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누워 울기만 할 때 내 속으로 낳은 아이지만 그녀의 속은 정말 헤아리기 어려웠다. 나 이외의 타인의 속내를 완전히 파악하는 게 애당초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도 나는 그녀의 속마음을 절절히 다 알지는 못한다.
흔히 엄마 또는 아내라는 역할에서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모호하고 영험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탓에 그건 그저 나에겐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알록달록 이쁜 침대 캐노피로 장식한 침대로 딸의 방을 장식한 엄마는 자신이 어렸을 때 놀러 간 친구 집에서 본 공주 침대가 너무 갖고 싶었는데 마침 딸을 낳고 나서 얼른 공주님 침대와 우아한 침대 캐노피를 해 주었다고 한다. 딸이 그렇게 해 달랬냐고 물었더니, 자기의 오랜 소망의 실현이고 또 무엇보다 이쁘니까 아마도 딸도 좋아하지 않겠냐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답해주었다. 물론 대부분 딸은 엄마가 공주님 방으로 꾸며준다면 좋아라! 환호하며, 겨울왕국 엘사 드레스도 사준다고 하면 우리 엄마 최고라며 엄지 척! 해 줄 거라 확신한다. 그런데 공주 침대도 드레스도 아이의 취향으로 시작된 게 아니라, 어릴 적 엄마의 취향이었다면 이런 방식으로 엄마의 취향을 아이가 자연스레 수동적으로 흡수하면서 자라나 엄마랑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모녀로 성장할 수는 있겠지만, 엄마의 취향과 다른 본인의 취향을 발견하는 날에는 이게 혹시나 잘못되건 아닌지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지 못하는 때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발동했다.
같은 이유로 나는 딸의 구매 요구가 없었기에 공주 침대도 드레스도 사지 않았다. 먼저 사달라고 하지 않는 것을 내가 굳이 앞서 나가서 제안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냐고 되물어 보고 싶지는 않다. 그녀도 보는 눈이 있고 또래와 사회생활을 하니 언제라도 자기 눈에 좋아 보이면 사달라고 구매 욕구를 불태울 것이 뻔하므로 나는 앞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내가 어렸을 때 무엇이 그렇게 갖고 싶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므로 엄마의 어린 시절 기억을 강제 소환해 아이에게 전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 싶다.
연애할 땐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었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남편이 좀 서운해할 것 같다. 부부는 이 밖에도 함께 풀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같이 쌓아져 있으니 남편에 관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내 속으로 낳은 이 어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떠한 사람으로 클 것인지 궁금하고도 궁금하다. 마치 우주를 품은 씨앗처럼 내 주위에서 말하고 걸어 다니며 스스로 생각하면서 어떤 생각과 취향을 가지고 하루하루 커가는지 새록새록 호기심이 생기고 볼수록 놀랍기만 하다.
“엄마는 세상에서 우리 딸이 제일 좋아”
“엄마 그런 말이 어딨어. 세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건 있을 수 없어” “그…. 그래? 하긴 맞는 말이야. 그런데 엄마가 돼보니까 살짝
바뀌기도 하는 거 같아”
나의 가슴 벅찬 고백을 받은 상대가 너무 담담하게 내 고백이 말도 안 된다고 얘기하니 순간 머쓱해졌다. 하긴 백번 맞는 말이긴 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좋아하는 상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백한 사실을 난 잊고 산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이 아이는 이 귀한 명제를 어디서 배워서 알고 있는 걸까?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셨을까? 책에서 읽었을까? 아이의 성향상 선생님의 말씀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실천에 옮기는 성향도 아니고 책을 즐겨 읽는 아이도 아닌데…. 어디서 주워 들었나? 나름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어쨌든 십 년 이하의 경험치를 총괄해서 튼튼한 자기애를 구축한 아이가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이는 하루하루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커가고 있다. 때로는 엄마가 앞장서서 이끌기도 하지만 많은 날을 뒤에서 천천히 아이가 알 듯 모르듯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오히려 내가 앞장서서 본 아이의 모습보다 뒤에서 저 멀리 보이는 전체 배경과 그 속에서 걷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어우러져 더 잘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살고 있다. 엄마가 어른이라 어른 걸음 몇 걸음 성큼성큼 걸으면 금방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떨어져 그 간격을 유지하며 걷고 싶어 마음을 다잡는 날이 더 많다.
산에 오르면서 처음엔 꼬불꼬불 산길을 무작정 앞사람 등산화만 바라보고 쫓아다닐 적에는 산길 커브가 모두 막다른 길처럼 보였다. 길 끝이 막다른 길인가 싶어 당황해서 성급하게 길이 어디냐고 소리 질러 물어볼 때도 많았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바로 앞에서 끝날 것 같은 그래서 낭떠러지로 끝이 나는 길인가 싶지만, 막상 그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불구불 정겨운 산길이 버젓이 흘러가고 있는 풍경에 안도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길 끝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새로운 길이 보인다는 진리를 나는 산길을 다니면서 몸소 체험한 것이다. 산길을 걸으면서 막다른 길에 대한 조바심이나 불안감 대신, 길은 언제나 연결돼 있다는 여유로움과 느긋함 같은 마음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아이랑 동네 앞산을 등산할 땐 내가 아이를 이끌어야 할 것 같은 조바심 대신 묵묵히 아이 뒤를 따라간다. 아이를 "1 대장님"으로 앞에 세우면 아이는 무슨 감투라도 쓴 듯 엄청 용감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바로 변신한다. 앞에 대장님을 세우고 뒤에서 걸으면 우리 아이가 산에서 어떤 꽃들을 좋아하고 어떤 벌레를 싫어하는지 잘 보인다. 굳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저 앞에 가면서 꽃을 꺾는 모습도 보이고 벌레를 피해 도망하는 모습도 보이고 겨우 몇 발자국 걷고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도 잘 보인다.
매번 취향을 묻거나 확인하지 않아도 몇 걸음 뒤에 서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아이가 독립해서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까지 엄마는 아이와 함께 인생의 많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겪으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너를 낳기만 했을 뿐 너를 잘 모른다는 명제를 시작으로 한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내 아이를 따라간다면 매일매일 새롭게 알게 되는 벅차고 신비로운 기쁨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