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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Oct 30. 2024

한 여름밤의 소음

난 괜찮은데, 넌 아니었구나

악몽 같았던 여름날의 전쟁은 우리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 야외 테이블이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편의점 야외 테이블을 노천 술집처럼 이용하며 더운 여름밤을 보냈고, 밤 9시쯤 시작된 술자리는 자정을 넘어 새벽 3시-4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술 취한 사람들의 화난 듯한 큰 목소리가 실낱같은 바람이라도 통하길 바라며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여과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잠에 빠지는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 편의점에서 올라오는 소음을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었다. 문제는 방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에도 잠을 설치는 예민한 내 동생.


편의점 소음에 동생은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종종 베란다 창문에서 “조용히 좀 합시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다 곧 술 취한 사람들에겐 이런 외침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편의점 주인에게 항의했다. 주인은 소음주의 문구를 출력해 붙여 놓고, 새벽 아르바이트생에게 고객들에게 한 번씩 주의를 주라고 지시하고는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굴었다. 당연히 새벽 소음은 지속됐다. 동생은 급기야 민원을 넣고 경찰에 신고하는 것까지 알아봤는데, 민원도 경찰도 생각보다 드라마틱한 조치를 취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동생은 이 사태를 방관자처럼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에게 짜증 내기 시작했다. 특히 제일 무관심해 보이는 내게 제일 많이 화를 냈고, 나는 술 취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왜 감정 소모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같이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편의점 소음과의 전쟁은 여름이 끝나면서 자연스레 휴전 상태에 들어갔고, 가족 간 갈등도 일단락됐다.


몇 년 전부터 가족에게 독립해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그날도 평소처럼 늦은 저녁에 세탁기를 돌리려고 빨래를 주섬주섬 모으고 있는데 불현듯 히스테릭하게 화를 내던 그 여름밤의 동생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무딘 편이라 내 기준에선 '이건 소음까지는 아니다' 싶어 별생각 없이 했던 행동이지만 누군가는 밤마다 들리는 세탁기 소리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노이로제에 걸려 괴로워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뭉크의 '절규' 속 인물이 떠오르며 화들짝 놀라서 얼른 세탁기를 꺼버렸다.


이후에는 늦은 저녁에 세탁기를 돌리는 '진상 짓'은 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만의 시야와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일 텐데,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고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분명 고도화되고 성숙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나아가 상대를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참을 수 있고, 그 사람의 기쁨에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간다면? 정말 세상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세상에는 싸움도 살인도 없이 정말 아름답고 살 만하지 않을까...


늦게까지 소음이 용납되는 부산 광안리의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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