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R Oct 31. 2024

<이반 일리치의 죽음>:그의 죽음으로 죽음이 사라졌다?

톨스토이는 꼬인 사람이 아니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학창 시절에 읽고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거나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10대, 20대에 이 책을 읽었다면 과연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때의 나라면  ‘톨스토이는 인간을 매우 시니컬하고 부정적인 시야로 바라보고 있구나, 작가가 좀 꼬인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당시의 나는 인간에 대해 무지했고, 동시에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말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매우 순진한, 아니 스스로도 속이는 기만이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들과 부대끼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행동에 상처를 받고, 욕했던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 안에 있는 날것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그간 여러 경험이 쌓이며 인간을, 아니 나 자신을 좀 더 알 수 있게 되어서 인지 책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작가가 시니컬한 시선보다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은 1880년대 러시아다. 2023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미지의 시공간.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발음하기도 어려워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이름도 생소한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이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공감이 되고, 각 인물들에게서 내 모습이, 내 주변 인물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앞에서 그의 가족과 동료들이 보여주는 겉과 속이 다른 가식,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인생의 목표인 사람들,

성공능력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서' 하는 어설픈 따라 하기 행동들,

자신의 불행은 남 탓이라 믿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아픔에는 사실 큰 관심 없는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인 ‘죽음’을 외면하고, 보이는 신기루를 쫓으며 사람들...


병에 걸리면서 단단했던 이반 일리치의 세계는 무너져간다. 그는 사람들의 가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아픔을 공감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를 낸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결국 자신에 닥친 문제가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 구나.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p66)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예출판사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죽음을 외면하는 사람들과는 결코 나눌 수 없다. 죽음의 실체를 대면한 사람에게만 그의 눈을 덮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던 ‘기만’의 막이 벗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삶도 죽음도 가려버리는 하나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기만이었다(p112)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예출판사



죽음의 실체를 대면한 후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며 그가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족들에게 불쌍함을 느낀다. 그들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모두를 괴롭히고 있다고 인지하고, 그들을 아프지 않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직면하고 있는 자신도, ‘죽음’을 외면하고 싶은 가족들도 모두 이 '죽음'으로부터 오는 고통에서 해방시켜야겠다고 말이다. 해답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이반 일리치가 죽으면서 죽음의 존재는 사라진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p119)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예출판사

그의 죽음으로 정말 죽음이 사라졌을까? 죽음은 사실 우리 곁에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죽음이 사라졌다고 자신을 속인다.



'사흘 밤낮을 끔찍하게 괴로워하다 죽었다. 언제든지, 지금 당장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서늘한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곧바로 그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그건 이반 일리치의 일이지 자신의 일은 아니다, 자신에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들었다. (p19)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예출판사




이전에 지인 어머니 장례식장에 방문해서 한껏 안타까운 듯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내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는 '늦게 와서 조의금을 못 전했는데, 따로 돈을 보내야 하나...?' 고민을 계속하고 있었다. 운구차에 관이 실릴 때 오열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무던하게 '뭔가 쌓인 게 많았나 보네, 그러고 보니 그 언니도 그랬었지'하며, 예전에 큰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조카인 친척언니가 우는 모습을 보며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큰아버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 절차를 진행하고, 관을 묏자리에 넣고 무덤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편에서는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도. 나는 아직 죽음이 나와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죽음,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모두가 죽음 앞에서는 그저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가 아닐까 싶다. 또 당장 내일 죽는다면, 지금이 죽음과 대면한 나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래도 나는 사람들의 인정에 일희일비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가족보다 상사의 눈치 보려 할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살아있는 죽음보다는 보이지 않는 신기루를 쫓으려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한 여름밤의 소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