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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호호 Sep 02. 2019

썸은 나라와 언어를 가리지 않습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가#한국어학당 수필 3

 “주말에 뭐할 거예요?”

 “동대문에 갈 거예요.”

 “언제 갈 거예요?”

 “1시에 갈 거예요.”

 “같이 가요.”


 너무도 간단한 대화에 귀여운 초등학생들이 말하나 싶다가도 기계적인 말투에 로봇인가 싶기도 하다.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스무 살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대화에는 사랑의 두근거림, 사랑의 전 단계라 말하는 ‘썸’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이 대화에서 남녀가 어떻게 썸을 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주인공 남자와 여자가 한국어를 배운 지 세 달 된 중국인 남학생과 여학생임을 안다면 그 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어를 배우러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오는 외국인들이 늘어났듯이, A 대학교에도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 학생들이 많아졌다. 나는 A 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초급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 초급반인 우리 반 학생들 중 장호 씨(가명)는 중국 길림에서 온 학생으로 유독 장난기가 많았다.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장난을 잘 쳐서 하루는 장호 씨의 자리를 우리 반 1등인 혜진 씨(가명) 옆으로 옮겼다. 혜진 씨도 장호 씨처럼 중국에서 온 학생이라 수업에서 장호 씨가 이해를 하지 못한 게 있으면 중국어로 친절히 설명해주며 장호 씨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장호 씨는 혜진 씨 옆에 앉은 후 곧잘 수업에 집중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장호 씨와 혜진 씨뿐만이 아니다. 반 전체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주말에 뭐할 거예요?”

 “동대문에 갈 거예요.”


 우리는 장호 씨와 혜진 씨의 주말 계획에 관한 발표를 집중해서 들었다. 장호 씨가 그렇게 한국어를 진지하게 말하는 것도, 혜진 씨가 그렇게 부끄럽게 발표하는 것도 처음 들었다. 발표를 들으면서 그제야 나는 눈치챘다. 그동안 다른 선생님들께 한국어학당에서 외국 학생들이 한국어로 썸을 탄다는 얘기를 듣기만 하다가 수업에서 학생들이 한국어로 썸을 타는 걸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 후 장호 씨와 혜진 씨는 중간시험이 끝나고 커플이 되었다. 커플이 된 후로도 이들은 적어도 한국어 수업 시간에는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얘기하며 연애를 했다. 선생님으로서는 이들이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도 썸을 타고 연애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이 연애하느라 한국어 공부를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장호 씨와 혜진 씨는 한 학기 동안 한국어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중급반으로 진급했다. 이들의 한국어 공부가 계속되면서 두 사람의 한국어 대화도 점점 복잡 미묘해질 것이더라도, 초급반 때 이들이 나누던, 직설적이면서도 풋풋한 한국어 대화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들의 대화는 초급 한국어로 이루어진 간단한 대화였지만 어쩌면 가장 솔직하면서도 순수한 대화였다.      

사랑의 도시, 남원 광한루에서 장호 씨와 혜진 씨를 떠올리며 찍은 사진


이 글은 대학교 재직 당시 2018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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