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뜻한 크리스마스 동화, 넷플릭스 오리지널 <클라우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보여질 이미지 혹은 미래의 이득을 위해 착한 행동을 한다. 예를 들어 팀플에서 귀찮은 일을 자진해서 맡으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고,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내키진 않더라도 나도 나중에 부탁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겠지 하는 실리를 따진다. 내가 항상 이렇게 계산적으로 따지며 행동하는 사막처럼 메마른 사람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선한 행동 뒤의 숨겨진 나의 본심은 누군가에게 밝히기 참 부끄럽긴 하다.
반면 선한 의도는 남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칭찬받을 만하다. 내 이런 가치관이 정립된 것은 손아귀 힘이 약했던 어린시절이었다. 나는 목이 아픈 아빠를 위해 유자차를 타주려고 했고 (=선한 의도) 냉장고에서 병을 꺼내 들었다. 내가 간과했던 사실은 병의 뚜껑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았고, 병을 제대로 잡으려면 몸통을 잡아야지 뚜껑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병은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쾅! 병 안의 내용물은 많이 튀지 않았으나 주방의 나무바닥은 움푹하게 깨졌다. (=나쁜 결과) 나는 혼이 날까봐 겁먹었으나,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다치진 않았니 걱정하시며 선한 의도를 칭찬해주시고 넘어가셨다.
선한 의도와 선한 행동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클라우스>에서도 이처럼 의도와 행동 사이의 괴리감이 눈에 띈다. 스미어렌스버그에 파견된 우체부 제스퍼는 자신에게 주어진 우편 할당량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받고 싶다면 클라우스에게 편지를 쓰라고 부추긴다. 장난감 장인 클라우스에게는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장난감을 배달해주자고 설득한다. 서로 못된 장난만 일삼던 아이들도 착한 아이들만 장난감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에, 착한 행동을 하고 이를 편지에 쓰기 시작한다. 모두 의도만 놓고 보자면 다소 불순(?)해 보인다. 제스퍼는 안락한 실크이불을 되찾기 위해, 아이들은 새로운 장난감을 얻기 위해 선한 행동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들이 한 선한 행동은 점차 타인을 따뜻하게 물들여, 갈등과 반목과 싸움이 가득했던 마을에 호의와 친절이 넘쳐나게 한다. 의도가 어떠했던 간에 “선한 행동이 다른 선한 행동을 낳”은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해타산을 따지던 제스퍼의 마음까지 바꿔놓는다. 처음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움직였지만 결국에는 다른 이들의 즐거운 웃음을 위해 행동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기심 = 선하지 않은 의도, 이타심 = 선한 의도라고 무조건 등치할 수 있을지, 의도와 행동을 양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한지 등은 더 고민이 필요한 문제지만, 지금은 이러한 고려는 차치하기로 하자.)
나는 무의식 중에 본심을 숨기고 착한 행동을 하는 건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의도가 선하지 않다면 선한 행동 그 자체도 비난해왔고, 어떤 점에 있어서 이는 타당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클라우스>에서 만난 선한 행동의 파급력과 따뜻함을 생각해본다면, 선한 행동 그 자체를 조금은 너그럽게 칭찬해주는 마음도 필요할 것 같다. 결말이 예상 가능한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나에게 감동과 여운을 준 건 내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 즉 선한 행동이 세상을 얼마나 따뜻하게 밝혀줄 수 있는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