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독후감 4#희곡 <맨 끝줄 소년>_후안 마요르가
학창 시절 모 교수님을 떠오르게 한 작품
작품을 읽는 내내 난 대학 시절 국문과 모 교수님이 자꾸 떠올랐다. 그 교수님께서는 항상 교양 수업시간(그 교양 과목은 공교롭게도 ‘연극의 이해’였다.)에 에로틱 판타지 소설, 소위 말해 야한 소설을 써 내는 것을 과제로 주셨다. 그 과제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간단하다. 교수님의 취향에 들어맞는 소설을 써야 하는데, 교수님의 취향이라는 게 소설에서 그 교수님이 남자주인공으로, 빨간 매니큐어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이 여자주인공으로 등장해야 하는 게 필수 조건이었다. 가상의 캐릭터가 아닌 실제 인물을 등장시켜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을 써야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은 그가 지닌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건 물론 감옥까지 갔다 오셨다. 결국 그는 자살하셨다.
2019년에 공연되었던 연극 <맨 끝줄 소년> 포스터.
인정은커녕 이해받지 못하는 클라우디오의 마지막은?
작품 속 클라우디오는 그 교수님과 비슷하다. 그는 자기 친구의 엄마에 대한 생각을 소설에 거침없이 풀어놓고, 그것을 읽은 독자로 하여금 그것이 실제인지 소설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클라우디오는 그 글을 쓰며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실생활에서 드러내는 건 범죄일지는 몰라도) 문학 작품에 풀어 놓는 것은 예술이 된다는 그의 생각은 그 교수님의 생각과 너무도 유사했고, 사회적으로 좀처럼 인정받기 어렵다. 나 역시 그 교수님이 지닌 천재성은 인정하지만, 그를 존경하진 않고, 아직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난 클라우디오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만약 이 작품 내용이 이어진다면 클라우디오가 자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클라우디오를 이해하기 어려울까?
클라우디오의 작품 내적으로만 보면 그의 관점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는 묘사가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굉장히 구체적이고, 몰입감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클라우디오가 불편한 걸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애매한 인생 내내 정석대로 살아온 내게 클라우디오가 써낸 상식 밖의 이야기는 단순히 예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거북하다. 나는 예술이, 각종 규범으로 이루어진 사회와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예술에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한들, 표현의 자유도 어느 정도의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선을 넘은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욕망을 함부로 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클라우디오가 라파의 어머니에 대해 욕망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욕망을 사회적으로 규정된 선을 넘어 표현하는 것은 막아야 하고, 그가 쓴 소설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헤르만처럼 되는 게 무섭다.
헤르만은 (심지어 클리우디오의 선생님인데!) 클라우디오 곁에서 클라우디오가 자신의 욕망을 소설에 마음껏 펼치도록 부추긴다. 그러다가 결국 클라우디오가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결국 클라우디오의 소설 속에 헤르만 자신과 헤르만의 아내도 등장하게 된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정 인정하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헤르만이 처음부터 클라우디오가 소설 쓰는 것을 막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클리우디오의 비극이 예상되기에 헤르만을 무작정 비난하기도 참 어렵다. 클라우디오를 현실 속 내 교수님에 대입시켜 본다면, 클라우디오가 소설 쓰는 걸 막는, 즉 작품 속 헤르만과 반대되는 행동은 현실 속에서 그 교수님을 감옥으로 보내고, 왕따 시키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한 사람들과 유사한 행동이다. 나는 그 교수님이 굉장히 안타깝고 안쓰럽지만, 나 역시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간 사람들과도 다르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헤르만처럼 되는 것은 무섭기에.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085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