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은 출근하자마자 예금계 홍주임에게 붙잡혀 자료를 맞추고 있었다. 복학하기 전에 우체국 민원 안내 아르바이트나 하려고 들어왔는데, 예은이 물리 전공인 걸 안 뒤로 홍주임은 복잡한 자료만 있으면 다 떠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 공대 누나들이 잘하잖아, 그죠?”
반말과 존댓말을 교묘하게 섞어 쓰는 것이 은근히 거슬렸다. 물리는 공학 계열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예금계 장기 보관 중인 서류를 다 끄집어내 정리하라고 할 것 같았다. 어서 이 지겨운 작업을 마치고 우체국 보충역인 진영에게 자판기 커피를 마시자고 하고 싶었다.
우체국에 처음 온 날, 텀블러에 물을 받는 예은에게 진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진영은 자신이 국제 피아노 콩쿠르 수상자라 보충역이 되었다며 묻지도 않은 개인 신상을 털어놨다. 병약한 이미지에 어딘가 예술적인 느낌이 있다 했더니 괜한 게 아니었다. 진영은 예은에게 전공이 뭐냐고 물었다. 예은이 물리라고 하자 진영은 뜨악한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물…리, 그 물리?”
예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영은 생수 컵을 찌그러트리며 말했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그 뒤로 진영은 예은과 마주쳐도 시큰둥했다. 마주칠 일이 있으면 왠지 피하는 느낌도 들었다. 예은이 눈에 띄는 형광 색깔 조끼를 입고, 뒷짐을 진 채 우체국 안을 걸어 다녀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물리가 뭘 잘못했을까? 진영에게 예은은 관측되지 않은 채 입자와 파동으로만 존재하는 전자인지도 몰랐다.
오전 10시쯤 되자 진영이 한 중년여성에게 붙들려 진땀을 빼는 것이 예은의 눈에 들어왔다. 예은은 눈과 손은 계산기에 두고, 귀를 쫑긋 세워 상황을 엿들었다. 여인은 억울한 얼굴로 진영에게 말했다.
“내가 등기 접수 기계를 한두 번 써본 게 아니에요. 전화번호 입력하고, 카드 결제한 다음, 온라인 영수증을 선택하면 바로 영수증이 날아오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안 온단 말이에요.”
진영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선생님 말씀대로 영수증이 와야 맞습니다. 제가 직원분께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러고는 9번 창구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예은은 얼굴을 찌푸렸다. 민원인의 말을 저렇게 다 받아주면 피곤했다. 뭐가 문제인지 간단히 말하면 좋은데 꼭 기승전결을 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경우 해결책을 알려줘도 자기 논리를 버리지 못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은은 달려가 진영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등기 기계와 관련된 건 도울 수 없었다. 9번 창구직원이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영이 상황을 설명하자 창구직원은 피곤한 얼굴로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여인은 의문에 휩싸인 채 진영만 쳐다보았다. 업무를 마친 창구직원이 열쇠를 들고 일어섰다. 그가 기계로 걸어가자 진영과 여인도 졸졸 따라갔다. 창구직원이 기계를 여는 동안 옆에서 여인이 또 입을 열었다.
“등기 기계를 몇 년째 사용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예전에는 일일이 창구에 줄 서서 접수하고 그랬잖아요? 기계가 생긴 뒤로는 쭉 기계만 이용해왔고, 종이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온라인 영수증만 받아요. 그런데 영수증이 안 오다니, 황당하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영수증은 못 받더라도, 나중에 우편물이 잘 도착했는지 메시지도 확인해야 하잖아요.”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금방 확인해 드릴게요.”
창구직원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기계를 열었고, 여인의 우편물을 꺼냈다.
“이거 선생님 우편물 맞으시죠? 발급 증지 잘 붙어있네요. 이걸 휴대폰으로 찍어두세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이걸로 다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직원의 말이 여인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문제요?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말씀이세요? 사진을 찍으라면 찍겠는데, 제가 아무래도 전화번호를 잘못 입력한 것 같아서 그래요. 실은 제가 등단 시인입니다. 이번에 장비 출판사에서 원고를 청탁받아 보내는 건데 말이에요.”
여인은 아무도 묻지 않은 얘기를 늘어놨고, 창구직원과 진영은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우체국은 상담실이 아니다. 민원인이 자기 서사를 펼치게 내버려 둬선 안 된다. 예은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터득한 사실을 왜 저들은 모를까. 진영이야 그렇다 쳐도 직원까지 저러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책이 필요하다 싶은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예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의 동시에 홍주임이 뒤에서 외쳤다.
“다했어? 아직이야?”
“아…니요, 아직.”
예은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 사이 창구직원은 여인에게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기획팀 이 실장에게 갔다. 이 실장은 자초지종을 들어보더니 근엄한 얼굴로 슈트 상의를 잠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직접 나선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우체국을 가로질러 걸어와 등기 기계를 다시 열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런 다음 몇 가지 승인 절차를 거쳐 여인에게 영수증을 새로 발급해주었다. 이제 되었냐는 얼굴로 이 실장, 창구직원, 진영이 여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전전두엽이 마비된 얼굴로 말했다.
“이걸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확인 문자가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제가 전화번호를 뭐라고 입력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요?”
우체국 모든 직원과 고객이 이 상황을 주목하고 있었다. 예은은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냐는 홍주임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여인에게 말했다.
“선생님! 잠깐 휴대폰 좀 보여주세요. 공공와이파이가 가끔 안 잡힐 때가 있거든요.”
갑작스러운 예은의 등장에 여인은 당황했지만, 순순히 휴대폰을 켰다. 예은은 화면을 보고 있다가 얼른 데이터 버튼을 켜주었다. 잠시 후, 정겨운 소리가 우체국 안에 울려 퍼졌다.
“카톡!”
여인이 화면을 보더니 외쳤다.
“왔어요!”
여인이 간 뒤, 예은은 택배 포장 대에서 테이프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등을 콕 찔렀다. 돌아보니 진영이었다. 손에는 자판기 커피 두 잔이 들려있었다.
“어떻게! 데이터 버튼 켤 생각을 했어, 난 진짜 생각 못 했는데.”
그러더니 진영은 특유의 예술적이고도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리과라 다르네.”
예은은 그 미소에 빠져들 뻔했다가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데이터 버튼은 관측되기 전까지 켜짐과 꺼짐이 중첩된 상태거든. 내가 외부요인으로서 상태를 결정지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눈으로 확인할 때까진 모른다고.”
대단한 이론이라도 설파하듯 진지한 예은을 보며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은은 머쓱한 얼굴로 덧붙였다.
“사람도 마찬가지지. 겪어보기 전엔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러고는 생각했다.
‘지금 들이댄 거?’
진영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