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복학생이던 나에게 커피와 함께 연락처를 건네던 어여쁜 그녀와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나와 너무 비슷한 이름 때문에 그녀에게 몰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내 이름이 불쑥 튀어나와 둘 사이를 막아선다. 과연 나는 이런 딜레마를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강숲과 강숩은 팔짱을 낀 채 여느 커플들처럼 식사를 하러 갔다. 잠깐 동안 이름의 무게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서로 눈을 마주치며 파스타를 먹으니 다시 또 '이름의 망령'이 나를 찾아왔다.
"숩아!"
그녀만을 부르고 싶었지만 나 자신 또한 함께 부를 수밖에 없는 이 오글거림, 나는 그런 별 것도 아닌 것에 계속 고통받는 찌질이였다. 내가 말하기보단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는 식이었기에 대화 자체에서 어색함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숩의 마음속에 숲이 더욱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즉, 숩의 눈에는 숲이 가득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숲의 눈에도 숩에 비친 빽빽한 숲에 가려 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걸 과대망상이라고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숩의 눈이 초롱초롱해질수록 숲은 미안해졌다.
그날 밤 숲은 사색에 잠겼다. 이건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숲에게 숲이라는 건 숲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십몇 년 동안 자라온 숲의 나무들이 빼곡히 담겨있는 단어였다. 그 어휘만큼은 내 고유의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그녀가 나 자신이어야 할 그 단어를 꼭 움켜지고 있었기에 내 뇌는 계속해서 혼동을 일으켰다. 이 관계는 끝나야 한다. 오로지 진심일 수 없다면 우리 사이를 이어나갈 수 없다,라고 그 당시의 나는 판단 내렸다.
이미 그렇게까지 생각한 이상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크리스마스였고 우리의 첫 공식 데이트였다. 게다가 설레는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한 그날, 숲은 숩에게 그런 사실을 통보할 수 없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눈을 뜨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녀에게서 카톡이 와있었다.
"오빠, 저 전화해도 돼요?"
곧 그녀의 울적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너무나 생생한 악몽을 꿨다는 것이다. 내가 차갑게 말하면서 이제 그만 만나자고 했다고...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가까워지고 있던 오빠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 일어나자마자 너무 슬펐다고 했다. 소름이 돋았다. 이게 여자의 직감이란 건가... 그 말에 어떠한 위로를 해줘야 할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 잠깐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정확히 말해 내 입이 거짓말을 해버렸다.
"진짜? 내가? 말도 안 돼. 원래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 내가 갑자기 너를 그만 만나자고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