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어제는 비바람이 불었고 오늘 날씨도 심상치 않다. 평온하고 평화로운 마음에 또다시 불안함이 슬며시 들어온다. 오늘 엄마의 수술. 이 기도시간이 끝나면 괜찮아져 있겠지?! 불안함, 의심, 두려움이 생긴다. 예수님 저희 엄마의 두려움, 저의 두려움을 없애주세요. 아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나의 믿음이라는 건 이렇게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침묵 피정 3일 차'를 맞이했다.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 찼지만, 여전히 까만 구름 사이로 햇빛이 멋지게 산란현상을 보였다. 여전히 그저 쨍한 하늘보다 더 아름다웠다.
아침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삶의 먹구름 속에서 '신을 찾아가는 우리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떼제의 침묵피정 3일차, 오늘의 주제는 '누가 그 동행자일까?'였다. '알려지지 않은 동행(Unknown Companion)'에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이전보다 많은 양의 성경구절들을 읽도록 초대받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Luke 24.25-27)"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침통한 표정을 하고 걷는 그들에게 무슨 일인지 물으셨고,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던 예수님이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이며 시신도 찾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경의 기록들을 직접 설명해 주신다. 나에게 떼제의 시간들이 이러했다. 슬픈 얼굴로 방황하고 있던 나를 직접 이곳으로 불러 주시고 바로 옆에서 당신에 대해 하나하나 다정하게 이야기해주시는 모습이 그려졌다.
수녀님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거라 예고하는 장면'과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종의 노래'부분을 함께 읽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자고 하셨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지식적인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 미스터리 한 '기적'들과 드러나지 않은 '비밀',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고, 어떤 존재일까.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믿지 못했던,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들은 그저 신기했고, 진실은 비밀스럽게 비단 보자기에 꽁꽁 감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녀님 말씀처럼 이런 건 대립하는 개념이라기보다 과정이지 않을까. '앎'을 통해 믿게 되고, 기적을 통해 비밀이 드러나는 것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다윗 집안의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보내신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임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말한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간다.
수녀님은 이번 묵상과 기도시간에는 우리가 읽었던 성경의 장면들 속으로 각자 들어가 보자고 하셨다.
먼저, 눈과 귀를 열어달라고 은총을 구하며 기도와 묵상을 시작한다
성경의 장면을 떠올리며 '장소'를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보자
내가 어디쯤에서 보고 있는지, 시각적인 것, 소리, 촉감까지 모든 감각을 동원해보자
무엇이 보이고, 들리는지, 어떤 말씀이 와 닿는지, 내 삶으로 들어오는 건 무엇인지 느껴보자
감사를 드리며 마침 기도를 한다
나는 기둥 뒤에 숨어 숨죽이며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을 지켜보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리아는 침착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let it happen to me)."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성경공부를 마치고 원하는 사람은 수녀님과 개인면담을 할 수 있었는데 이 날은 'let it happen to me'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약혼자까지 있는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거라는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지 물었다. 이 상황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아니 최소한 나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내 오랜 마음속 친구인 '불안과 두려움' 이런 감정들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을 앞두었을 때, 그리고 '엄마의 수술'같은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 닥쳐올 때 더욱 증폭되는데 그때마다 나는 무기력하게 주저 않아 '침통한 얼굴'을 한채 슬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씀드렸다.
수녀님은 에메랄드빛 눈을 반짝이며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지 떠올려보라고, 처음에는 그녀도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마리아는 인간의 눈으로는 지금 당장 보이지도 이해되지도 않지만 더 큰 '선(善)'을 향한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굉장히 '적극적인 결정'을 한 거라고. 수동적으로 따르거나 일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적극적인 결심'인 거라고.'
'물론 부모의 죽음, 실연, 실직, 이런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너무 어렵지만, 주저앉아 슬퍼하기만 하는 건 그분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분, 그 어느 것보다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원하는 분,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주시는 그분을 믿고 '어떠한 결과든 받아들이겠다'라고 결심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라고. 구체적인 선택이 힘들 때 천사가 이렇게 뿅~하고 나타나 계시해주면 좋겠지만, 우선은 좋은 점, 나쁜 점들을 종이에 적어보고 기도하고 결정하라고.' 수녀님은 빙긋 웃으시며 구체적인 방법들까지 제시해주셨다.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층계를 올라갔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그래 잘못된 선택이라면 반드시 일깨워 주실 거고 조금 돌아갈 뿐 결국 길은 하나로 만나게 되어 있지. 아름다움과 슬픔이 뒤섞인 인생길도 주님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지.'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말씀이 계속 맴돌았다.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따뜻한 차와 말씀들이 위로가 되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간 예수님이 이를 말리는 요한에게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시자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장면과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들을 묵상하고 기도했다. 신은 성경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걸으며 다 설명해줄게. 믿음을 가지고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 내 소중하고 특별하고 독특하게 아름다운 내 피조물아."
예전의 나에게 신이라는 존재는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램프의 요정 '지니'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종종 내가 원하는 것 대신 엉뚱한 것을 내놓았다. 800 km의 프랑스길을 걷는 대신 떼제에서의 부활과 침묵 피정이라니, 이 수수께끼 같았던 신의 질문에 이제야 감사하며 대답할 수 있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let it happen to me)."
'지금, 여기', 그리고 나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주님, 당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느끼고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존재, 당신이 만든 지구 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느끼고 경험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사, 기도, 자주 산책하며 당신의 선물인 자연과 그 안에 당신이 존재함까지 항상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과 함께 당신의 현존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길 청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이상하게 시작된 여정을 통해 당신에게 들은 모든 것들, 당신이 알려주신 이 모든 것들을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우리 모두를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당신의 존재와 섬세함을 진심으로 믿으며 떼제에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