 내가 적어 놓은 그 문장과 대치중이다.



  ‘유통사에 전화하기’



폰 속에 저장된 나의 유통사 전화번호를 째려본다…

내가 전화 포비아라니…





#2 동기

전화를 끊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60시간 안에 곡을 가믹스 상태로 만들어서 제출해야 했다. 게다가 제출한다고 해서 발매일이 잡힌다는 보장도 없다. 내가 음원을 발표하지 않은 4년간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된 것 같다. 이곳에서 데뷔곡을 냈고, 총 15곡의 음원을 발표했지만 이제 나도 유통심사를 받아야 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모든 게 귀찮고 왠지 화가 났다.

개인레슨까지 1시간이 남은 상황.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못난 마음이 치밀었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좋아, 지금 주어진 1시간만

딱 만져보고 결정하자.



곰팡내 풀풀 나는 프로젝트를 열었다.

시간이 없다.

빛의 속도로 수술을 시작했다.


여 자르고, 여 자르고.


의식의 흐름으로 F가 펼쳐놓았던 곡을 T로 정리한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따로 없다.

손이 안 보인다.

오, 됐는데?



순식간에 쏭폼을 완성하고 나자,

3년간 곡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결정장애가 아니라 동기부족이었음을 깨닫는다.

시계를 보니 레슨까지는 20분이나 남아있다.

역시 천재인 건가...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강해진다.





#3 거장처럼

레슨 후에는 금요일 점심 약속이 있던 차였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신나게 놀고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2시간을 작업했다. 마감 50시간 전.


토요일에도 일정이 있었다. 낮에는 푸드트럭축제에 가기로 했고, 저녁엔 어버이날 기념식사를 하기로 해서 종일 바빴다. 예전 같으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매달렸을 텐데  나는 달라졌다. 그냥 아침 8시에 일어나 2시간 정도 작업한 후 외출했다. 마감 36시간 전.


마감당일인 일요일에도 그닥 무리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5-6시간은 기본, 엉덩이 한번 안 떼고 광인모드로 달리다가 마감 후 몸져누웠을 텐데 이제 그런 억텐은 싫었다. 아니 못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2시간 작업하고, 남편과 산책하고 쇼핑도 하고 장도 보고 들어와서 좀 쉬다가 저녁에 집중력있게 3시간 작업해서 마무리했다. 속전속결로 배급문의 양식을 채워서 제출한 것은 마감시간인 00시가 아닌 저녁 6시 27분. 맛있는 저녁도 해 먹고 헬스장 가서 운동도 할 시간까지 다 고려한 주말이 있는 마감이었다.



 ‘몰라 되면 하고, 안되면 말어…’



완벽하게 해내리라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마감직전까지 스스로를 괴롭히던 광인시절 사요나라. 나에게도 호흡과 균형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제 나도 하루키처럼 운동과 작업과 일상의 싸이클을 공평하고 평온하게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걸까?





#4 이제서야 진짜 독립

결과는 일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과연 기존 배급사에서 발매일을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혹여 여기서 까이면 다른 곳을 찾자. 그리고 계획대로 5월 안에 음원을 내보자는 마음이다.


물론 말은 쿨하게 해도 속으론 심사 포비아에 시달리고 있다. 데뷔 이후 들어간 회사에서는 유통에 관한 이슈를 도맡아주었었다. 그리고 4년 전 회사를 나왔다. 독립을 하기로 했다. 아주 작은 간섭조차 없이 자유롭게 창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원을 발표하려면 유통사에 직접 문의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음악 비즈니스를 직접 해나가야 하는 상황, 유통에 관한 불확실성이 나의 음악적 번아웃에 지분이 있었던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져본다. 이제서야 진짜 독립한, 인디 뮤지션으로서의 첫발을 뗀 기분이다.


심사 포비아를 극복하기 위해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믹싱을 위한 정리작업을 시작했다. 전전긍긍, 스트레스 듬뿍 받으며 결과만 기다리다가, 결정되면 또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달리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스타일이었지만 그러면 수명은 단축되고, 영혼은 털리고, 그 끝은 번아웃이라는 걸 이제 알잖아.


그래서 '안되면 말아라, 딴 데 찾을란다' 작전으로 바꿨다.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꾸준하게 내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 같거나 길을 잃었을 때는 궁극적 목표만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잡다한 것에 신경 끄고, 때론 포기하기로 했다.


그 잡다한 것 중에 아트웍도 포함이다. 아트웍은 항상 정말 열심히 했다. 앨범커버랑 뮤비 만들려고 음악 만드는 새럼처럼 영혼을 갈아 넣었고 그만큼 스트레스받았던 일인데, 거기에서 힘을 빼고 음악에 몰아주기로 했다. 그러한 호흡과 텐션이라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꾸준히 노래를 만들어 발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휴식기 심박수가 안정되는 기분이다.




다이어리의 5월 목표에 ‘유통사에 전화하기’를 드디어 지웠다. 그리고 그 아래 ‘신곡 발매하기’를 적어 넣었다.



5월 31일까지는 봄인 거다.

가자 팬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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