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luie Nov 02. 2020

95%의 편의점 밀크티를 찾는 모험

벌칙 음료였던 데자와부터 아쌈 밀크티까지

날이 조금 추워지고 나자 저녁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틴을 모아 둔 선반 앞에 서서 어떤 차를 마실까, 골라보곤 한다. 기본적으로 인퓨전이 아닌 이상 카페인은 어느 정도 다 있기 때문에, 양을 적게 해서 조금만 마시는 편이지만 사실 이 '리추얼'의 가장 큰 기쁨은 차를 고르는 순간에 있다. 


그러나 아주 피곤한 저녁, 말하자면 오늘 같은 날. 이상한 나라의 모자 장수같은 상사에게 시달려서 나도 모르게 인생에 회의가 드는 오늘 같은 날에는 좀더 진하고 눈이 확 떠질 만큼 당분이 듬뿍 든 음료가 마시고 싶기 마련이다. 


아삼을 잔뜩 넣고 밀크티를 만들어서 마셔 볼까, 아니면 미친 척 하고 아주 진한 홍차에 설탕을 가득 넣어 볼까. 그러다가 왠지 손이 슬쩍 가는 것은 시판 밀크티들이다. 내가 격세지변(!)을 느끼는 것은 다른 그 언제도 아닌, 드럭 스토어나 편의점, 심지어 동네 마트에서 - 동네 마트 무시합니까 - 다양한 종류의 시판 밀크티를 볼 때다. 


보통 RTD (Ready to Drink)라고도 불리는 차 베이스의 음료들은 일본에서 엄청난 규모의 시장을 가지고 있다. 일본 여행을 가 본 사람이라면 자판기에서 파는 수많은 음료 중에 차를 기본으로 한 음료들이 상당한 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차가 뭔지 잘 몰랐던 쪼렙 시절, 밀크티라는 메뉴를 홍대의 일본풍 카페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시절에도, 난 '밀크티가 좋아' 라는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때는 벌칙 음료라고도 일컬어졌던 '데자와'이다. 서울대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자판기 음료라는 도대체 원인 분석 불가의 소문도 있던 데자와는 국내 시판 밀크티의 시조새 격이다. 


지금은 데자와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예전에 비해 데자와에 대한 취향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늘어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그도 그럴것이, 90년대 말에 처음 등장한 데자와는 '좋아한다'고 말하면 입맛이 이상한 애라고 놀림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데자와는 대단히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고, 밀크티에 살짝 물과 설탕을 탄 듯한 색깔과 맛이 특징이었다. 심지어 우유 특유의 비린 향을 잡아주기에는 홍차 향이 커피에 비해 그 강도가 낮았다. 그래서 그 맛에 익숙해지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자와를 박스째로 사서 쟁여 둔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 글이 올라온 곳이 괴식 커뮤니티였다만 1일 1데자와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상 설탕 음료이기에 살찔 텐데 말이다.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왠지 잘 모르겠는 인도네시아


이름이 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조차도 단번에 알기 어려웠다는 점이 이 '데자와'의 수상쩍음을 더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네덜란드 어로 'Te Java', 자바의 차(= Tea of Java)라는 뜻이라고 한다. 


참고로 '자바 섬이면 커피가 유명한 데 아니냐?'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현재 차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가 자바 섬이기도 하므로 아주 생뚱맞은 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렇다하게 세계적으로 알려진 차의 캐릭터가 있는 지역은 아니기에 립톤의 '실론 티'만큼 지역성으로 승부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에 일본 여행을 좋아했던 것은 '오후의 홍차' 페트병을 마실 수 있다는 것과 '메이토' 밀크티 분말을 구할 수 있다는 이유가 컸다. 달콤하면서도 약간의 향신료 느낌도 나던 '오후의 홍차'는, 1.5리터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물론 1.5리터를 다 마시고 나면 사실 속이 좀 더부룩하긴 하다. 


그러나 페트병을 사서 비행기에 싣고 오기는 부담스러웠기에, 실제로 국내에 사들고 온 것은 메이토에서 나온 '로얄 밀크티' 분말이었다. 생각보다 분말을 많이 넣어야 맛이 제대로 나는데, 조금씩 아껴서 먹던 나는 애매하게 밍밍한 맛으로 '로얄 밀크티 향' 음료를 만들어 마시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온 Y(= 구 남친, 현 남편)가 내게 밀크티를 만들어 준다며 엄청난 양의 분말을 넣어서 밀크티 한 잔을 만들어 냈다. Y는 「 이게 적정 레시피야 :D 」 라고 해맑게 말했으며, 으로 훅 줄어든 메이토 분말을 보며 나는 분노했다. 그러나 사실 그 밀크티 한 잔은 눈물 나도록 달콤하고 맛있었더랬다. 


우연히 친구 손에 이끌려 가 본 남대문 수입 상가에서 이들을 발견하고 조금 김이 빠졌지만, 그래도 한동안 내게 '시판 밀크티'라면 이 두 가지가 70% 이상 진리였다. 


내 사랑 오후의 홍차(좌), 또 하나의 사랑 메이토 로얄 밀크티(우)


요즘은 워낙 시판 밀크티가 잘 나오고, 다양하게 나오고 있어서 가끔은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다. 밀크티라는 개념 자체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때를 생각하면 참 즐거운 일이다. 지금은 밀크티 메뉴가 없는 카페가 없고 편의점 매대에도 밀크티가 가득해서, 고르는 재미도 있다. 


꽤 인기를 끌었던 대만의 밀크티 3시 15분도 있었고 (미묘하게 밍밍한데다 약간 꽃향이 섞인 느낌이었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젖소 모양이 그려진 우유병 밀크티도 귀여워서 먹어봤다(맛이 애매하다). 태양의 홍차 화원이라는 음료는 거창한 이름, 그리고 오후의 홍차 짝퉁 느낌에 기대를 해서인지 꽤 괜찮았다. 다만 생각보다 여기저기 보이는 음료는 아니었다. 쉽게 마실 있는 종이팩에 아쌈 밀크티무난한 맛으로 근처에 있으면 자주 손이 같다. 립톤 밀크티「 립톤씨, 정신 차리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맛. 


메르시보니나 타라같은 차 브랜드에서도 시판 밀크티를 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내에서도 꽤 시장의 규모가 커진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아직은 많은 시판 밀크티 중에 입맛에 맞는 새로운 음료를 찾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70%, 80%, 혹은 95%의 시판 밀크티를 찾는 모험은 계속된다. 아마도 100%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취향이 더럽게 까다롭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판 밀크티 체험기도 별도로 볼까 싶다. 


※ 브런치북도 읽어 주시면 감사합니다. 매거진도 같이 읽어 주시면 좋구요. 


https://brunch.co.kr/brunchbook/teatable


https://brunch.co.kr/magazine/littleteaboo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