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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n Jul 07. 2019

호주에서 자리잡기



호주에 산지 1년이 좀 넘었을 때부터 나는 조금씩 괴리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열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하나둘 씩 자신의 나라로 떠나가게 되고, 나도 내 생활에 바빠 새로운 친구를 사귈 시간을 좀처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주 그룹을 지어 여행을 다니며 누구보다 친구들과의 시간을 즐기던 내가 "사람은 누구나 결국 혼자야"라는 말을 매일같이 마음에 새기게 될 줄이야...


애써 담담한 척해봐도 혼자가 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쯤 나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의 주인은 꽤 성공한 사업가로 시드니에만 약 4-5개의 레스토랑을, 그리고 멜버른과 브리즈번에 각 1개씩, 또한 공장을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변태끼(?)가 있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사업적으로는 꽤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그의 아들인 유타 또한 그의 비즈니스를 돕고 있었는데,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를 통해 나의 얘기를 들은 유타는 내가 시드니에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매니저로 일을 해볼 것을 제안했다. (그 당시 회사에서 스폰서 비자를 받고 일을 하면 영주권 신청이 가능했음)



나는 평소 레스토랑보다 커피숍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기에, 사장의 카페 한 곳에서 일단 부 매니저로 일을 배우기로 했다. 커피숍 일은 정말 재밌었다. 물론 일본식 카페라 커피보다는 맛차, 맛차 라테, 맛차 아이스크림이 더 유명했지만 음료를 만들고 토핑을 얹고 하는 일은 꽤 내 적성에도 맞았다.



그곳에 있던 매니저는 일본인으로 30대 중반의 여자였다. 미사코라는 이름의 이 매니저도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카페의 오픈과 함께 이 곳의 매니저가 되었고, 회사에서 스폰서 비자를 막 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본인인 그 가게에서, 나는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 일을 하러 가기 시작한 날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유타의 추천으로 레스토랑에서 카페로 온 것은 매니저도 물론 알고 있었다. 가게에 도착해 인사를 했지만 그곳의 누구도 나에게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조금 상냥해 보이는 직원 중 한 명에게 다가가서, 제가 뭐를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어도 "아.. 매니저에게 물어봐"라고 말하며 쌩하고 가버리기 일쑤.

어쩌다 매니저에게 일을 배울 시간이 되어도, 정말 속사포같이 빠르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딱 한 번만 말을 해주고 떠나버렸다.


가장 힘든 것은 아무도 나와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서 매일매일 마음이 힘들어 눈물이 쏟아졌지만 어디에도 말할 곳이 없다는 게 너무 괴로웠다.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 속의 번호를 주르륵 내려봐도, 단 한 곳도 전화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고집을 부리듯 떠나온 타국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얘기를 하면, 다들 "그것 봐 힘들 거라고 했잖아... 돌아와"라는 말을 할 것만 같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만두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카페를 갔다. 출근 시간보다 일찍 나가서, 가게 근처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울지 말자 힘내자! "

그리고 가게에 도착하면 "오하요 - "하고 누구보다 밝게 인사했다.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게 내 마음이 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일도 눈에 들어왔다. 작은 수첩을 꺼내 들고 다른 사람들이 음료를 만들 때 뒤에서 지켜보며 레시피를 적었다. 가게 메뉴는 이미 사진을 찍어두고 다 외웠다.

누가 시키는 일도, 가르쳐주는 것도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크게 실수하지 않을 만한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설탕을 담아둔 통이 비어있으면 새로 채워놓거나, 테이블을 치우거나, 재고들이 떨어지면 채워놓는 일, 동료들이 사용한 믹서 등의 설거지를 내가 대신하는 등의 일을 시작하였고 그렇게 하다 보니 조금씩 음료를 만드는 일도 도울 수 있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내가 음료를 만드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이스 음료를 만드는 것은 전부 내 차지가 되었다. 여전히 직원들은 냉담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음에 기뻤다. 바쁘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도 시간이 잘 가기 때문이다. 정말 쉴 수 없이 음료를 만들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그리고 마감이 되면 자처해서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큰 검정 쓰레기봉투로 몇 개의 쓰레기가 매일 나오는데 꽤 먼 거리를 버리러 가야 한다. 무겁고 냄새나는 일이라 다들 기피했는데 나는 매일 나서서 쓰레기를 버리러 가곤 했다.


사실, 내가 가장 서러웠던 부분은 식사 부분이었다.

카페에서 일하면 중간에 점심 혹은 저녁 시간을 갖는다. 매장에서 만드는 핫도그를 직접 만들어서 먹거나 옆에 있는 라멘 가게(같은 사장)에서 먹을 수 있었다. 우리 매장은 너무 바빠서 대부분 점심 혹은 저녁시간을 갖지 못했는데, 그럴 경우 핫도그나 칩스 등 매장에서 파는 음식을 포장해서 집에 가져갈 수 있다.


처음 2개월 정도, 나는 모든 직원들이 음식을 포장해서 가는 것을 보면서도 한 번도 음식을 가져간 적도, 점심시간을 가진 적도 없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괴롭힘임을 알았지만, 나는 불평하거나 티 내지 않고 묵묵히 버텼다.






길고 긴 터널의 끝


2개월이 좀 더 지났을 무렵부터 미사코는 나에게 조금 더 중요한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차갑고 냉담하긴 하지만, 내가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것은 분명 알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렵, 나를 힘들게 했던 동료들도 대거 그만두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가 종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직원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은 미사코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새로운 직원들을 언제나 도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최선을 다했다.

동료가 하나둘씩 생기면서 카페 내의 분위기도 화기애애 해졌다. 일 하러 가는 것이 조금씩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드디어 밝은 빛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P.S 시드니에서 달링하버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을 찾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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