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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캉쓰 Jun 14. 2022

나이가 들어도 모자티는 계속 입고 싶은 마음

모자티 애착의 역사

"이젠 그런 옷 그만 입어."

친구의 핀잔에 죄인 마냥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옷이란 후드티를 말한다. 모자티라고도 한다. 교토 여행에서 사 온 물건을 자랑하고 있는 중이었다. 과자, 문구, 소품 등을 사 왔고,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은 바로 친구의 핀잔을 들은 모자티였다. 한국에서 못 구하는 디자인인데 그것도 모르고......


암묵적으로 옷에는 어울리는 나이대가 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여자가 입기에 모자티는 너무 애들 옷 같다, 혹은 입은 네가 너무 아줌마 같다는 사회적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예쁜 구두를 또각거리며 스커트 자락을 나부끼는 것도 좋지만, 티셔츠와 청바지, 운동화가 가장 나다운 옷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모자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옷이다. 모자티와 함께 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5살까지 거슬러 간다.


5일장을 아는가?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쉽게 물건을 사고, 동네마다 큰 마트가 생기기 전에는 시장이 친근한 쇼핑 장소였다. 그중에서도 5일에 한 번 열리는 5일장은 규모도 크도 평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얻을 수 있어서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그날도 5일장이었다. 따라가겠다고 성가시게 구는 두 아이를 잘 따돌리고 엄마는 몇 시간 후 집에 돌아왔다. 손에는 5일장의 흔적인 검은색 비닐봉지가 두어 개 들려 있었다. 엄마는 방바닥에 앉아 내용물을 정리했다. 나와 동생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봉지 안에서 나오는 물건을 구경했다. 주로 식품이었지만 어린이 옷도 있었다. 우리 옷을 사 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해서 너무 신이 나고 기뻤다. 가슴에 [모래요정 바람돌이] 그림이 그려진 하늘색 티였다. 동생과 맞춰 입으라고 똑같은 디자인을 두 개 사 왔단다. 그런데 모양이 약간 이상하다. 옷에 무언가 달려있었다.


"모자가 달린 거야. 모자티야."


상의에 모자를 달다니 왜일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자가 필요하면 따로 쓰면 될 일이 아닌가? 굳이 옷에 달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5살의 어린이고, 인생에서 처음 마주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 나이에 실용주의자였던 나는 나름의 해석을 덧붙였다.


"비 올 때 쓰면 우산처럼 막아주는 거지?"

엄마는 그렇다고 끄덕였다. 지금은 안다. 엄마가 귀찮아서 대충 대답했다는 것을. 하지만 당시에는 우비처럼 비올 때 쓰는 용도라고 철썩 같이 믿어 버렸다.


아침이면 깨끗하게 씻고 엄마가 입혀주는 옷을 입었다. 다음날 나와 동생은 청반바지에 바람돌이 모자티를 입었다.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유치원에 가기 전에는 항상 동생과 놀았다. 대단한 놀이거리는 없었다. 그냥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시멘트 위에서 피어난 잡초를 감상하고,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을 긁는 게 다였다.

그렇게 집에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데, 하늘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차고 거세졌다. 비가 올 것을 직감했다.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바로 빗방울이 어깨에 닿았다.


'비가 오면 모자를 쓰면 된다고 했지.'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동생에게 모자를 쓰라고 시키고 나도 서둘러서 뒤집어썼다. 비가 직접 닿지 않자 한결 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제주의 비는 너무 가혹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옷도 점차 젖어들어갔다. '이상하다, 모자를 쓰면 괜찮다고 했는데 왜 비에 젖지?'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우비처럼 방수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나, 추워......"


동생이 양팔을 꼭 움켜쥔 채 바르르 떨었다. 눈앞에 집이 보이는데 비가 너무 거셌다. 동생을 안전하게 집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가슴에 그려진 바람돌이 요정이 눈에 들어왔다. [모래 요정 바람돌이]는 우리가 즐겨보는 만화 영화의 주인공이다. 어린이들이 소원을 빌면 하루에 한 가지씩 들어주는 내용이다.


"바람돌이 노래를 부르자. 그러면 모래 요정이 보호해 줄 거야."


우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합창했다. 노랫소리가 바람돌이에게 닿는다면 비를 그치게 해 줄지도 모른다.



일어나요 바람돌이 모래의 요정

어서 와서 들어봐요 우리의

우주선을 태워줘요

공주도 되고 싶어요

어서 빨리 들어줘요 우리의 소원



노래를 부르는 사이 집 근처에 도착했다. 바람돌이가 외출이라도 했는지 우리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비는 여전했다.  눈앞에 엄마가 나타났다. 수건을 가지고 집 앞에 나와 있었다. 동생과 무사히 도착하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 위로 보송한 수건이 내려앉았다. 따스했다.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벼서 물기를 터는 엄마의 손길이 좋았다. 생애 첫 모자티는 바람돌이와 비, 엄마로 각인되어 있다. 모자티에 대한 애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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