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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Jan 04. 2022

시문학으로 읽는 식민지 인문학 3

#김억 #번역

1. 최초의 유학생 그리고 작가의 탄생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개화기 조선에는 이렇다 할 기술적ㆍ학문적 기초가 부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와 개화파는 서구의 기술과 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선출된 청년들을 미국이나 일본에 유학 보냈다. 또한 국권 침탈 이후 일본은 서구의 영향으로 선진화된 국가시스템을 식민지 조선에서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조선의 국비유학생을 뽑아 자국으로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뜻한바가 있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도 있었다. 일본은 극복해야할 대상인 동시에 이상화된 서구화, 문명화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현해탄을 건넜던 청년들, 이들이 유학생의 시초(始初)였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한국의 문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95년 일본 유학생으로 파견된 학생들과 하워드대학교 연례보고서에 실린 조선인 유학생 사진. 패션피플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 시기를 최남선(「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이나 이광수(「무정」, 1917)의 시대를 기점으로 하는데, 일본 지배와 근대화가 겹치는 이 시기는 문화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00년대 들어 새로운 문학 장르인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 등이 탄생하였고, 전문성을 띤 ‘문필가’라는 직업이 최초로 등장하였다. 특히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들은 일본을 매개로 한 서구의 문학작품과 이론을 직접 번역하며 소개하기 시작했고, 서구 문예사조와 조선의 전통 장르가 혼융되고 교섭되면서 소위 ‘근대문학’이 탄생되었다. 물론 그동안 근대문학과 비슷한 예술 장르가 조선 땅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조와 가사가 있었고, 판소리와 판소리사설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술문화의 영역에 있었고, 개인 서정의 문제보다는 민족과 계층이라는 집단의 서정에 보다 밀착되어 있었다. ‘전근대적’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전통 장르는 이제 ‘근대적’ 장르로 전환된다.

    3.1운동을 분수령으로 자아의 각성에서 식민지 상황이라는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되면서 문필을 업으로 삼는 ‘작가’가 출현한다. 양반 계급의 고상한 취미의 영역이었던 시서화(詩書畵)가 아니라, ‘문단(文壇)’이라는 새로운 사회 집단을 형성하여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발표하고 비평하는 시대, 이른바 ‘모던걸’, ‘모던보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양복을 입은 신사와 양산을 쓴 신여성이 거리를 오가고, 경성 한복판으로 인력거와 전차가 다니며, 다방에 모여 새 시대와 민족을 위해 열띤 토론을 펼치던 그때.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처음 생긴 그때. 그 어느 때보다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시기였다. 이러한 모더니티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 문물에 의해 출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문화적 충격이면서 동시에 ‘문명 개화’라는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경성거리와 명동의 신여성.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한국 근대시 탄생에 있어 서구의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고대로부터 계승되어 오던 시가(詩歌)에서 문학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poetry)로 전환되는데 5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일본을 매개로 서구,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가 유입되면서 이른바 ‘자유시’라는 새로운 장르가 ‘발명’되면서 노래와 가창의 전통이 아닌, 읽고 쓰는 활자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또한 신문이나 기관지 등 언론 매체들이 발간되면서 ‘대중 교육’이라는 목적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시조나 가사가 발표되었다. 시조나 가사 등은 대중에게 친숙하면서 접근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들끼리 일본에서도 동인지를 발간해 직접 일본어를 번역하여 서구 문학작품을 소개하거나 일본어로 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한쪽에서는 일본 유학생을 통해 서구의 문예가 소개되고 번역되면서 새로운 시가 형태가 모색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민요와 시조와 같은 전통 문학 장르를 부활시키려는 운동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몇 백 년에 걸쳐 일어나는 예술 사조의 교섭과 탄생이 우리나라는 불과 몇 십 년 안에 일어난 것이다.     


2. 번역의 근대화

  

    개화기 초창기 서구문학의 번역은 무척 서툴렀다. 한일 역본의 중역이거나 한중 역본의 중역으로 인해 일본과 중국보다 훨씬 늦게 유입될 수밖에 없었고, 번안과 초역(원문의 축약) 그리고 경개역(줄거리 위주의 번역) 위주였기 때문에 내용 위주의 비전문적, 비체계적 번역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번역 작품 자체가 계몽성 위주로 편중되어 있었는데, 초창기 번역을 했던 지식인들은 문학의 순수성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목적성에 보다 몰두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남선은 잡지 <소년>을 통해 외국의 위인전기를 비롯하여 역사가들이나 정치가들이 쓴 글들을 일부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걸리버 여행기>나 <로빈손 크루소> 등의 외국 소설을 <소년>에 줄거리만 요약하여 소개하거나, 십전총서(十錢叢書)’로 발간하기도 하면서 외국문학 소개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을 소개하려는 저의에는 다분히 고난 극복 모티프를 통해 독자를 계몽시키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윽고, 근대 초기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한 문예잡지가 창간된다. 1918년 9월 26일자로 창간된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가 그것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타블로이드판 8면으로 간행되어 약 5개월 동안 통권 16호를 발행하고 종간되지만, 조선 최초로 외국 시론과 번역소설, 번역시 등이 게재되었다. 번역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최남선 번역은 근대 계몽의 기획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번안과 중역으로 인해 원본에 충실치 못했으나, <태서문예신보>는 내용과 형식 모두 원본을 충실히 지키고자 했다. 최남선은 주로 영미시나 외국 위인전기를 번역하여 계몽의 효과에 주목했으나, <태서문예신보>는 프랑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계열의 작품을 조선인에게 원본에 가깝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태서문예신보와 김억. 잘생겼다!!


    <태서문예신보>는 ‘태서(泰西)’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문예를 주로 소개하고 국내외 문단 사정 등을 게재하였는데, 대부분 시 중심으로 지면이 할애되어 ‘준 시전문지적’ 성격을 띠고 있다. 황석우, 백대진, 김억 등이 주로 작품을 번역하고 발표하였는데, 특히 안서 김억(岸曙 金億, 1896~?)은 베를렌느(Paul Verlaine, 1844~1896)를 위시로 한 프랑스 상징주의 계열의 시론과 작품을 번역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시창작과 시론 전개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는 1914년 <학지광>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후 납북되기까지 30여 년 동안 5권의 시집과 13권의 번역시집 등을 남겼다. 외국 역시집은 물론이거니와, 총 6권의 한시 번역 시집(700여 편)도 발간하였다. 물론 번역 시집들에 수록된 적지 않은 작품들이 중복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대 다른 번역인 혹은 지식인에 비교할 때 그 분량이나 수준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뒤이어 1925년 일본 동경에서 ‘해외문학연구회’가 조직된 이후 ‘충실한 번역’, ‘정확한 소개’, ‘진지한 연구’ 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세워서 외국문학 수입의 필요성을 재구하고 <해외문학>(1927년 1월 17일 창간호 발간, 같은 해 7월 4일 2호 종간)이라는 기관지까지 발행하면서 본격적인 번역의 근대화가 전개된다. 이른바 ‘해외문학파’의 출현(정인섭, 이헌구(평론분야), 이하윤, 김광섭(시분야), 김진섭(수필분야) 등 발족 당시 12명의 회원이 곧 30명에 가까운 인원으로 증가)인데, 그들은 외국문학을 번역함으로써 조선문학의 발전을 바탕에 두고 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좌익과 우익, 계급문학파와 국민문학파의 대립이 한창일 때, 해외문학파는 등장만으로도 주목받기 충분했다.

     이들은 조선문학은 곧 세계문학의 일원이며, 해외문학의 소개와 번역이 조선어를 풍요롭게 해줄 것으로 믿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원문에 보다 충실한 ‘직역’을 하고자 했으나, 이미 그들의 노정에는 난제(難題)가 도사리고 있었다. 언어가 다르므로, 원전에 충실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존 이중역과 삼중역의 문단 현실에서 외국문학 원전을 직접 입수하여 번역함으로써 새로운 번역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조선문학의 르네상스를 위해 외국문학을 수입, 번역해야 한다는 높은 이상을 품었다. 이들은 종간 이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번역과 더불어 다양한 방식으로 문단에 참여하게 된다.     


3. 최초의 찬송가


    다시 근대 초기로 거슬러 가면, 새로운 번역 성과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찬송가 번역이다. 근대 초기 문명개화에 대한 조선인의 관심은 서구 기독교 문화와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서와 찬송가라는 문자 텍스트를 접하게 된다. 이 당시 조선은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고, 서양 기독교인들의 조선 선교 활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직접적인 대인 포교 활동보다는 문서를 통한 간접 선교, 즉 성서와 찬송가 또는 소책자들과 같은 문자 텍스트로만 가능했다.

    최초의 한국어 번역 찬송가는 1892년 존스와 로드 와일러가 편찬한 <찬미가>로서 6판까지 간행되었으며, 두 번째 찬송가인 <찬양가>(1894)는 4판까지, 세 번째 찬송가인 <찬셩시>(1895)는 11판까지 발간되었으며, 이후 1908년에 이르면 한국 개신교 최초의 통일찬송가인 <찬숑가>는 6만권이 초판 간행되고 같은 해에 다시 재판 6만권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이에 비해 최초로 국문 시가가 실렸던 <독립신문>(1896)의 경우 발행부수가 최대일 때가 고작 3,000부임을 감안하면, 찬송가의 보급력은 국문 시가가 수록된 신문이나 잡지에 비해 막대한 파급력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일부 찬송가의 가사나 악보를 가지고 음악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찬송가에서 비롯된 후렴구 등의 형식을 차용한 국문 시가도 많이 창작되고 발표되었다.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와 통일찬송가 <찬숑가>. 한국 기독교는 찬송가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초창기 찬송가에는 악보 없이 노래 가사인 문자 텍스트만 수록되었다가 점차 악보와 같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근대 초기 시 형태에 있어 찬송가 번역이 어느 정도 영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찬송가라는 음악 양식이 국문 시가 형태로 번역되면서 음악 곡조에 맞추어 조선어의 자수를 대응시키는 작업 자체가 곧 조선어의 리듬과 만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응 방식은 단어와 단어의 번역이기보다는 악곡의 음표와 조선어의 음절을 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에, 찬송가의 번역 문제를 성급히 국문 시가의 음수율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곤란하나, 찬송가의 악곡에 조선어를 대응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다양한 조선어의 음악성―리듬 문제와 조우하는 일이었다.     


외국 노래를 가지고 조선말로 번역하고 곡조를 맞게 하여 책 한권을 만들었으니 …(중략)… 그러나 곡조를 맞게 하려한즉 글자도 정한 수가 있고 자음도 고하청탁이 있어서 언문자고저가 법대로 틀린 것이 있으니 아무라도 잘못된 것이 있거든 말씀하여 고치기를 바라오며
―H. G. Underwood, 「찬양가 서문」, <찬양가>, 예수셩교회당, 1894.


     언더우드는 찬송가의 번역된 가사와 한국어가 조화되지 않음을 번역의 어려움으로 꼽고 있다. 용어 선택의 문제나 적절한 의미 전달의 문제도 그렇지만,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영어와 한국어의 문법적 차이, 즉 리듬의 차이였다.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조선어로 옮기는 문제도 쉽지 않았지만, 악곡의 음표에 따라 음절 단위로 옮기면서 조선어의 통사적 구분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찬양가>(1894)의 <Praise the Lord who made the world>는 <이 세상을 내신 이는>으로 번역되면서 다음과 같은 리듬을 갖게 되었다.   

  

이-셰샹/을-내-/신-이-/는― //

여/호-와-/하ᆞ-나/뿐-일-/셰―//

텬-디만/물-내/신-후-/에― //

일/남-일/녀-시/조-냇-/네― //     


    통사적 구분과 상관없이 악곡의 2/2박자에 맞춰 한 마디에 ‘이 세상’, ‘을 내’, ‘신 이’, ‘는’이 각각 하나의 마디 안에서 불려야 했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4.4조의 전통적인 가사 율격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실제 악보에 의한 리듬 실현 방식을 보면 찬송가 가사는 음악적 실현을 전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찬송가의 파급력에 영향을 받아 근대 초기의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는 찬송가의 리듬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들이 많았다. 기독교계 학교에서 찬송가를 활용하여 교가를 짓고 음악 수업 교재로 활용했던 사실과 비슷한 맥락으로, 찬송가를 모방하거나 찬송가집의 명칭과 곡조를 작품에 표기한 작품도 상당수 존재했다. 즉 음악의 악곡을 전제로 하되, 시가의 내용은 다양하게 창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찬송가를 모방한 작품들이 한국 근대시 태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찬송가 번역이라는 서구의 음악 장르와의 교섭은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4. 오뇌의 무도화


     다시 김억으로 돌아오면, 김억은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인 <오뇌懊惱의 무도 舞蹈>를 발간한다.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계열의 시들이 번역되었다. 그는 베를렌느의 「작시법」을 중심으로 상징주의를 이해했기 때문에 시의 본질을 “관능의 예술”로 정의하고, 그것의 핵심을 “찰나찰나의 자극, 감동되는 정조의 음률”로 파악하여 ‘암시’와 ‘몽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번역시집은 한국 근대시 형성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뇌의 무도>가 발행된 뒤로 새로 나오는 청년의 시풍은 오뇌의 무도화하였다 할만큼 변하였다.”는 이광수의 지적처럼 이 한 권의 번역시집은 조선 문단의 시풍을 ‘오뇌의 무도화’시켰다. 한동안 프랑스 상징주의로 대표되는 퇴폐미와 낭만성이 시단을 유령처럼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로운 시의 리듬, 즉 전통적인 정형률에서 벗어나 소위 ‘내재율’을 가진 자유시를 촉발시켰다. 그는 최초의 근대 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발간하면서 자유시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집 <해파리의 노래>와 <오뇌의 무도>. 현재 초판본은 겁나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김억은 시의 정체성으로 음악성을 꼽았다. 그의 번역 활동은 조선어의 음악성에 대한 실험이자 조선어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였다. 그는 단순히 외국시의 의미만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시가 지닌 리듬을 조선어에서도 구현하려 했다. 이에 따라 그는 한자어나 고유어 사용, 조사와 어미, 리듬을 위한 모든 시적 장치를 모색한다. 이제 김억은 조선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조선적 율격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조선의 새로운 시로 상정하는 동시에, 프랑스 상징주의시를 번역하면서 발견한 ‘정조’를 어떻게 조선어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였다.  

    

보드라운손에 다치여울어나는피아노,

어스렷한 장비빗저녁에 번듯이여라.

가뷔야운나래로써 올리는힘없고고흔

지내간녯날의 오랜그노래의한節은

고요도하게, 두려운듯시두려운듯시,

芳香가득한美女의化粧室에 떠돌아라.     

불상한내몸을 한가히흔드는잠의노래,

이고흔노래曲調는 무엇을뜻하라는가.

곱하는루프렌은 내게무엇을求하여라.

물으랴고하여도들을길좃차 바이업시

그노래는 방긋히 열어노흔門들속으로

숨이여서는동산에서 슬어지고말아라.

― 베를렌느, 「피아노」 전문    

 

    김억은 베를렌느의 시를 번역하면서, 각 연을 6행으로 맞추고 1연 2행, 6행의 종결패턴이 2연 2행, 6행과 대응시킨다. 또한 띄어쓰기를 제외하면 하나의 연을 구성하는 한 행의 음절수를 15~16음절로 제한하였고, 2연의 경우 모든 행이 16음절로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김억이 시의 형태적 정형성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행의 음절수에 제한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문은 그렇지 않음에도 굳이 그와 같이 정형성을 유지한 이유는, 원문의 리듬감과 특정한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조선어로 전환시킬 때 가능한 방법론을 음절수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억은 동일한 음절수과 음가의 반복을 조선어의 리듬으로 보았고, 그에게 있어 번역은 ‘창작’이었기 때문이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원문의 분위기와 리듬을 조선어로 옮기면서 새롭게 쓰는 것. 그에 따르면 “번역이란 일종의 창작”이기 때문에 ‘창작적 의역’ 혹은 ‘시 번역의 불가능성’을 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김억의 관점은 해외문학파나 양주동 등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김억에게 있어 번역은 단순히 이국적인 것을 배우거나 ‘이식(移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역은 조선어의 지평을 확대하는 작업이자, 조선어 혹은 시적 언어의 고유한 자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김억의 시적 언어에 대한 천착은 곧 ‘조선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시형은 어떤 형태인가’라는 질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러한 모색은 근대시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5. 에스페란토와 조선어의 가능성

       

    김억은 또한 자멘호프(L.L. Zamenhof, 1859~1917)가 창안한 세계공통어인 ‘에스페란토’에 주목하여, 1920년 ‘조선에스페란토협회’를 창립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에 에스페란토를 보급하였다. 그는 조선시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조선시를 세계공통어인 에스페란토로 번역해야 함을 피력했다. 조선시가 전 세계의 독자들과 공유될 수 있으려면 어떤 나라나 민족에 속하지 않는 중립성을 가진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멘호프와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간지난다!

    에스페란토는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아니며, 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이상주의와 조선 문화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민족주의가 서로 만나는 자리였다. 그러나 김억 이외에 동조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김억의 에스페란토 운동은 결국 미완에 그치고 말았지만, 언어가 사고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소통시키는 투명한 매체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김억은 순수언어로서의 에스페란토에 대한 이상을 잃지 않았고,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후에 발표한 ‘격조시형론’ 등에서 우리는 김억의 새로운 ‘조선 시형’에 대한 기획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조선어의 음악적 요소를 어떻게 입증하고 조선 시의 특성은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탐구는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부합할 수 있는 시 형식의 모색이자, 조선인의 호흡과 감정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보편과 특수를 모두 갖출 수 있는 조선어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근대 초기 번역과 관련된 문제나 번역에 대한 태도는 한국 근대문학 형성기에 조선어에 대한 자각과 조선인의 리듬과 호흡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지 조선인 스스로 자문하게 하였다. 번역은 단순히 외국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번역을 통해 서구라는 이상화된 공간을 선망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조선 역시 서구와 동등한 문학작품을 갖고 있으며, 지금 없다면 앞으로 가질 것이라는 ‘낭만’은 식민지 현실을 초극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자 희망이었다.


ps : <모던걸 모던보이의 경성 인문학>(연인M&B, 2022)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본 글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search.daum.net/search?w=bookpage&bookId=6069148&tab=introduction&DA=LB2&q=%EB%AA%A8%EB%8D%98%EA%B1%B8%20%EB%AA%A8%EB%8D%98%EB%B3%B4%EC%9D%B4%EC%9D%98%20%EA%B2%BD%EC%84%B1%20%EC%9D%B8%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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